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진급이 걸린 2차 시험 (4)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칼라일의 숨통을 끊은 걸 지적당하자, 교관이 다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입막음이라도 했다는 소리냐?!”
“많고 많은 포로들 중에서 굳이 저 남자를 골라서 데려온 것도 교관님이셨죠.”
아카데미에서 준비한 마교도는 스무 명 정도였다.
현재 학생들의 수준을 생각하면 매우 여유로운 숫자였다.
“왜 그 남자를 제 상대로 선택하셨습니까?”
“그, 그건…….”
“딱히 순서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냥 우연이다!”
교관이 어떻게든 변명하려 했다.
“대체 너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것이냐! 내가 일부러 그래듀에이트 중급을 데려와서 네 상대로 내보냈다는 얘기냐? 어찌 그런……!”
“교관님, 저한테 반박하실 일이 아닙니다.”
나는 차갑게 대꾸했다.
“교수님들 앞에서 직접 해명하시죠.”
“……!”
이미 많은 교수가 교관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상급 이상의 그래듀에이트다.
그런 사람들한테서 저런 시선을 받으면, 그래듀에이트 하급에 불과한 교관은 그냥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자네, 이번 일에 얼마나 관여했지?”
“교, 교수님, 저는 결백합니다!”
발렌티아노 교수가 다그치자 교관이 뒷걸음쳤다.
“제가 저 마교도를 아카데미로 데려왔겠습니까? 제 권한으로는 그런 짓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럼 자네 말고도 관여한 사람이 있다는 얘기군.”
“……!”
“마교도는 이미 죽어 버렸으니 어쩔 수 없지만, 자네를 심문하면 뭔가 알 수 있겠지.”
교관이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리히테나워 검술 아카데미의 심문이 결코 온건하지 않다는 걸 아는 것이다.
“으윽……!”
그는 본능적인 두려움에 휩싸인 채 이 자리에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멈추시죠.”
“크흑!”
내가 휘두른 목검이 교관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갈비뼈가 부러지는 감촉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잘했다, 에르나스.”
“멋대로 움직여서 죄송합니다.”
“자네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으니, 당연히 자네가 해야 할 일이지.”
발렌티아노가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내 행동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총장님, 이번 일은 제가 한번 조사해 보겠습니다.”
“발렌티아노 교수, 맡겨도 되겠나?”
“제가 먼저 말을 꺼냈으니, 마무리하겠습니다.”
알드바우트에게 그렇게 말한 뒤, 발렌티아노가 다시 나를 쳐다봤다.
“에르나스, 자네도 협조를 해 줬으면 하는데 괜찮겠나?”
“알겠습니다.”
왜 내가 표적이 되었는지도 밝혀야 하니, 나를 상대로 조사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발렌티아노는 이번 기회에 나하고 인연을 맺으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학생들을 살펴봤다.
각양각색의 표정을 짓고 있는 학생들 중에서, 유독 티 나는 표정을 짓고 있는 녀석이 있었다.
‘고르트 녀석, 속마음을 감추지 못하는군.’
발트펠트 가문의 후계자, 고르트 발트펠트.
그는 명백히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번 일의 배후에 있는 것이 발트펠트 가문이기 때문이다.
‘테오도라 발트벨트가 움직이기 시작한 거지.’
테오도라는 고르트의 숙모다.
고르트의 검술 스승이기도 하며, 지금도 아카데미 바깥에서 고르트를 지원해 주고 있다.
그동안 고르트의 행보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더 이상 고르트에게 맡겨 둘 수 없다는 생각에 직접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비무전 본선에서 내가 우승하는 걸 보고 조급해졌을 거야.’
더 이상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의 독주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
그런 생각에 빠진 테오도라가 2차 시험에 개입했다.
‘물론, 테오도라도 여기서 나를 죽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나를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부상만 입혀도 괜찮다.
2차 시험에서 탈락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내 발목을 잡을 수 있다.
그런 생각으로 이번 일을 꾸민 것이다.
‘모조리 실패했지만 말이야.’
나는 아무런 부상도 입지 않았다.
