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동시에 잡는다 (1)
“고르트 형님, 에르나스가 흑색 6반에 복귀했다고 합니다.”
“그래?”
“네, 방금 교관한테 들었습니다.”
측근의 말을 듣고, 고르트는 손에 들고 있던 아령을 내려놓았다.
이마의 땀을 맨손으로 쓱 닦은 뒤, 그대로 근처 운동기구 위에 걸터앉았다.
“그냥 뒈질 때까지 징벌동에 갇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명문가의 아들답지 않은 거친 말투를 내뱉었다.
하지만 주위 측근들은 고르트의 이런 모습에 익숙하기 때문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암살자에 습격당했다는 얘기는 어떻게 됐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에르나스가 격퇴했다고 하더군요.”
“아카데미에 침입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 있는 암살자를 에르나스가 격퇴했다…….”
“징벌동은 아카데미 북쪽 끄트머리에 있으니, 다른 곳보다 침입하는 게 쉽긴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찌질한 녀석이 암살자를 격퇴했다는 게 좀 수상하단 말이야.”
고르트는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역시 그 녀석, 뭔가 있어.”
“고르트 형님은 에르나스를 평가절하 하고 계신 줄 알았습니다만…….”
“착각하지 마. 나는 여전히 그놈을 찌질한 겁쟁이라고 생각하니까.”
예전부터 고르트는 에르나스를 얕잡아 봤다.
한번 붙어 보자고 얘기를 꺼낸 적도 있지만, 에르나스는 핑계를 대면서 거절했다.
얘기를 들어 보니 다른 명문가의 자식들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한다.
“그 녀석하고 맞붙으면, 내가 찍어 누를 수 있어. 걱정 말라고.”
“오오……!”
“역시 고르트 형님!”
측근들의 찬사를 받으며, 고르트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왕 하는 거 보다 확실하고 완벽하게 찍어 눌러야겠지.”
고르트는 에르나스를 얕잡아 보고 있다.
하지만 방심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서, 막강한 힘으로 찍어 누를 생각이다.
“그런 모습을 보면, 세리느 양도 에르나스에게 완전히 실망할 거야.”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고르트는 살짝 불쾌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동안 고르트는 세리느가 에르나스를 진심으로 싫어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번에 살펴보니, 세리느는 에르나스를 매우 신뢰하는 것처럼 보였다.
“젠장, 약혼 파기까지 했으면서,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군.”
“네?”
“아무것도 아니야.”
고르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그렇고… 준비는 됐나?”
“아, 물론입니다.”
측근 한 명이 왜소한 체격의 남학생을 끌고 나왔다.
그 남학생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고르트를 쳐다보고 있었다.
“고, 고르트 님…….”
“어이쿠, 정말로 고맙군.”
고르트는 과장된 몸짓으로 고개를 숙였다.
“소중한 엘릭시르를 나한테 양보해 주겠다니 말이다.”
“…….”
남학생은 붉은색 액체가 담긴 약병을 들고 있었다.
1차 시험을 통과하고 받은 적색 엘릭시르였다.
다른 학생들은 엘릭시르를 받자마자 복용했지만, 그는 복용하지 않고 계속 간직하고 있었다.
황색 3반에는 이런 학생이 한둘이 아니었다.
“고르트 님, 약속대로 저희 가문을…….”
“걱정 마라. 내가 다 아버지한테 얘기해 놓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남학생은 굳은 표정으로 엘릭시르를 내밀었다.
고르트는 웃으면서 약병을 받아들인 뒤, 지체 없이 들이켰다.
“후우… 그냥 한꺼번에 들이켜면 좋을 텐데, 며칠 간격으로 찔끔찔끔 마시니 영 감질난단 말이지.”
“고르트 형님, 한꺼번에 여러 병을 마시면 마력 폭주가 발생해서…….”
“알고 있어. 그냥 해 본 소리야.”
고르트는 약병을 그냥 옆에다 집어 던졌다.
그러곤 바닥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마력을 연공할 테니, 주위를 지켜라.”
“네, 고르트 형님!”
눈을 감은 채 고르트는 체내에서 마력을 순환시키기 시작했다.
지금 고르트의 마나 하트에는 대량의 마력이 저장되어 있다.
그동안 다른 학생들의 엘릭시르를 ‘양보’받아서 복용했기 때문이다.
순수한 마력량만큼은 아카데미 신입생 중에서 가장 많을 것이다.
‘젠장, 그래도 효율이 형편없군.’
엘릭시르의 마력을 흡수하면서 고르트는 혀를 찼다.
마력을 다루는 능력이 향상되지 못한 상태에서 엘릭시르만 잔뜩 복용했기 때문에, 마력이 제대로 마나 하트에 정착되지 못하고 있었다.
‘깨달음을 얻어서 그래듀에이트 하급에 진입해야 하는데, 지금 당장은 어려워.’
그래듀에이트 하급으로 올라가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엘릭시르를 퍼마셔서 억지로 마력을 늘려도, 그에 상응한 깨달음을 얻지 못한 상태라면 소용없다.
