[79화]
거점으로 삼은 이 마을은 꽤 활기가 넘치는 마을이었다. 마을이라고 하기에는 크지만, 본래 그렇다는데 뭐.
마을을 둘러보니 참 카인이 자기 닮은 마을을 선택하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는 건데?”
“음 촌장이라고 해야 하나 뭐 하여튼 그런 사람?”
자유섬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새삼 내가 얼마나 좁은 세상에서 살았는지 알았달까.’
불스 용병단에서 수호 용병으로 살아가면서 많은 세상을 접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인 문화의 틀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자유섬은 그 틀 자체가 달랐다. 다행히 언어가 하나라 적응하는 데 무리는 없었다.
‘그렇다고 아직 익숙해진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우선은 귀족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충격적이었다. 세상에 그런 곳이 있다는 상상은 하지 못했다.
‘오로지 장로라는 특이한 위치가 있다고 했지. 장로라는 게 혈족으로 물려받는 것도 아니고.’
그중에서 가장 어린 장로가 촌장의 직위를 역임한다는 것도 특이했다.
다른 평소에는 장로들은 교육자이자 조언자의 역할만 맡는다고 했다.
“촌장이라면 그 장로 중에 가장 어린 사람이라는 거지?”
“응. 그렇지! 어차피 우리가 만날 사람을 만나려면 촌장님에게 부탁해야 하거든.”
두 사람은 이미 자유섬에 대해서 빠삭한 듯했다.
“우리 마을 촌장님은 엄청 어리셔! 심지어….”
카인이 말을 이으려는 찰나에 마을 한 어귀에 있는 집에서 건장한 여성이 튀어나왔다.
“량이야아아아~~ 이 누나한테 장가 오려고 온 거야~?”
‘빠르다..!’
검은 머리에 구릿빛 피부의 여인이 순식간에 자신을 지나쳐 량이에게 향한다.
‘저 여자가 촌장?’
아무리 보아도 자신과 그렇게 나이 차이가 나 보이지 않는 여성. 방금의 몸놀림만 보아도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저…저리 가요오….”
량이 저렇게 힘이 없이 잡혀 있는 모습을 처음 본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여성이었다.
“아구아구.. 우리 량이느은 왜 이렇게 귀여울까아.”
두 사람이 마치 다른 세계에 잠시 괴리되어 있어 보였다. 그들만의 세상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조금 시간이 지나가서야 자신들에게 눈을 돌리는 여성.
“흠…. 여기는 우리 이쁘니 친구고.…. 오? 어머? 대단한데?”
품평하듯이 자신을 보면서 놀라고 감탄하는 여성. 참 정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흠 이 친구가 그 친구인 거 같은데. 라니우스님의 제자라는. 맞아?”
“아 네. 안녕하세요. 범이라고 합니다.”
“흐응. 흐응. 흐응.”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곰방대를 물고 더 자세히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시선이 불쾌한 것이 아니라 부끄러웠다. 농염한 여성의 끈적거리는 눈빛은 살면서 처음 받아보는 것 같았다.
“뭐 이 정도라면 쓸만하겠는데?”
“칼라님도 정말! 쓸만한 게 아니라 대단한 거죠!!”
“뭐 나이대를 생각해보면 꽤 대단하긴 하지만.. 그닥..”
카인이 저렇게 편하게 대하는 모습을 하는 사람이 또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근데 광경이 참.’
여전히 량이를 꼭 껴안고 카인과 투닥이는 모습이 무슨 남매를 연상시키는 기묘한 광경이었다.
“저 칼라? 님? 그런데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한참을 투닥거리는 둘이 끝나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량이의 시선을 계속 외면할 수도 없어서 던진 질문이었다.
“와 꼬맹이가 설명 안 해줬나 보네. 쯧쯧. 우리 꼼꼼한 량이라는 다르네.”
‘량이도 같이 있었는데..’
“별건 아니고, 너희가 이 마을의 치안을, 그러니까 대충 이 마을의 주인이 되는 의식이라고 생각하면 돼.”
“네?”
따라갈 수 없는 이야기였다. 마을의 주인이 이렇게 갑자기 될 수가 있는 것인가. 뭔가 싶었다.
“아 너는 육지 사람이라 잘 모르겠구나. 우리 량이는 다 알고 있던데.”
괜한 면박이었다. 아니. 량이랑 자신이랑은 비교할 대상이 아닌데.
“음 쉽고 간단하게 말하면. 자유섬은 강자지존(强者至尊 : 강자가 가장 존귀한 자)의 법칙에 따라서 운영된다고 생각하면 돼.”
