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카인과의 사건이 있은 지 어느새 2달 하고도 반이 지나왔다. 저녁에는 도축을 배우고 늦은 밤까지 카인과 공부를 하는 일상이 반복 되던 하루였다.
10살 치고 꽤나 컸던 범은 겉으로 보기에 아무것도 변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내부에서부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육체의 이해]에 나온 기초운동법과 프렌들리 서킷, 그리고 사제님의 치유
이 세 가지의 시너지는 상상 이상이었다.
어린 나이부터 시작한 단련이 엄청난 득이 되었다. 근육과 인대 그리고 뼈의 질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를 수업을 따라가는 것에서부터 한껏 느끼고 있었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 날이 갈수록 새롭게 발전)이라고 했던가.
수업을 진행하는 하루하루마다 자신이 변화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2달 반이 지난 지금 스트레칭과 러닝 그리고 기초 훈련을 마친 이후에도 수업이 한 시간이 남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를 본 도미토르 님은 수업을 잠시 중단하고 아이들을 전부 불러 모았다.
“이번 학년 최초로, 그리고 내가 가르쳐 본 모든 아이 중에서 최단기간 기초체력 훈련을 통과한 학생이 나타났다. 이제부터 범은 자신의 무기를 수련할 수 있게 되었다. 모두 박수!”
하지만 박수 소리는 미미했다. 종합 1, 2반 아이들에게 범은 타도의 대상이었다.
언제나 범을 두고 자신들을 비교하는 도미토르 님이였기에, 범이 곱게 보이지 않는 아이들이었다.
“귀족의 자제라는 아이들이! 이런 아량도 없단 말이냐! 쯧. 되었다. 가서 각자 운동이나 마저 하도록”
도미토르는 언제나 범을 자극제로 사용하였다.
이는 실로 탁월한 효과가 있었는데, 아이들에게도 독기가 생기는 것이 눈으로 보였다.
‘범을 자극제로 사용한 게 이렇게 효과가 좋을 줄이야… 독한 놈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라니우스 님께서 이번에는 제자가 생길지도 모르겠군…’
범의 지난 2개월 넘는 시간을 돌아본 도미토르는 범이 될 놈이다 싶었다.
사제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고 난 후로는 매번 자신을 극한으로 이끌었던 범이었다.
언제나 기절을 할 정도로 운동을 하는 그 자세가 지금의 범을 만들었다.
*
연무장에서 다른 아이들이 훈련을 하는 시각,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신의 도를 잡았다.
2개월 넘게 잡아보지 못한 도를 잡자, 애틋함과 설렘이 동시에 들었다.
도를 패용하고 자세를 잡는 순간, 자신의 변화가 느껴졌다.
‘도미토르 선생님… 대단하다…’
3개월 전보다 힘을 뺀 상태임에도 다리는 단단했고 허리는 곧았다. 어깨에 힘을 빼는 것이 자유로웠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도를 빼 들어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쉭!”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도를 내려친 자신이 놀랐다.
다시 한번
“쉭!”
도가 내는 청명한 소리에 너무 즐거웠다. 모든 방위를 옮겨가며 도를 베고 또 베었다.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리자 아이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모두가 무사반인 만큼 그 소리가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소리를 자신들이 아닌 고아가 낸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고아에서부터 오는 선입견이 그들의 눈과 귀에서 보고 들리는 모습이 현실이 아닌 것 같은 괴리감을 더해 갔다.
그중에서 로사의 눈빛에는 당황이 담겨있었다.
‘나도…. 나도 아직 저런 소리는 못 내는데 어떻…게…’
그리고 로안의 눈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고아….따위가 감히…’
모두가 놀랐지만 각기 다른 시선으로 범을 멍하니 바라본 지 몇 분이나 지났을까.
“지금! 누가 구경하라고 했나! 아직 기초 중 기초도 못 뗀 것들이 어디에 한눈을 파는 것이냐!”
도미토르 선생님의 호통에 그제야 현실로 돌아와 자신들의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아…. 완전 개운하다!’
처음이었다. 오후 수업을 기절하지 않고 끝낸 것이. 도를 마음껏 휘두르며 끝낸 수업은 너무나 개운했다.
‘로사보다…. 내가 먼저!’
내심 로사를 이긴 것이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연무장을 정리하고 나오는 범의 옆구리에는 도가 패용되어 있었다. 걸음마는 떼었다는 징표였다. 그리고 1학년 중에서는 오롯이 범의 옆구리에만 도가 패용되어 있엇다.
학년 전체에 소문이 금방 퍼졌다. 최초로 무기를 패용하게 된 학생. 심지어 학생이 찬란한 재능이 아닌 고아에 기본 재능의 학생이라는 것.
여러모로 들끓은 소문이었지만, 1학년은 개별로 나뉜 곳에 있기에 범에게는 아직 모르는 일이었다.
*
카인에게 자랑과 함께 의욕을 불어넣어 주고 도축을 마친 뒤, 기분 좋게 잠든 다음 날.
개운하게 일어난 범은 언제나처럼 라니우스 님의 오두막으로 향했다.
