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 아카데미에 천재가 있었다-44화 (44/212)

44화 리히테나워 대공 (2)

슈미츠와의 시합은 내 승리로 끝났다.

슈미츠 나름대로 여러 기술을 펼치면서 나를 공격했지만, 결국 내 반격에 무릎을 꿇었다.

“슈미츠, 하인리히를 너무 의식하지 마라. 너는 하인리히가 아니니까.”

“네, 조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합이 끝난 뒤, 슈미츠는 나한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패배했는데도 불구하고 기분은 좋아 보였다.

나와의 승부에서 몇 가지 얻은 것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면 결승전이 끝난 다음에 보자.”

“건투를 빌겠습니다, 에르나스 님!”

슈미츠를 보낸 뒤, 나는 대기석에 돌아갔다.

그곳에는 준결승 제1시합에서 승리한 세리느가 대기하고 있었다.

“결국 결승전에서 싸우게 되었네요, 에르나스.”

“그러게.”

15분 뒤에 결승전을 실시한다는 안내 방송이 있었다.

대기석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바로 세리느와 결승전을 치를 것이다.

“생각해 보면 당신과 공식적인 자리에서 대결을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입학 직후에 대표 자리를 두고 싸웠던 건?”

“아, 그것도 포함해야 할까요?”

세리느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실 그때는 아무것도 모른 채 대결에 나서서…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얼굴이 화끈거리네요.”

“딱히 그럴 필요는 없을 텐데.”

“아니요. 그때 저는 에르나스의 진짜 실력을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까요.”

“…….”

그때까지만 해도 세리느는 내가 그냥 무능한 놈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세리느에게서 검술을 복사한 상태였고… 바스티안 기사검술과 로렐리안 실전검술을 조합하는 것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였죠.”

“세리느,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네?”

“너는 그동안 내가 보여 준 모습을 기준으로 판단했을 뿐이야.”

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나를 형편없는 놈이라 평가하고 있었다면, 그런 모습밖에 보여 주지 않은 내 책임이지.”

“에르나스…….”

“그러니 세리느 바스티안의 책임이 아니야.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의 책임인 것이지.”

그렇다.

세리느는 에르나스의 인성이 어떤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나한테 미안한 마음을 갖지 마라, 세리느.”

“따, 딱히 미안하다고 생각한 건…….”

“그럼 됐고.”

나는 피식 웃었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결승전을 대비해서 마음의 준비나 해라. 그런 마음으로 시합에 나섰다간 이번에도 패배할걸?”

“윽…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세리느가 살짝 삐진 표정을 지었다.

“다른 건 다 좋은 방향으로 변했는데, 저를 대하는 태도만큼은 예전과는 달리 쌀쌀맞아진 것 같네요.”

“…그건 미안하군.”

소설 속의 에르나스는 세리느한테 좀 느끼한 태도를 취했다.

그걸 재현하는 건…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상냥하게 대해 주는 걸 원하나?”

“돼, 됐어요. 이제 와서 무슨.”

세리느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에르나스가 상냥하게 대해 주면, 저도 상냥하게 대해 줘야 하는 게 예의니… 사양하고 싶네요.”

“무슨 소리야, 그게.”

“그런 게 있어요.”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예전에 느꼈던 감각이 되살아나는 걸 느꼈다.

소설을 쓸 때, 쌀쌀맞던 세리느가 조금씩 마음을 열어 가는 장면을 묘사할 때의 기분이 되살아난 것이다.

‘에르나스를 상대로 세리느가 이런 태도를 보여 주다니… 이런 장면은 상상도 못 했는데.’

담당 편집자가 요구했던 ‘에르나스를 주인공으로 한 외전’을 내 손으로 직접 집필했다면, 스스로 이런 장면을 써야만 했을까.

상당히 묘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기분은 나쁘지 않아.’

처음에 나는 세리느가 방해가 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거리를 두려 했지만, 세리느와의 관계가 많이 양호해졌으니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이다.

‘이대로 계속 나아가면 되겠지.’

지금 나는 ‘에르나스를 주인공으로 한 외전’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고 있다.

계속 이대로 나아간다면, 담당자의 요구대로 에르나스가 ‘6대 검술명가를 제압하고 아카데미를 장악하는’ 스토리를 실현할 수 있지 않을까.

‘넘어야 하는 산이 많지만 말이야.’

일단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은 이 비무전 결승전을 마무리하는 것만 생각하자.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는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이제 곧, 세리느와의 결승전이 시작될 것이다.

* * *

“윽……!”