억지로 늘린 마력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체외로 빠져나가 버린다.
‘그래도, 그냥 평범하게 두 병만 마시는 것보다는 나을 거다.’
최대한 많은 양의 마력을 확보해서, 공격의 위력을 끌어올려야 한다.
훗날 청색 2반의 ‘신동’하고도 맞부딪치게 될 텐데, 그때 고르트가 내세울 수 있는 무기는 이것밖에 없다.
‘먼저… 에르나스 상대로 내 힘을 보여 줘야지.’
그 녀석이 힘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든, 아카데미에 와서 갑자기 강해진 것이든, 아무 상관 없다.
고르트가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 누르면 되는 것이다.
베리스리제를 잘 이용해서 에르나스를 몰아세운 뒤, 일격에 해치우면 된다.
‘그렇게 내 진정한 힘을 보여 주면서, 아카데미의 정점에 서 주마.’
마력을 억지로 마나 하트에 밀어 넣으며, 고르트는 미소를 지었다.
* * *
그리고 마침내 진지전이 열리는 날이 되었다.
대항전 때처럼 여러 교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각 학급의 학생들이 속속 도착했다.
하지만 서로 다른 반의 학생들이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시합장에 진입하는 위치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소설하고 똑같다면, 흑색 6반의 진지는 황색 3반과 녹색 4반의 진지하고 삼각형을 이루고 있어.’
나는 산길을 올라가면서 주위를 살폈다.
우리 진지는 북쪽 끄트머리인데, 여기서 동쪽에는 황색 3반이, 동남쪽에는 녹색 4반이 있을 것이다.
‘고르트도 베리스리제도 이런 정보는 이미 입수했겠지. 그리고 흑색 6반를 협공하기로 미리 얘기해 뒀을 거야.’
한편 적색 1반, 청색 2반, 백색 5반은 여기서 남서쪽에 몰려 있는데, 자기들끼리 싸우기 딱 좋은 지형이다.
레스터를 잃은 백색 5반이 가장 먼저 표적이 될 것이고, 그 이후에는 적색 1반과 청색 2반의 전투가 벌어질 것이다.
소설대로라면 그쪽의 전투가 우리한테 영향을 끼치는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방심하면 안 된다.
“클로에, 발 빠른 사람들을 뽑아서 저쪽 방향에 정찰병을 배치해 줘요.”
“네, 알겠어요.”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세리느가 지시를 내렸다.
세리느도 남서쪽을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모양이다.
‘세리느가 지휘하고 클로에가 보좌해 주면, 나는 공격에만 전념해도 되겠어.’
황색 3반의 고르트와 녹색 4반의 베리스리제.
6대 검술명가의 후계자 두 사람을 한꺼번에 제압하는 것이, 오늘 내가 할 일이다.
* * *
진지전의 평가 방식은 대항전과 다르다.
각 진지에는 깃발이 4개씩 설치되어 있는데, 그 깃발이 꺾일 때마다 감점이 된다. 진지 깊숙한 곳에 있는 깃발일수록 점수가 높다.
반대로 다른 편 진지의 깃발을 꺾으면 점수를 얻을 수 있다.
우리 편 진지를 최대한 지키면서, 다른 편 진지를 최대한 유린해야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흑색 6반의 깃발은 황색 3반하고 절반씩 나눠 갖기로 했어. 황색 3반하고 싸우는 건 흑색 6반을 완전히 제압한 이후니까, 그쪽 녀석들하고는 충돌하지 마.”
“알겠습니다, 베리스리제 님!”
측근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베리스리제의 개인적 선호 때문에 전부 여학생, 그것도 후작 가문 이상의 귀족 영애뿐이다.
근육이 튼실한 남정네들만 데리고 다니는 고르트와는 대조적이었다.
“우리가 협공을 할 예정이라는 건 흑색 6반도 알고 있을 거야. 그러니 진지에 틀어박혀서 방어 위주의 전략으로 나오겠지.”
“…….”
“하지만 소용없어. 흑색 6반은 지난번 서바이벌 훈련 이후 충분히 회복하지 못했을 테고, 황색 3반의 돌격을 막아 낼 수 없을 테니까.”
고르트가 이끄는 황색 3반의 기세는 압도적이다.
부상에서 회복되지 못한 흑색 6반 녀석들이 막아 낼 수 있을 리 없다.
“황색 3반이 방어선을 무너뜨려 주면, 우리 녹색 4반이 무너진 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거야. 알겠지?”
“네, 알겠습니다!”
“에르나스를 발견하면 바로 위치를 퍼뜨려 줘. 나하고 고르트가 달려갈 테니까.”
그렇게 기본적인 작전을 확인한 뒤, 베리스리제는 최소한의 병력만 남긴 채 진지에서 내려왔다.
험한 산길 너머로 흑색 6반의 진지가 보였다.
‘기다리라고, 에르나스.’
특별히 개조한 목검을 손에 든 채, 베리스리제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네 본모습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해 줄 테니까.’
고르트와 함께 에르나스를 짓밟아 줄 걸 생각하니,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산길을 걷고 있었을 때, 갑자기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 베리스리제 님!”
