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동시에 잡는다 (2)
나는 중간 지점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대로 황색 3반의 진지로 쳐들어갈 수도 있고, 녹색 4반의 진지로 달려갈 수도 있는 위치다.
그리고 베리스리제와 고르트 두 사람을 맞이하기에도 알맞은 지형이었다.
“에르나스!”
이윽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화려한 금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면서 베리스리제가 다가오고 있었다.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하는군, 베리스리제.”
“……!”
내가 말을 건네자, 베리스리제가 화난 표정을 지었다.
“내 말이 뭐가 잘못되었나?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는 건 정말 오랜만인 것 같은데.”
“입학시험 때도 잠깐 대화했어! 너란 녀석은 정말……!”
“아, 그런가?”
이건 몰랐다.
소설 속에 자세히 묘사되지 않았던 부분이니까.
“에르나스, 일부러 그런 거지?”
“오해다, 베리스리제.”
“웃기고 있네. 네 말은 믿을 수 없어.”
소설 속에서 베리스리제는 세리느 이상으로 에르나스를 불신하는 여학생이었다.
에르나스는 그 심리를 이용해서 베리스리제를 자기 마음대로 조종했지만 말이다.
“에르나스!”
쿵!
멀리서 도약한 고르트가 땅을 울리면서 착지했다.
다리 근력과 마력을 조화시켜 도약력을 극대화한 모양이었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더 이상 움직일 생각 마라.”
“…….”
“여기서 너를 짓밟아 줄 테니까.”
고르트가 특제 목검을 치켜들었다.
평범한 목검보다 훨씬 큰, 마치 나무 기둥 같은 목검이었다.
“베리스리제, 협공해라.”
“잠깐, 고르트. 나는 아직 에르나스에게 할 말이…….”
“지금 그럴 때냐? 에르나스를 제압하는 걸 우선해!”
“큭…….”
베리스리제가 입술을 깨물며 목검을 치켜들었다.
고르트와는 대조적으로 가볍고 가늘게 개조한 목검이다.
끝을 날카롭게 갈았기 때문에, 급소를 찌른다면 충분히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검이었다.
‘저런 건 몰수당해야 정상인데 말이야. 이것도 6대 검술명가의 힘인가.’
목검답지 않게 커다란 검.
목검답지 않게 뾰족한 검.
각자의 스타일대로 공격력을 극대화한 목검을 들고, 두 사람이 나를 에워쌌다.
“타앗……!”
“하압……!”
두 사람은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움직였다.
고르트는 내 우측에서 돌진해 왔고, 베리스리제는 한발 늦게 내 좌측을 향해 달려왔다.
하지만, 나에게 도달하는 건 베리스리제가 더 빨랐다.
“……!”
파앗!
날카로운 상단 공격.
얼굴에 맞기라도 하면 위험하다.
하지만, 나는 그 공격을 정확히 피했다.
“피했어?!”
현재 내 눈에도 마력이 전개된 상태다.
동체 시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리고 있기 때문에, 베리스리제의 움직임을 간파할 수 있다.
‘베리스리제는 아직 그래듀에이트도 아니니까.’
베리스리제의 공격을 피하면서 검을 휘둘렀다.
단지 그것만으로, 고르트의 검을 다른 방향으로 흘려보낼 수 있었다.
“음?!”
고르트가 신음했다.
자신의 파워를 받아넘겼다는 게 믿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고르트의 공격을 교묘하게 흘려 넘겼을 뿐이다.
‘정면으로 부딪치는 건 위험하지.’
현시점에서는 고르트의 파워가 더 강하다.
육체 자체가 다르니 어쩔 수 없다.
그러니 정면에서 부딪쳐서는 안 된다.
공격을 다른 방향으로 흘려보내면 된다.
검기를 사용해서 말이다.
“이 녀석, 검기를……!”
뒤늦게 깨달은 고르트가 경악했다.
“베리스리제! 이 녀석, 검기를 조절해서 내 공격을 미끄러뜨렸어!”
“뭐?!”
검기는 마력의 흐름이다.
흐름을 조절하면 검기의 성질을 조정할 수 있다.
충돌했을 때의 충격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조절해 주면, 고르트의 발트펠트 중검술조차 흘려보낼 수 있다.
“말도 안 돼! 그런 건…….”
베리스리제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외쳤다.
“그래듀에이트 하급은 되어야 가능한 거잖아!”
목소리를 높이는 베리스리제를 향해 움직였다.
베리스리제는 당황해하면서도 바로 기술을 펼쳤다.