다만 도를 패용하고 있다는 것이 달랐을 따름이다.
“라니우스 님!”
오두막에 도착하자 당당하게 라니우스를 부르는 범이었다.
“꼬맹이. 축하한다. 학년 최초라고 들었다.”
“감사합니다! 저 두 번째 조건은 이미 충족한 거 같아요!”
“꼬맹이. 함부로 장담하지 말거라. 지금에야 체력훈련이니 네가 앞선다지만, 앞으로 그럴 수 있을지 모르는 거다.”
“네…”
“그래도 잘했다!. 꼬맹이 무기를 들게 되는 것도 하나의 시험인 걸 알고 있지?”
“네!”
“이제 수련회만 잘 다녀오면 정식으로 아카데미 학생이 되는 것이다. 이리 와 봐라.”
그 부름에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청동 브로치를 코트에 달아주는 라니우스 님이였다.
“본래 오후 수업을 담당하는 선생님의 역할이지만, 내가 해준다고 했다. 그 브로치에 네 이름이 새겨지는 날을 기대하마. 수고했다.”
그대로 굳어버렸다.
‘라니우스 님께서 직접…달아주시다니…’
수고했다라는 말. 정말 아무것도 아닌 그 네 글자가 너무 무겁게 다가왔다,
매일매일 기절할 듯이 수련하던 날이 스쳐지나가면서, 범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감…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잘 하겠습니다!”
“오냐. 우선 밥이나 먹자꾸나.”
눈물을 흘리는 자신을 두고 먼저 오두막으로 들어가는 라니우스 님였다.
‘진짜… 이 생은… 좋은 사람을 엄청 많이 만나는구나… 할 수 있어…!’
자신의 눈물을 훔치고 환하게 미소를 띤 그런 라니우스 님을 따라 들어갔다.
아침을 먹고 라니우스 님과 함께공터로 다시 나왔다.
라니우스 님이 들고나온 도는 평소에 들고나온 도와는 다른 도였다.
은은하게 붉은빛이 감도는 도는 요사스러웠다.
“오늘은 서킷을 하기에 앞서서 너에게 도법을 알려주겠다. 앞으로는 오후 수업에서 오늘 배운 도를 수련하면 될 것이다.”
‘도법…?’
벌써부터 제자로 취급되어지는 그 느낌이 너무 좋았다.
‘나도… 정식으로 도법이라는 걸 배워보는 건가.’
제대로 된 방법을 배우지 못한 채, 그저 실전을 통해서 칼을 휘둘렀다.
자신의 재능이 알려주는 데로 베어내고 베어냈을 뿐 무엇인가를 배워본 적은 없었다.
그랬기에 더욱 기대되었다.
“그동안 네가 배운 것이 도를 다루는 법이었다면, 지금 배우는 것은 그 도를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이어가는 법이다. 처음은 천천히 보여줄 테니 잘 보거라.”
요사스러운 도가 라니우스의 손에 잡히자, 라니우스 님은 도 그 자체가 되어있었다.
보기만 해도 베어질 것만 같은 느낌에 서 있다가 보니 어느새 시연이 끝났다.
자신이 베어졌다고 느꼈을 뿐, 시연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잘 보았느냐?”
“저… 하나도 못 봤어요…”
“뭐? 하나도??”
“네… 라니우스 님께서 그 자체로 도로 보이고 그냥… 제가 베어진 줄 알았어요… 그리고 어느새 끝나서…”
“허…감이 좋다고 해야 하는 거지… 네 도를 줘 보거라.”
자신의 도를 들고 시연을 하는 라니우스 님을 보며, 그제야 시연이 눈에 들어왔다.
도를 빼는 동작에서부터 다시 넣기까지, 각 방위를 네 번씩 베어들고 가는 데 있어서 너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마치 하나의 동작처럼.
“와….”
‘그냥… 기본 같은데… 뭐가… 뭐가 다른 거지? 아예 다른 것 같아 보이는 건 왜지…’
“이번에는 제대로 보았느냐?”
“네!…너무… 너무 자연스러웠어요!”
“자. 네가 해 보거라.”
자신의 도를 들고 라니우스 님을 따라 했다. 이어서 하려고 하니 영 어색하고 힘들었다.
“다시!”
“다시!”
“다시!!”
도를 빼 드는 동작부터 어색하면 어김없이 호통이 날아왔다.
오늘 서킷 훈련은 공쳤다고 생각하며 투덜거렸지만, 입가에는 왠지 모를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그리고. 수업이 시작하기 30분 전이 되어서야 한 번을 성공할 수 있었다.
“당분간 오후 수련에서는 발도와 베기를 1000번씩 수련하도록. 기본 도법이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따로 수련하도록 하거라. 그리고 도미토르가 책을 주었다지? 열심히 익히고 언제나 도미토르에게 물으면서 수련하도록 하거라. 사색이 담긴 수련은 그냥 반복하는 수련과는 질이 다르니.”
수련의 방향에 대해서 세세하게 가르쳐주는 라니우스 님을 보면서 전생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생소함이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라니우스 님.”