“아니 그건 알긴 하지만….”
“하지만, 동시에 의무도 져야 하는 거지. 그저 홀로 강자로 지내는 게 아니라 세력을 이루고자 한다면. 의무가 부과되는 거야.”
칼라님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떠오르는 것이 있었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런 이들은 시험을 받게 되는 거지. 우리 마을은 3 대장님의 관할이고.”
“어 혹시 그거.. 화쟁투(花爭鬪) 아닌가요? 조금 달라진 것 같기는 한데.”
그 말에 눈이 동그래지고 량이를 쓰다듬던 손이 멈추는 칼라님. 그사이 량은 잽싸게 탈출했다.
“어머? 네가 어떻게 화쟁투를 알아? 그건 이제 사라졌는데, 아니. 우리 안에만 하는 건데?”
화쟁투(花爭鬪) 꽃이 서로 다투다는 이름만 들어서는 아름답고 격정적인 장면이 떠오르는 이름.
하지만 그 반대로 그 무엇보다 피비린내가 넘실대는 이름이었다.
‘로즈 골드님의 책에 나와있었지. 모든 것을 걸고 하는 전투이자 쟁투라고.’
해적들의, 아니 본래는 자유섬의 존재하는 모든 이들에게 결코 어겨서는 안 되는 불문율. 그것이 화쟁투였다.
억울함을 풀기 위해, 세력을 넓히기 위해, 복수하기 위해 등의 어떤 이유이든 상관이 없었다.
꽃의 증표를 가진 이가 화쟁투를 신청하면 그를 거부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의 모든 것을 걸고 하는 전투이자 전쟁.
그것이 바로 화쟁투였다.
‘그런데 지금은 시험 같은 거로 바뀐 것 같단 말이지.’
상념을 거두고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칼라에게 화답했다.
“아니. 저도 들은 게 있어서요. 모든 것을 걸고 하는 전투. 그중에서도 마을을 차지하려면 꼭 해야 하는 전투라고….”
‘이 이상을 알고 있다고 하면 진짜 큰일 나겠지만.’
로즈 골드의 책에는 자유섬에 대한 비밀이 꽤 많이 적혀있었다.
“흐음 뭐. 그렇다고 하자. 맞아. 화쟁투랑 비슷한데, 증표를 가진 이들도 얼마 없고 남용하는 새끼들이 있었단 말이지….”
그러면서 이를 까득 무는 것을 보니 과거에 그 사건 중 하나에 연루되었나 싶었다.
“그래서 만든 제도야. 마을을 하나 관리하려면 시험은 필수지. 대장님마다 다르지만, 3대장님은 무력을 많이 보시고.”
과연 네가 이 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까 싶은 얼굴로 보는 그 얼굴이 왜 그렇게 얄미워 보일까.
“그래서 쟁을 빼고 우리는 이렇게 불러. 화투(花鬪) 마을 또한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꽃 중 하나니까.”
“화투….어떤 시험인가요?”
“그건.”
그 입술에 량이도 카인도 집중하는 것을 보니 끝내 말을 해 주지 않았던 것 같다,
“비밀..! 가자!”
그리고는 잽싸게 등을 돌려서 걸어가는 카란님이었다.
‘진짜 뒤통수를 한 번만..!’
마을의 대소사를 관리하는 촌장이 아니었다면 진짜로 대가리를 한 대 치고 싶었다.
*
“자! 여기서부터는 시험을 보는 사람만 갈 수 있어,”
애초에 여기까지 오는 것이 시험일까 싶을 정도의 험한 길이었다. 량은 이미 카란님의 품에 강제로 안겨 있었다.
마을을 나와 순식간에 평지를 달리자 기암(奇巖 : 기괴하게 생긴 암석)들이 눈앞을 가득 메운 협곡이 나타났다.
오르고 내리고 동굴을 지나기를 몇 번. 거대한 동굴을 앞에 두고 카라님이 멈추어 섰다.
“아마 가다 보면 알게 될 거야. 직선으로 이어진 동굴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흠 엄청 쓸만한 장소인데. 이 협곡. 좋은데?”
카란님의 품에서(내리려고 나름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포기한 것 같았다.) 중얼거리는 량이
“어머? 그런 생각은 좋은데, 우리 량이가 설마 이걸 다 외웠을까아~?”
‘저 괴물이면 다 외웠을텐데….’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짓는 량이, 그리고 자신을 걱정스레 쳐다보는 카인.
“범아. 너무 갑자기 데리고 왔나? 다음에 올까?”
