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 아카데미에 천재가 있었다-43화 (43/212)

43화 리히테나워 대공 (1)

“에르나스 님, 누가 이길 것 같습니까?”

세리느와 루퍼스의 준결승 제1시합이 시작되었다.

나는 슈미츠와 함께 대기석에서 관전할 생각이었다.

“세리느가 이기겠지.”

“역시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루퍼스가 세리느와 비슷한 시기에 그래듀에이트가 되었다면 서로 좋은 승부가 되었겠지만 말이야.”

루퍼스도 세리느처럼 정석적인 동부 검술로 싸우는 스타일이다.

그래듀에이트로서 비슷한 수준이라면 꽤 볼 만한 시합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승전은…….”

슈미츠의 말이 중간에 끊겼다.

갑자기 대기석에 발을 들인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

기품 있는 정장을 걸친 사람들이었다.

아까 관중석 구석에 몰려 있던 귀빈들이다.

그들이 누구인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님, 잠시 괜찮으시겠습니까.”

콧수염을 기른 중년 신사가 나한테 고개를 숙였다.

“시합 개시 전까지, 잠시만 시간을 내주셨으면 합니다.”

“…….”

궁내부.

제국 황실을 보좌하는 부서가, 비무전 결승을 치르기도 전에 나를 찾아왔다.

* * *

“시합을 준비하고 계셨는데, 이렇게 번거롭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최대한 짧게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궁내부의 1급 사무관인 칼데아스가 고개를 숙였다.

지금 나는 별실에서 궁내부 사람들과 마주하고 있는 중이었다.

“사실 에르나스 님이 여유 있으실 때 찾아뵙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저희 일이…….”

“시간 여유가 없으시겠죠. 이해합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지금도 바로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칼데아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무슨 용건이십니까?”

“일단 이것부터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목소리를 낮추면서, 칼데아스가 나한테 물었다.

“세리느 바스티안 님과의 약혼을 파기하신 게 사실입니까?”

“그 질문을 하는 사람이 많군요.”

슬슬 질리기 시작했다.

“약혼은 정식으로 파기되었습니다. 문서에 서명도 마쳤습니다.”

“아, 그렇군요.”

“나중에 원상 복귀 할 생각도 없습니다. 현재 세리느 바스티안과는 단순한 학우일 뿐입니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뒤, 칼데아스가 다른 사람들과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곤 내 얼굴을 쳐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에르나스 님,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말해 보시죠.”

“이번 약혼 파기… 정치적 의도가 있으신 행위였습니까?”

그 질문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고 하셨으면서, 별로 그렇지 않은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직접적인 표현은 최대한 피하는 부서라서.”

“사적인 문제였습니다. 정치적인 고려는 없었습니다.”

“흐음… 알겠습니다.”

칼데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지금 에르나스 님이 누군가와 결혼할 예정이 없다는 건 확실한 것 같군요.”

“네, 그 부분에 대해서는 궁내부에서 신경 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

내 말을 듣고, 칼데아스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계시는 것 같군요.”

“아카데미에 들어오기 전, 아버지를 대신해서 꽤 많은 일을 처리했으니까요.”

“그렇군요.”

“아마 다른 검술명가의 후계자들 중에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아까 전에 하인리히와도 그 얘기를 했다.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황제 폐하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황녀 전하를 보좌할 ‘리히테나워 대공(大公)’을 선출하려 한다는 것을.”

내 말을 듣고, 칼데아스가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주위 궁내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는군요, 에르나스 님.”

“죄송합니다. 저는 궁내부 사람이 아니라.”

나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터놓고 얘기합시다, 칼데아스 님.”

“에르나스 님…….”

“사정을 다 아는 사람들끼리 말을 빙빙 돌려 가면서 얘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궁내부 여러분들도 시간 여유가 없으신 상황 아닙니까?”

“이것 참… 에르나스 님은 정말로 대담한 분이시군요.”

칼데아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몸을 앞으로 내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지금 황실에서는 리히테나워 대공의 부활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리히테나워 대공.

그것은 본래 ‘여자 황제의 남편’에게 주어졌던 작위다. 현실 세계의 영국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의 남편 필립에게 작위가 내려졌던 것과 비슷하다.

‘대공’이기 때문에 6대 검술명가의 가주보다 예법상의 지위가 높지만, 여러 가지 폐해가 있어 수백 년 전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아직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셨습니다.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아직 12세밖에 안 된 황녀 전하가 대를 이어야 하겠지요.”

“…정말로 거침없이 말씀하시는군요, 에르나스 님.”

이것이야말로, 현재 이 제국의 최고 기밀이다.

현시점에서는 황실을 보좌하는 궁내부와 6대 검술명가한테만 알려진 상태다.

만약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제국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칼데아스 님, 이 제국은 검술을 숭상하는 나라입니다. 역대 황제 폐하는 다들 일세를 풍미한 그래듀에이트였지요.”

“그렇지요…….”