2차 시험을 문제없이 통과했으며, 이번 시험에 음모가 있었다는 것도 밝혀냈다.
이제 조사가 시작되면 발트펠트 가문과의 연결 고리가 드러날 것이다.
‘물론, 테오도라는 중간에 꼬리 자르기를 해서 책임에서 벗어나겠지.’
그래도 타격은 피할 수 없다.
아카데미 곳곳에 심어 놓은 하수인들을 잃으면 앞으로 고르트를 지원해 주기도 어려워진다.
이걸 만회하기 위해 테오도라는 다른 수단을 취하려고 하겠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의 목을 스스로 조이는 꼴이 될 것이다.
‘어쨌든, 6대 검술명가 사이의 싸움이 점점 격화될 조짐이 보이는군.’
학생들끼리 공식 시합에서 싸우는 거야 그냥 가벼운 스포츠 같은 것이다.
여러 가문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면 더욱 살벌한 싸움이 벌어진다.
헨리 랭커스터가 나한테 암살자를 보내면서 첫 포문을 열었고, 이어서 테오도라 발트펠트가 2차 시험에 자객을 심어 놨다.
앞으로 이런 일이 더 많이 일어날 것이다.
그것들을 격퇴하면서, 내 손으로 다른 가문들을 무너뜨릴 수 있도록 힘을 길러야 한다.
‘그걸 위해 진급도 하는 거고.’
다른 교관의 안내를 받아 이동하면서, 나는 흑색 6반 학생들 쪽을 살펴봤다.
안타깝게도 이별을 아쉬워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복잡한 감정이 담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금방 다시 만날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러지 못하겠지.’
대부분은 소설 속에 이름도 언급되지 못했던 엑스트라다.
하지만 몇 달 동안 함께하면서 정이 들어 버렸다.
‘언젠가, 다시 만나자.’
나는 작게 손을 들어 작별 인사를 했다.
그들이 어떤 재능을 갖고 있든… 최선을 다해 좋은 성과를 거두길 바랄 뿐이었다.
* * *
조사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이게 테오도라 발트펠트의 사주라는 걸 알고 있지만, 해 줄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었다.
현시점에서 에르나스가 알 수 없는 정보를 입에 담으면 의심당할 수밖에 없으니까.
“조사에 협력해 줘서 고맙군, 에르나스.”
조사가 다 끝난 뒤, 나는 발렌티아노와 독대하게 되었다.
“뒷일은 우리들에게 맡기고, 자네는 수련생이 될 준비를 하게.”
“네, 감사합니다.”
2차 시험을 통과하여 진급한 신입생은 ‘수련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본격적으로 그래듀에이트로서 수련을 받게 된 학생이라는 의미다.
“에르나스, 사실 나는 자네와 이렇게 얘기를 나누고 싶었네.”
“그러셨습니까?”
“지난번 비무전에서의 활약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지.”
“…….”
발렌티아노라면 내가 하인리히와의 싸움에서 그래듀에이트 초입을 넘어선 실력이라는 걸 꿰뚫어 봤을 것이다.
“에르나스, 혹시 자네한테 따로 검술 스승이 있나?”
“그렇게 부를 만한 분은 없습니다. 아카데미에서 배운 검술을 제 나름대로 어레인지해서 쓰고 있을 뿐입니다.”
“흐음…….”
발렌티아노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쳐다봤다.
“그러면 그 전투 스타일은 자네가 스스로 만들어 낸 거라는 얘기인데… 정말 놀랍군.”
“아직 방향성을 잡지 못해서, 우왕좌왕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니, 그렇게 말할 건 아니지. 상당히 대단한 것이니까.”
그렇게 말하며 발렌티아노가 내 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어쨌든, 아직 방향성을 모색하는 단계라면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군.”
“무슨 말씀이신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발렌티아노 클래스에 들어오게.”
그 말을 듣고, 나는 살짝 놀랐다.
발렌티아노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 아칸델에게도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교수님, 그 말씀은…….”
“물론, 지금은 수련생 신분이니 특정 클래스에 소속되는 건 불가능하지.”
2차 시험을 끝낸 수련생은 다양한 클래스를 경험하며 ‘수련’을 받게 된다.