“안 돼! 이미 연락을 드렸다고, 지금 아니면 안 돼.”
단호한 카란님의 음성에 카인은 또 시무룩해지기 시작한다.
‘대체 카인은 왜 나만 관련되면 저렇게 어린아이가 되는 건지…. 진짜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카인. 괜찮아. 너무 걱정 하지 마. 죽기야 하겠어? 지금 들어가면 되는 건가요?”
“오? 꽤나 호기로운 꼬맹이구나!! 좋아 마음에 들었어! 살아 돌아오면 내가 특별히 누나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해 줄게! 가라!”
그러면서 등을 팡팡 때리는데, 손이 매우 찰졌다. 참 활기찬 촌장이라고 생각하며 동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들어가자 금세 어둠이 찾아왔다. 하나의 길이라 헤매지 않았다. 그리고 곧.
“와…. 멋있다.”
아래서부터 솟아오른 기둥, 위에서 내려오는 기둥, 그리고 서로 만나 하나의 기둥이 된 기둥.
반짝이는 그 유려함이 동굴 안에 있는 반딧불이들의 빛에 반사되어 별세계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황홀한 그 풍경을 보면서 걷자 어느새 빛이 저 멀리서 비추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응? 시험이 있다고 했는데.’
의아함을 느끼며 빛이 비치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금방 도착해서 그 밖을 바라보는 순간.
“우와..”
절경. 그것이 눈앞으로 펼쳐져 있었다. 기암이 협곡을 이루고 산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 깊게 만(灣 :해안의 단순한 굴곡 이상으로 바다가 육지쪽으로 특징적으로 들어와 있는 형태의 지형) 이 들어서 있다.
그 만에는 여러 척의 중형함과 하나의 대형함이 자리하고 있고 작은 건물들이 해안에 지어져 있었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그 광경은 아름다웠고 신비했다. 한참을 그 광경에 눈을 빼앗겼다, 돌아왔다.
“마나를 사용하지 말고 절벽을 타고 내려와라?”
주변을 둘러보다가 발견한 벽 한 켜에 새겨져 있는 문구였다.
“여기를 타고 내려가라고?”
대형함이 장난감으로 보이는 높이의 높이였다. 기암으로 이루어져 그래도 손을 댈 곳은 있었지만, 미친 일이었다.
“하 진짜 카인이 왔으면 큰일 날 뻔 했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절벽을 달리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튀어나온 부분을 지지대 삼아 빠른 속도로 절벽을 타고 내려왔다.
“뭐 나쁘지 않은데?”
절벽을 타고 오르거나 내리는 훈련은 이미 용병단에서 수도 없이 진행했다.
“오히려 좀 더 재밌는데? 어디 한 번….”
그리고 반을 지났을 무렵 직선이 아닌 보이는 곳을 향해서 뛰고 뛰었다. 그러자 더 빠르게 내려올 수 있었다.
“오오오 재밌어!! 나중에 카인이나 데리고 와볼까?”
“하 어떤 미친놈인가 싶더니. 칼라 그 꼬맹이가 이번에는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구만. 크하하하하!”
“안녕하세요! 범이라고 합니다!!”
자신과 비슷한 기파, 아니 오히려 조금 더 강해 보이는 기세가 풍기는 중년인.
키는 자신의 어깨에 겨우 다다르지만, 그를 보면 누구도 그를 작다고 여기지 못하는 인상과 단단함이 보인다.
“호오? 눈치도 빠르고. 하긴 이 정도면 알만도 하지. 3대장 퍼그다. 시험관이기도 하지.”
‘역시. 확실히 다르네.’
“따라와라.”
위에서 봤을 때는 그렇게 크지 않아 보였는데, 막상 지면에서 보니 생각보다 거대했다.
하나의 대형선과 9선의 중형선이 만(만)에 모여있고, 수십 채의 건물들이 있었다.
모든 이들이 자신을 집중하는 느낌이 마치 불스 용병단에 처음 들어갔을 때의 느낌이었다.
“이번 시험자는 애송이야?”
“대장! 대장이 너무 쳐지는데?”
“너 그러다가 작은 어머니한테 죽는다?”
“오오~ 구경거리다!!”
‘용병단보다 더 자유분방한 느낌인데? 전투에서는 어떨지 상상이 안 가네.’
규율, 질서는 내다 버린 느낌이 나는 이들이 자신의 옆과 뒤를 채운다.
퍼그님을 따라가 보니, 만 한 가운데에 떠 있는 거대한 목판이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