“그런데 진검을 제대로 들어 본 적도 없는 12살의 황녀 전하가 갑자기 제위에 오른다면… 황권은 크게 흔들릴 것입니다.”

검술을 숭상해 온 천년 제국의 정통성까지 흔들리게 된다.

이건 분명히 심각한 사태였다.

“대책을 강구하던 황실에서는, 때마침 6대 검술명가의 후계자들이 아카데미에 입학할 시기라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

그렇다.

이런 이유가 있기 때문에, 이번 기수는 지금까지하고 다른 것이다.

“이번에 아카데미의 정점에 오른 인물에게 리히테나워 대공의 작위를 내려, 황녀 전하를 지키는 검으로 만든다… 이것이 황실에서 준비한 대책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카데미의 정점에 오른 사람은 자연스레 황녀 전하의 약혼자가 된다.

여자인 베리스리제에게는 그걸 대체할 만한 자리가 주어지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하면, 12살밖에 안 된 황녀 전하가 제위에 오르는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국내를 안정시킬 수 있습니다.”

황녀 본인의 무력은 보잘것없어도, 일심동체인 남편 될 사람이 힘을 갖고 있다면 괜찮다는 논리다.

“아카데미의 정점에 올라 실력을 증명했으니, 아무도 불만을 제기하지 못하겠죠. 이 제국은 그런 나라니까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에르나스 님…….”

6대 검술명가 중 하나를 골라서 황녀의 후견인으로 만들면, 다른 가문에서 들고일어난다.

하지만 아카데미에서 정점에 오른 실력자에게 리히테나워 대공의 자리를 주고 황녀를 보필하게 하면 아무도 불만을 제기할 수 없다.

검술을 숭상하는 제국의 전통에 정확히 들어맞는 일이니까.

‘그래서 검술명가의 가주들이 평소보다 더 전전긍긍하고 있는 거지.’

지금 칼레온 이그니아스가 랭커스터 가문을 지목하며 아카데미 바깥에서 난리 치고 있는 것도 이것 때문이다.

리히테나워 대공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중인데, 경쟁에서 탈락한 랭커스터 가문이 암살자를 보내 아예 판을 깨 버리려 했으니까.

“그러니 에르나스 님, 저희가 드리고 싶은 말은…….”

칼데아스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부디 행실에 문제가 없도록 해 주십시오.”

“…….”

“에르나스 님이 나중에 아카데미의 정점에 올라 리히테나워 대공의 자격이 생기셔도, 재학 도중의 행실에 문제가 있으면 황녀 전하의 짝으로서 문제가 생깁니다.”

무슨 말인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건… 여자 관계를 조심해 달라는 뜻이다.

‘에르나스는 아카데미 입학 전에 난봉꾼으로 이름이 높았으니까 말이야.’

한숨이 나오는 얘기였다.

얼마나 에르나스가 못 미더웠으면 이렇게 궁내부에서 직접 찾아와서 신신당부를 할까.

“에르나스 님, 가볍게 생각하지 말아 주십시오. 저희가 굳이 찾아와서 이렇게 진지하게 말씀을 드리는 것도, 현재 란즈슈타인 가문에서는…….”

“현재 란즈슈타인 가문은 저한테 행실에 주의하라는 소리를 할 수 없는 상황이죠. 그래서 굳이 궁내부에서 저한테 말을 거신 거고.”

“그, 그렇습니다.”

하지만, 나쁘게 생각할 일은 아니다.

소설 속에서라면 궁내부에서 에르나스의 사생활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내 사생활에 관심을 보인다는 건, 내가 리히테나워 대공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는 뜻이지.’

오늘 나는 아그리파 가문의 신동인 하인리히에게 완승을 거뒀다.

칼데아스 등 궁내부 사람들이 보기에… 현재 리히테나워 대공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인 것이다.

“걱정 마십시오, 여러분.”

나는 칼데아스뿐만 아니라 다른 궁내부 사람들도 쳐다보며 말했다.

“저는 아카데미에서 검술의 경지를 끌어올릴 생각밖에 없습니다. 다른 곳에 한눈팔 여유는 없습니다.”

“그게 정말이십니까?”

“네, 세리느와의 약혼을 파기한 것도 그 일환입니다.”

“크흠, 그러시다면…….”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그러니…….”

잠시 말을 끊은 뒤,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는 저에게 이런 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지 마십시오.”

“……!”

“제 앞가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상대는 황실을 보좌하는 궁내부 사람들이다.

그런 관점에서 생각하면, 지금 내 발언은 상당히 오만한 것이다.

하지만 현재 나는 잠정적으로 ‘리히테나워 대공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그들에게 이 정도로 강하게 말할 자격은 있는 것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에르나스 님.”

칼데아스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무례한 태도를 취한 점, 사과드리겠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칼데아스 님.”

그렇게 말한 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준결승 제1시합도 마무리되었을 겁니다. 여러분도 갈 길이 바쁘시다고 하니, 오늘의 만남은 이걸로 마무리하도록 하죠.”