“그리고 명심하거라. 한 번을 정확하게 하는 것이 무의미한 100번보다 낫다는 것을.”
“넵!”
“어서 수업에 가라. 그러다 너 늦는다?”
“빨리 가 보겠습니다!”
늦지 않기 위해서 달려가는 범을 보면서, 범에게 보여주지 않던 미소를 띠는 라니우스였다.
범이 도로에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서야 돌아서는 라니우스.
“꼬맹이 체력이 워낙 바닥이니… 약재 좀 구해 와야겠군…”
흥얼거리며 들어가는 라니우스의 모습은 마치… 제자를 맞이한 팔불출의 스승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
‘아직도… 멀었구나… 1000번은 무슨… 500번도 멀었네…’
오후의 수련을 돌아보면서 발걸음을 옮기고 있자 금세 눈에 들어오는 간판이 보였다.
이제는 너무 익숙하게 문을 열고 지하실로 내려갔다.
“티에르 님! 저 왔어요!”
도축을 기다리는 고기들이 걸려있는 고리들도 이제는 친숙한 광경.
“꼬맹이. 매번 용케도 안 늦고 오는구나.”
‘티에르 님 얼굴마저 이제는 동네 아저씨로 보일 정도면… 말 다 했지.’
“그럼요! 마음 같아서는 더 있고 싶은걸요?”
‘도축이… 재능을 깨우는데 이렇게 도움이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했지.’
“자. 오늘 분량이다. 깔끔하게 해치우고.”
“어…? 오늘은 분량이 조금 적은데요?”
“뭐… 너가 지나치게 빠르긴 하지만… 너 정도면 소분(小分: 작게 나눔)을 배울 때도 됐지.”
“그럼…!”
“우선 네 할 일부터 끝내고다! 만일 엉성한 게 있으면 꿈도 꾸지 말아!”
“넵!”
‘소분이라니…! 드디어!!’
도축하면서 재능을 일깨우려 노력할수록 느끼게 되는 점이 있었다.
‘다양한 칼질이 중요한 거. 깊이 있게 하나만 하면 너무 오래 걸려…’
자신의 재능인 [절(切)]은 정말 깨어나게 하려면 힘든 재능이었다. 이미 개화시킨 경험이 있는데도 쉽게 깨어나지 않았다.
‘하긴… 이 정도나 되니까… 그동안 기본 재능이 개무시를 당한 거지… 누가 이걸 깨우겠냐고…’
자신도 전생(前生)의 직업이 용병이고 재능이 베어내는 것이었기에 그나마 깨어난 것일 뿐이었다.
‘그래도… 소분을 배우면 조금은 빨라지겠지… 지금도 조금 느낌은 오는데 말이야…’
자신의 재능은 안달이 나게 하는 특이한 재주가 확실한 것 같았다. 잡힐 듯 말 듯한 것이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배정된 방으로 들어가자 자신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양의 모습들이 보였다.
망설임 없이 고리를 끌고 와서 도축 칼을 꺼내 들었다.
‘한 번을 정확하게 하는 것이 무의미한 100번보다 낫다는 것. 정말 라니우스 님의 가르침은…’
자신의 안에 분명히 있는 재능을 느끼려 집중하며 도축 칼을 들었다.
‘자르고 베는 것. 그게 내 재능이야. 분명히 한 자락은 잡았어.’
마나와는 다른, 본질적인 감각이 느껴진다.
‘확실히 깨어나지는 않았어도 시작은 됐다.’
감각이 올라오자 도축 칼을 들고 양을 도축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뭔가를 베고 자르는데 기본 재능이 기본적으로 도와준단 말이지.’
그렇기에 티에르 님께서 타고난 도축자라며 감탄하시는 것이다.
‘거기에 재능을 느끼고 자르면 확연하게 차이가 난단 말이지.’
더 깔끔하고 매끄럽게 잘려져 나가는 것이, 손맛에서부터 달랐다.
감각에 집중하며 도축을 하다 보니 어느새 자신에게 할당된 양을 다 마쳤다.
“흠… 역시… 넌 타고나기를… 쯧. 자. 소분을 보여주마.”
자신이 한 것을 모두 하나하나 꼼꼼히 확인한 티에르 님은 그중 하나를 들더니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소분이 쉬울 것 같지만, 오히려 더 섬세하기에 어렵다.”
말을 이으며 소분하는 티에르 님의 도축은 언제 보아도 간결하다.
“자! 해 봐라.”
테이블에 올려진 양고기를 바라보며 감각을 다시 일깨운다.
‘이게… 의외로 쉽지 않은데?’
확실히 섬세함이 필요한 작업이라 그런지 쉽지 않았다.
“처음치곤 나쁘지 않군. 계속 그렇게 하면 된다.”
티에르 님의 말을 들으며 세 번 째 양고기에 칼을 대는 순간이었다.
감각이 확장된다. 온몸이 자르는 행동 하나에 맞추어진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허리가 곧추세워진다.
필요없는 힘은 저절로 몸에서 빠져나간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어떻게 베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깨어났다!’
길고 긴 잠을 자고 있던 재능이 개화(開花)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