그리고 나중에 3차 시험을 통과하면 수련생 시절에 경험했던 클래스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 특정 클래스 전속이 된다.
현실 세계에 비유하자면, 대학교에서 여러 과목을 경험하면서 전공 탐색을 하다가 때가 되면 적성에 맞는 전공을 선택하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3차 시험을 통과했을 때 발렌티아노 클래스를 지원해 준다고 약속해 준다면 미리 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네.”
“…….”
“그리고 수련생 생활을 원활히 진행할 수 있도록 클래스 차원에서 최대한 도와주는 것도 가능하지.”
이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우대였다.
이제 막 2차 시험을 통과한 수련생한테 이런 제안을 하다니, 소설 속 설정을 생각할 때 이례적인 일이었다.
“교수님, 설마…….”
“아, 오해하지 말게.”
발렌티아노가 미소를 지었다.
“나는 자네가 딱히 발렌티아노 교실을 이어받아 주기를 원하는 건 아니니까.”
“네…….”
“자네는 6대 검술명가 중 하나인 란즈슈타인 가문의 후계자지. 졸업한 이후에도 해야 할 일이 많을 테니, 아카데미에 남아 달라고 부탁할 생각은 없네.”
발렌티아노는 그렇게 해명했지만, 여전히 마음은 편치 않았다.
발렌티아노에게서 대학원생을 낚으려 하는 대학 교수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말은 이렇게 해 놓고, 나중에 가서 클래스에 남으라고 붙잡는 건 아니겠지?’
아카데미의 클래스는 대학원 연구실 같은 느낌도 있다.
아카데미를 졸업한 이후에도, 교수가 되는 것을 목표로 클래스에 남는 것이 가능하다.
발렌티아노도 나이가 꽤 많은 편이고, 자신의 클래스를 이어받을 후계자를 물색해야 하는데… 나를 점찍은 건 아닐까.
“교수님, 죄송하지만…….”
“당연한 얘기지만, 지금 당장 대답해 주지 않아도 되네.”
발렌티아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도 여러 클래스를 경험해 보고 결론을 내리고 싶겠지.”
“…….”
“하지만 명심해 두게. 발렌티아노 클래스는 아카데미 최고의 클래스고, 발렌티아노 클래스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는 것이 아카데미의 정점에 오르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것을.”
열성적인 발렌티아노의 설득에,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여기서 꼬드김에 넘어가면 후회할 것 같단 말이지…….’
교관의 안내를 받으며, 나는 수련생 기숙사로 이동했다.
수련생 기숙사는 흑색 6반의 기숙사보다 훨씬 작은 3층 건물이었다.
이제부터 나는 이곳에 머물면서 본격적으로 그래듀에이트를 대상으로 한 교육을 받게 될 것이다.
“2차 시험을 통과한 다른 학생들은 이미 방을 배정받은 상태다. 자네도 들어가도록.”
“알겠습니다.”
“흑색 6반 기숙사에 있던 짐은 이미 다 옮겨 놨다.”
교관에게서 방 열쇠를 받은 뒤, 기숙사로 들어갔다.
여학생의 방은 3층, 남학생의 방은 2층이다.
‘흑색 6반 기숙사에서는 1인실을 쓸 수 있었는데… 여기서는 어떻게 될까.’
2차 시험을 통과한 남학생이 홀수라면 1인실을 쓰게 될 가능성도 있지만, 짝수라면 예외 없이 2인실일 것이다.
‘지금은 방도 많이 남아 있는데 그냥 혼자서 쓰게 해 주면 좋을 텐데 말이야.’
누가 이렇게 정했을까.
…작가 놈이지, 누구겠어.
“열쇠에 적혀 있는 방 번호는… 208호실.”
하지만 소설에서 누가 몇 호실인지 묘사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소설 내용을 바탕으로 룸메이트를 예상하는 건 불가능했다.
“…….”
나는 208호실 앞에 서서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방 안에서 서늘한 공기가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늦었군. 어서 짐 정리나 해라.”
하인리히 아그리파.
방에 먼저 자리를 잡은 그가, 얼음 같은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