하인리히는 신음하면서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이 의무실 침대에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금방 생각났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을 꺾기 위해 아그리파 절검술의 ‘더 크럭스’를 사용했다가… 자멸했던 것을.

“크윽……!”

입술을 깨물었다.

더 크럭스를 사용했는데도 불구하고 에르나스를 쓰러뜨리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과도한 힘을 쓴 후유증으로 시합장에서 정신을 잃는 추태까지 보였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패배… 그것도 추잡한 패배였다.

“아그리파 가문의 후계자인 내가, 어렸을 때부터 신동이라 불려 온 내가… 이렇게 패배하다니!”

주체할 수 없는 분통함에 몸을 떨고 있을 때.

의무실 문 쪽에서 냉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패배에 익숙하지 못한 모양이군, 하인리히 아그리파.”

“……!”

얼굴에 흉터가 있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

황제에게 ‘도룡검’의 칭호를 받은 교수, 욜스 칼레시우스였다.

“제가 패배하는 모습을 보고 계셨습니까.”

“아니, 다른 업무가 있어서 8강전과 준결승전은 관전을 못 했다.”

그렇게 말하며 욜스가 다가왔다.

“지금 결승전만 보고 오는 길이다.”

“결승전…….”

결과가 궁금했다.

하지만 듣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에르나스와 세리느가 맞붙었고, 에르나스가 승리하여 우승자가 되었다.”

“……!”

에르나스가 우승했다.

그 사실을 안 순간, 다시금 현기증이 느껴졌다.

“사생결단을 하듯이 격렬한 싸움은 아니었다. 하지만 서로를 존중하면서 성실한 태도로 실력을 겨루는… 박수를 보내고 싶어지는 대결이었다.”

“…….”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 정도로 모범적인 시합이었다.”

욜스가 시합 내용을 평가했지만,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참을 수 없는 분통함에 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그 자리에 본인이 있었어야 했다고 생각하고 있군.”

“……!”

하인리히는 정곡을 찔렸다.

모욕감을 느끼고 욜스를 노려봤지만, 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에르나스를 이겼다면, 네가 우승자로서 많은 관객들에게 박수를 받았겠지.”

“…….”

“어째서 네가 에르나스를 이기지 못했을까, 하인리히.”

그 질문에 하인리히는 주먹을 꽉 쥐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지만, 그중 하나도 입에 담고 싶지 않았다.

“아마 네가 생각한 모든 것이 이유일 거다.”

“……!”

“하인리히, 인정해라. 너는 여러 측면에서 에르나스에 비해 열등했다.”

열등.

그동안 살면서 남한테 들어 본 적이 없는 단어다.

“실력도, 전략도, 다른 것도… 에르나스가 우월했겠지.”

“직접 보지도 않으셨다면서, 어떻게 그런…….”

“그렇다면 에르나스보다 네가 더 우월했는데 운 나쁘게 졌다고 생각하나?”

“…….”

“운명의 장난이라고 생각하고 잊어버리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욜스가 하인리히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면 절호의 성장 기회를 놓치게 된다.”

“절호의 성장 기회……?”

“원래 인간은 패배를 극복하려 할 때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법이다.”

“…….”

“하인리히, 너는 신동이라 불릴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항상 선두에 서 있으리라는 법은 없다.”

욜스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에르나스가 앞서가고 있다면, 에르나스를 추월하기 위해 절치부심 노력해라. 큰 동기부여가 될 거다.”

“큰 동기부여…….”

“하인리히, 네가 달려 나갈 길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목표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활용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활용하도록 해라.”

“이 패배를… 활용하란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이 패배를 네 자산으로 삼아라.”

“…….”

하인리히는 입술을 깨물었다.

욜스의 말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 말을 따르기에는, 자존심의 상처가 너무 컸다.

“천천히 생각해 봐라, 하인리히.”

“네…….”

“혼자 힘으로 어려울 것 같으면, 진급한 뒤 욜스 클래스를 찾아라. 최대한 도움을 주도록 하마.”

“욜스 클래스……?”

“이번에 신설되는 클래스다.”

클래스는 절정급 이상의 교수면 개설할 수 있다.

하지만 절정급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개설할 수 있는 건 아니고, 아카데미에 일정 이상의 공헌을 한 뒤 교수 회의에서 승인을 받아야 가능하다.

“그러면 나는 이만 가보겠다. 너도 천천히 청색 2반으로 돌아가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교수님…….”

욜스는 하인리히를 내버려 둔 채 의무실을 나서려 했다.

하지만, 중간에 발을 멈췄다.