“네, 에르나스 님.”

나는 칼데아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칼데아스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바로 웃으면서 내 손을 맞잡았다.

“건투를 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악수를 하면서, 나는 이번 이벤트가 무난하게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했다.

소설 속에서는 검술명가의 후계자도 아닌 주인공 아칸델이 하인리히를 꺾어 버리기 때문에, 궁내부에서 아칸델과 접촉해 그 정체를 파헤치려 했다.

‘아칸델은 출신도 불명확해. 그런 녀석이 아카데미 정점에 오르면 리히테나워 대공 자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칼데아스가 엄청나게 고민했었지.’

하지만, 칼데아스도 이제는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6대 검술명가의 후계자인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이 최유력 후보로 급부상했으니까.

게다가 현재의 에르나스는 더 이상 난봉꾼도 아니기 때문에, 나중에 황녀의 약혼자 후보로서 결격 사유가 생기는 걸 걱정할 필요도 없다.

‘고마워하라고, 칼데아스.’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칼데아스의 손을 꽉 잡았다.

* * *

“준결승 제1시합, 세리느 바스티안의 승리입니다!”

대기석으로 돌아가니, 마침 세리느가 루퍼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순간이었다.

관전하고 있던 슈미츠는 내 기척을 눈치채고 고개를 돌렸다.

“아, 에르나스 님, 이제 오셨습니까? 상당히 재미있는 시합이었는데.”

“그래, 나도 보고 싶었는데 아쉽게 되었어.”

“대체 무슨 일이었습니까?”

“그냥, 정치적인 일이야.”

“으음…….”

슈미츠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아까 전에 발렌티아노 교수님이 왔다 가셨습니다.”

“발렌티아노 교수?”

발렌티아노는 아카데미를 대표하는 절정급의 그래듀에이트다.

아카데미 최대 파벌인 발렌티아노 클래스를 이끌고 있으며, 동부 검술의 달인이다.

“무슨 일로 궁내부 사람들이 에르나스 님을 데려갔는지, 언제쯤 돌아올지 여쭤보시더군요.”

“그래서 어떻게 했지?”

“그냥 잘 모르겠다고만 답변드렸습니다. 아쉬운 표정으로 혀를 차면서 돌아가시더군요.”

“…….”

내 예상이 맞다면, 발렌티아노는 나를 스카우트하러 왔을 것이다.

2차 시험을 통과해 진급하면 발렌티아노 클래스로 오라고 말이다.

그리고 아까 시합에서 내가 펼친 검술이 뭐였는지도 꼬치꼬치 캐물어 볼 생각이었을 것이다.

‘발렌티아노가 접촉해 오다니… 슬슬 진급이 다가왔다는 게 실감이 되네.’

흑색 6반에서 머무르는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곧 있을 2차 시험을 통과하면 다른 곳으로 이동해 본격적인 그래듀에이트 대상 교육을 받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기껏해야 그래듀에이트 초입 전후였던 놈들만 상대하면 됐지만… 앞으로는 달라진다.

‘그러니… 준비를 해야지.’

진급 이후를 대비한 준비.

그것은 이미 시작된 상태였다.

“슈미츠, 이거 알고 있어?”

시합장에 나갈 준비를 하면서, 나는 슈미츠에게 말을 건넸다.

“아까 나를 데려갔던 궁내부 사람… 칼데아스는 아카데미 졸업생이야.”

“아, 그랬습니까? 그냥 문관인 줄 알았는데요.”

“그렇지 않아.”

나는 고개를 저으면서 미소 지었다.

“검술이 아주 뛰어난… 그래듀에이트 상급의 검사거든.”

* * *

아카데미를 떠나는 마차 안에서 궁내부 직원들은 대화를 나눴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은 정말 대단한 인물 같았습니다.”

“검술 실력도 대단했지만, 말하는 것도 보통이 아니더군요.”

“너무 건방진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만… 뭐, 리히테나워 대공이 되려면 그 정도 배포는 있어야겠죠.”

물론,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다.

지금 앞서가고 있는 에르나스가 몰락하고, 다른 검술명가의 후계자가 아카데미의 정점에 설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에르나스가 리히테나워 대공이 될 것 같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칼데아스 사무관님은 왜 그렇게 찜찜한 표정을 하고 계십니까?”

“뭔가 걸리는 것이라도……?”

구석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칼데아스에게 말을 걸자,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좀… 신경 쓰여서 말이다.”

“뭐가 말입니까?”

“내가 보기에,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은 더 이상 여자 관련으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 같았다.”

“네, 그 부분은 다행스러운 일이죠.”

“그런데 말이다…….”

칼데아스가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까 악수할 때 내 손을 잡고 한참 동안 놓아 주지 않더란 말이지. 너무 정열적인 악수여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

“세리느 바스티안과의 약혼을 파기한 것도… 새로운 취향에 눈떴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더군…….”

칼데아스의 우려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