슈라이에르 세검술의 화려한 연속 찌르기였다.
‘역시 베리스리제, 이렇게 동요한 상태에서도 신속한 공격이야.’
오랜 수련을 통해 몸에 기억시킨 기술일 것이다.
머리로 생각하지 않아도 반사적으로 기술이 나갈 터.
이런 건 나한테는 불가능하다.
하나하나 생각하면서 기술을 펼칠 수밖에 없다.
‘여기서는, 버티컬 트리니티로 대응한다.’
파파팟!
바스티안 기사검술을 대표하는 3연격이 베리스리제의 공격을 흐트러뜨렸다.
그래듀에이트로서 마력을 활용하고 있기에, 베리스리제의 기술을 능가할 수 있었다.
“에르나스!”
고르트가 육중한 목검을 휘두르며 내 배후를 노렸다.
하지만 나는 가볍게 몸을 놀려 그 공격을 피했다.
‘여기서는 바스티안 기사검술로 충분하지.’
다시 한번 검을 휘둘러 고르트를 견제했다.
결코 변칙적이지 않은, 정석적인 동부 계열 검술.
단지 그것만으로도 고르트를 주춤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 녀석, 이렇게 완성도 높은 검술을……!”
“주춤하지 마, 고르트!”
어서 협공하라고 재촉하면서, 베리스리제가 다시금 나한테 달려들었다.
* * *
‘에르나스가 이렇게 능숙하게 검을 다루다니……!’
베리스리제는 혼란스러웠다.
에르나스가 검술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예상 못했다.
‘그것도 아주 완성도 높은 동부 검술… 오랜 세월 동안 꾸준히 노력해 온 사람의 검이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베리스리제가 알고 있는 에르나스는 꾸준한 노력 따위는 하지 않는 남자였다.
지금까지 검을 잡은 횟수보다 무도회에서 여자 손을 잡은 횟수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모르게 노력했다는 건가?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대체 왜?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숨겨야 했던 이유가 뭐지?
‘정말로, 너란 사람은……!’
사기꾼이다.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는, 지독한 사기꾼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베리스리제는 검을 휘둘렀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목소리를 높이면서 파고들었다.
급소도 거리낌 없이 노렸다.
베리스리제의 목검으로 급소를 찌르면 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단순한 검술의 힘만은 아니야……!’
에르나스는 마력을 사용해 자신의 전투력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근력과 순발력을 향상하고 목검 자체를 강화하고 있기에, 베리스리제의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특히 순간순간마다 목검에 흐르는 마력을 조절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건 결코 그래듀에이트 초입이 아니라고!’
이제 막 마나 하트를 만든 그래듀에이트 초입으로는 불가능하다.
이렇게 능숙하게 마력을 제어하는 건, 그래듀에이트 하급은 되어야 가능하다.
하지만 이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까지 많아 봤자 적색 엘릭시르 두 병을 복용했을 뿐이다. 그리고 마나 하트를 만든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다.
이런 상태로 그래듀에이트 하급에 도달한다는 건…….
‘검술의 천재라도 된다는 거야?!’
검술의 천재.
말도 안 되는 얘기다.
그럴 리가 없다.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하다.
‘그래, 뭔가 속임수가 있어!’
어쩌면 아카데미에 들어오기 전부터 엘릭시르를 복용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른 학생에게서 엘릭시르를 빼앗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속임수로 지금 같은 힘을 손에 넣은 게 아닐까.
‘그런 식으로… 매번 사람을 기만하고!’
베리스리제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검기를 만드는 건 아직 부담스럽지만, 마력으로 육체 능력을 강화하는 것은 가능하다.
‘에르나스보다… 훨씬 빠르게!’
전신의 근육을 활성화했다.
상체도 하체도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빠르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고르트! 너도 전력을 다해 줘!”
“아, 알겠다!”
고르트에게 목소리를 높이면서 공격을 펼쳤다.
에르나스의 검술은 정석적이다. 움직임을 예측한 뒤 빠르게 파고든다면 분명 승산이 있다.
‘여기인가?!’
베리스리제의 눈이 에르나스의 빈틈을 찾아냈다.
그 순간, 베리스리제는 마나 하트의 마력을 모조리 끌어올렸다.
‘레이 스파이크……!’
파앗!
진짜 레이피어를 사용했다면, 한 줄기 빛이 적을 찌르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 정도로 고속인 찌르기가 에르나스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베리스리제의 전력을 다한, 슈라이에르 세검술의 비기였다.