“하인리히.”

“네?”

“에르나스가 마지막 공격을 할 때, 순간적으로 푸른색 검기를 펼쳤다고 들었는데.”

욜스가 날카로운 눈으로 하인리히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게 사실인가?”

“맞습니다.”

하인리히는 기억을 되새기며 말했다.

“번개처럼 번쩍이는 검기였습니다. 천둥 같은 소리도 들렸습니다.”

“그렇군.”

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한 일이군. 입학한 지 1년도 안 된 학생이 나와 같은 발상에 도달했다니.”

“……?”

혼자서 중얼거린 뒤, 욜스는 바깥으로 나갔다.

무슨 뜻인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어쩌면 욜스는 이걸 확인하기 위해 하인리히를 찾아온 걸지도 모른다.

“후우…….”

하인리히는 다시금 침대에 누웠다.

여전히 굴욕감이 심했다.

하지만 욜스의 말대로 이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자신에게 첫 패배를 안겨 준 남자.

그 이름을 부르면서, 하인리히는 주먹을 꽉 쥐었다.

* * *

“빌어먹을!”

고르트는 인적이 없는 구석진 곳에서 욕설을 내뱉었다.

이번에 고르트는 루퍼스 상대로 패배했다.

지난번에 에르나스에게 패배한 것에 이어, 또다시 다른 검술명가의 후계자에게 패배한 것이다.

“그것도 궁내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젠장!”

듣자 하니 궁내부 사람들은 에르나스와 하인리히의 싸움까지 본 뒤 퇴장했다고 한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 두 사람을 확인하기 위해 찾아온 걸지도 모른다.

“황실 쪽에 내 실력을 어필할 기회였는데……!”

한편 에르나스는 신동이라 불리던 하인리히를 꺾고, 우승까지 차지했다.

현재 아카데미의 정점에 가장 가까운 건 에르나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르트는 그 사실에 분통이 터졌다.

“빌어먹을……!”

“목소리가 너무 크다, 고르트.”

그때,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압감이 느껴지는, 성숙한 여성의 목소리였다.

“감정 조절도 제대로 못 하나?”

“수, 숙모님……!”

여성의 평균 신장을 훨씬 뛰어넘은 장신(長身).

사자의 갈기를 연상케 하는 갈색 머리카락.

발트펠트 공작의 친동생으로, 발트펠트 가문의 2인자라 할 수 있는 테오도라 발트펠트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오, 오늘 관중석에 계셨습니까?”

테오도라는 고르트의 숙모이면서, 고르트에게 검술을 가르쳐 준 스승이기도 했다.

지금도 아카데미 바깥에서 고르트를 지원해 주는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에, 고르트 입장에서는 최대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상대였다.

“추태를 보였더군, 고르트.”

“……!”

테오도라의 목소리를 듣고, 고르트는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숙모님!”

“됐다. 너한테 사과를 받기 위해 이렇게 온 게 아니니까.”

테오도라는 매서운 눈으로 고르트를 노려봤다.

“고르트, 지금 상황을 보니 란즈슈타인 가문의 에르나스가 가장 앞서 나가고 있는 것 같더군. 맞나?”

“네… 맞습니다.”

주먹을 꽉 쥐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테오도라가 다시 질문했다.

“네가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으냐?”

“그건…….”

“정직하게 대답해라, 고르트.”

“윽…….”

고르트는 위압감을 느끼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지금 당장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 하지만, 머지않아 반드시 따라잡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네 호언장담만 믿고 있을 수는 없지.”

테오도라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녀석이 더더욱 앞서 나가서, 너와의 차이를 벌리면 어쩔 생각이냐.”

“그, 그렇게 되지 않도록 제가…….”

“그러니까, 네 호언장담만 믿고 있을 수는 없단 말이다.”

테오도라는 한심해하는 눈빛으로 고르트를 쳐다보고 있었다.

“따로 손을 쓰겠다.”

“네?”

“네 아버지가 나한테 너를 맡겼으니, 내가 손을 쓰는 수밖에 없지.”

그 순간, 테오도라의 눈빛이 잔혹하게 빛났다.

“리히테나워 대공의 자리가 걸렸다. 그놈이 더 이상 앞서 나가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아 줘야겠다.”

“……!”

에르나스의 발목을 잡는다.

그게 가능할까?

“걱정 마라, 고르트.”

숨을 삼키는 고르트 앞에서, 테오도라가 차갑게 웃었다.

“에르나스 그 녀석이 아무것도 눈치 못 채게, 은밀하고 확실하게 진행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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