“왜 그래?”
“우측을 보세요!”
“……?”
베리스리제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한 남학생이 목검을 든 채 산등성이를 걷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에르나스?!”
틀림없었다.
흑색 6반의 진지를 지키고 있어야할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이 혼자 산등성이를 걷고 있었다.
그것도 조금도 몸을 숨기지 않은 채.
“저 사기꾼 녀석, 대체 무슨 생각이지?”
“베리스리제 님, 수상합니다.”
“네, 저렇게 보란 듯이 움직이고 있는 건, 무슨 속셈이 있는 겁니다.”
측근들의 말을 듣고, 베리스리제는 살짝 기분이 상하는 걸 느꼈다.
“그런 건 너희들이 말해 주지 않아도 알고 있어! 내가 저 녀석의 속임수에 넘어갈 줄 알아?”
“죄, 죄송합니다!”
보나 마나 함정일 것이다.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에르나스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우리 녹색 4반의 진지? 아니면 황색 3반의 진지?’
녹색 4반의 진지에는 최소한의 병력만 남아 있다.
만약 에르나스가 공격한다면 깃발 한두 개쯤은 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새 흑색 6반의 진지가 완전히 괴멸되면 의미 없는데…….’
깃발 4개가 다 꺾이면 감점이 2배가 된다.
진지를 완전히 빼앗긴 거라, 사실상의 실격 처리다.
에르나스가 자리를 비우면 흑색 6반은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
‘잠깐, 오히려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 저렇게 우리를 유인하고 있는 건가?’
에르나스가 진지를 공격하기 시작하면, 황색 3반도 녹색 4반도 병력을 되돌려야 한다.
그러면 흑색 6반의 진지를 괴멸하는 건 상대적으로 어려워진다.
이런 식으로 전장을 휘젓고 다니면서 시간을 끌다가, 시합 종료 시간까지 버티는 작전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는 안 돼!’
속임수도 실력이라고 했던 욜스의 말이 생각났다.
하지만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는다면 아무 상관 없다.
“너희들은 이대로 병력을 이끌고 흑색 6반의 진지로 전진해.”
“네?”
“에르나스는 내가 대처하겠어.”
“……!”
베리스리제의 말을 듣고, 주위의 측근들이 숨을 삼켰다.
“저 녀석 하나를 쫓기 위해 병력을 쪼개는 건 비효율적이야.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 나 혼자 쫓아가겠어.”
베리스리제는 경신술도 뛰어나다.
에르나스를 처리한 뒤 다시 돌아와서 합류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베리스리제 님…….”
“에르나스는 적색 1반의 루퍼스와 백색 5반의 레스터도 제압했다는데…….”
“아직도 그 소리야?”
베리스리제가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자, 다들 목을 움츠렸다.
“에르나스가 정말로 그 정도 실력을 갖고 있다고 해도 상관없어. 분명 고르트도 나처럼 에르나스를 상대하기 위해 움직일 테니까.”
고르트와 협공해서 에르나스를 제압하면 된다.
그러면 문제 될 게 전혀 없다.
“그 사기꾼 녀석 마음대로 되지는 않을 거야, 절대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베리스리제는 혼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슬슬 베리스리제가 걸려들었겠지. 고르트도 곧바로 움직이기 시작할 테고.’
나는 산길을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베리스리제도 그렇고, 고르트도 그렇고… 자기 딴에는 합리적인 판단을 했다고 생각했을 거야.’
그 녀석들은 에르나스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다.
에르나스 뜻대로 되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결국 에르나스의 뜻대로 움직이게 된다.
나는 녀석들의 심리를 이미 다 파악하고 있었다.
‘소설 속에서도 그랬었고 말이야.’
그리고 두 사람 다 세리느를 과소평가하고 있다.
돌발 상황에 약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본래 세리느는 검술명가의 후계자들 못지않은 실력의 소유자다.
베리스리제와 고르트가 빠진 상태라면 세리느가 충분히 진지를 지켜 낼 수 있다.
‘지난번 서바이벌 훈련에서 세리느를 꺾어 버리는 바람에, 녀석들은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된 거야.’
이걸로 베리스리제와 고르트를 유인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렇다고 각개격파를 해서는 안 된다. 한쪽을 먼저 격파해 버리면 다른 쪽이 후퇴하거나 원군을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자리에 다 불러 모은 상태에서 쓰러뜨려야 의미가 있다.
‘2 대 1이지만, 딱히 불리하지는 않아.’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손에 낀 반지를 만졌다.
‘지금 나한테는 그래듀에이트 전용 검술이 있었으니까.’
그래듀에이트 전용 검술.
처음부터 마력을 사용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만들어진, 일반적인 검술과는 차원이 다른 검술.
이 그래듀에이트 전용 검술을, 나는 얼마 전에 만난 욜스 칼레시우스에게서 얻어 낸 상태였다.
‘이 그래듀에이트 전용 검술로… 베리스리제와 고르트, 두 사람을 동시에 잡는다.’
내 몸에 흐르는 정갈한 마력을 느끼면서, 나는 목검을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