‘그런 정형화된 검술로 이걸 막을 수는 없어!’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에르나스의 움직임이 바뀌었다.
품격조차 느껴지던 동부식 검술이… 완전히 무너졌다.
“어?”
허를 찔린 순간.
에르나스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것이 아니다.
“베리스리제, 위쪽이다!”
“……!”
베리스리제는 다급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에르나스는 공중에 떠 있었다.
그리고 베리스리제는 전력을 다해 허공을 찌르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 이런 건 동부식 검술이 아니야!’
그 순간, 베리스리제의 머릿속에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속임수도 실력에 포함되어 있다.’라고 말했던, 욜스 교수의 목소리가.
‘설마 나를 속여서… 내 공격을 유도한 거야?!’
에르나스가 공중에서 공격 자세를 취했다.
변칙적인 스타일의 서부 검술 같았지만,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자세다.
“에르나스……!”
절규하면서 다급히 목검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전력을 다한 레이 스파이크 직후라, 자세가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윽……!”
콰르릉!
마치 번개가 치는 듯한 소리가 들리면서, 에르나스의 공격이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베리스리제의 목검이 산산이 부서졌다.
“……!”
중간 부분에서 부러진 것도 아니다.
정말로 박살 나서 가루가 되었다.
에르나스의 검기가 압도적인 위력을 발휘했다는 뜻이었다.
‘설마… 그래듀에이트 전용 검술?!’
바로 그때.
두 번째 공격을 날리려는 에르나스 너머로, 가만히 서 있는 고르트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궁지에 처한 베리스리제를 도와주기는커녕, 뒤로 물러서서 에르나스를 관찰하고 있었다.
‘이 배신자……!’
고르트는 에르나스의 역량을 알아내기 위해 베리스리제를 제물로 삼았다.
그 사실을 깨닫고, 베리스는 비난하는 말을 내뱉으려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아……!”
이어진 에르나스의 두 번째 공격이 베리스리제의 몸을 덮쳤다.
* * *
쿠웅!
튕겨져 나간 베리스리제가 바위에 부딪혔다.
베리스리제는 그대로 축 늘어졌다.
두 번째 공격에는 검기를 사용하지 않았으니, 목숨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 고르트.”
나는 고개를 돌렸다.
고르트는 베리스리제가 당하는 걸 보면서도 가만히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이제 너 하나만 남았군.”
“에르나스…….”
고르트가 무서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방금 그거, 그래듀에이트 전용 검술인가?”
“상상에 맡기지.”
“하하, 나 원 참.”
웃음소리를 내면서 고르트가 머리를 긁었다.
“딱 보면 알 수 있어. 방금 검기는 아카데미에서 지급된 적색 엘릭시르의 마력만으로는 절대로 펼칠 수 없는 검기야.”
“…….”
“너, 아카데미에서 지급되는 것 말고도 따로 엘릭시르를 복용했지? 입학 전에 엘릭시르를 입수한 건가? 아니면 다른 학생들에게서 빼앗았어?”
그 질문을 듣고.
나는 고르트에게 차가운 목소리를 던졌다.
“내가 너하고 똑같다고 생각하지 마라, 고르트.”
“……!”
그 순간, 고르트가 몸을 움찔했다.
정곡을 찔린 것이다.
“별도의 엘릭시르를 복용해 온 건 너일 텐데.”
“…….”
그렇다.
고르트는 황색 3반의 학생들에게서 엘릭시르를 갈취해서 복용해 왔다.
물론, 충분한 깨달음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는 엘릭시르만 주구장창 마셔 봤자 별 의미가 없다.
마력량이 일시적으로 늘어나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빠져나가 버린다.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력만 늘려 봤자 의미 없을 텐데 말이다. 다른 학생들한테 미안하지도 않나?”
“닥쳐라, 에르나스……!”
그 순간.
고르트의 커다란 목검에서 마력이 솟구쳤다.
베리스리제와 협공할 때는 저 정도로 강렬한 검기를 펼치지 않았다.
“이 막강한 힘은 내 것이다! 이 힘으로 너를 찍어 누르고, 청색 2반의 ‘신동’도 쓰러뜨릴 거란 말이다!”
“꿈이 크군.”
냉정하게 대꾸하면서 나는 검을 치켜들었다.
“그렇다면 그 꿈에서 깨게 해 주마.”
“에르나스……!”
성난 황소처럼 달려들면서 고르트가 포효했다.
그 모습을 똑바로 쳐다보며, 나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절정급의 검술을 펼쳐, 이 대결을 마무리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