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304화 (304/315)

304화

제 2막

지난 일 년 동안의 여행은, 우진의 인생에 있어 정말 다양한 자양분이 되어 주었다.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혀 주었으며, 그와 동시에 기업가로서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으니 말이다.

물론 가장 큰 목적이었던 전 세계의 다양한 공간과 건축에 대한 경험은, 더더욱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일 년 동안 우진의 노트에 그려진 건축 스케치는, 백 장이 훨씬 넘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열 장의 스케치는, 살아생전에 꼭 실제 프로젝트에 적용시켜 보고 싶을 수준이었다.

‘꿈을 위해 떠났던 여행이었는데, 새로운 꿈만 더 늘려서 돌아온 느낌이네. 하하.’

여행 동안 이렇게 넘치는 에너지를 채워 돌아온 만큼.

우진이 출근한 날부터, WJ 스튜디오는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우진이 없는 동안에도 물론 각종 프로젝트들 때문에 정신없이 회사가 굴러갔지만.

일 년 만에 대표실에 불이 켜지자,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든 것이다.

회사에 돌아온 우진이 가장 먼저 한 것은, WJ 스튜디오 설계팀의 인원을 대폭 충원하는 것이었다.

“팀장님. 올해 공채에서 설계팀은 몇 명 충원했었죠?”

“총 일곱 명 충원했습니다, 대표님.”

“음……. 10월에 공고 한 번 더 내도록 하죠.”

“수시채용입니까?”

“그렇습니다.”

“인원은 몇 명 정도…….”

“팀을 두 개 정도 더 만들 생각입니다.”

“네……?”

“기존 설계팀 인원 분배하고 충원하는 방식으로 두 팀 정도 더 세팅할 생각이니, 인사계획 좀 뽑아서 올려주세요.”

“그, 그러려면 최소 스무 명은 더 있어야 합니다, 대표님. 아무리 타 팀에서 차출한다 해도, 팀이 두 개나 더 생기려면…….”

“기존 팀의 인원을 차출하는 건, 신규 팀의 인원 부족 때문이 아닙니다.”

“네? 그 말씀은…….”

“기존 팀에서 실력 있는 인원들 중 선별하여, 팀장급 둘에 디렉팅 가능한 Principal Designer 넷 정도를 세팅해 주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전부 새로 뽑으신단 말씀이군요.”

“신입도 좋고 경력직도 좋습니다. 이번에 최소 서른 명은 뽑을 생각 하셔야 할 겁니다.”

“그렇게 계획안 올려 보겠습니다, 대표님.”

회사에서 인원을 충원한다는 말은, 더 큰 성장을 위해 투자한다는 말이다.

한번 인원이 늘어나면 그것은 곧 회사의 유지비가 증가하는 것이니, 그만큼 회사의 생산성을 높일 자신이 없다면 채용이라는 결정은 쉽지 않은 것이다.

때문에 서른 명이라는 인원을 일시에 충원하는 것은, 꽤 덩치가 커진 WJ 스튜디오에게도 커다란 부담이었다.

물론 우진은 이 부담을 감수할 만큼 충분한 자신이 있었지만 말이다.

“대체 안식년 동안 무슨 프로젝트를 준비하셨기에, 설계팀을 두 팀이나 더 세팅하신다는 거지?”

“그러게. 대표님 돌아오시면 한 번 대 격변 있을 거라더니, 그 말이 진짜였네.”

“으……! 기대돼!”

“뭐가?”

“나 내년에 승진 차례잖아.”

“응?”

“이번 프로젝트에서 어필 잘하면, 신규로 세팅되는 팀에 팀장으로 갈 수도 있지 않을까?”

“어, 그러게요. 은 과장님 충분히 가능성 있겠는데요?”

“이럴 때가 아니네요. 저 일 하러 갑니다!”

“은수현이 신났네.”

“하하, 은 과장 팀장님 밑에서 그만 일하고 싶은가 본데요?”

“쩝. 내가 너무 빡시게 굴리긴 했지. 하하하.”

신규 채용에 대한 소문이 사내에 쫙 퍼져나간 것만으로도, 회사에 활력이 돌기에는 충분했다.

새로운 얼굴들이 수혈되는 것은, 어떤 집단을 막론하고 생기를 불어넣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대규모 채용은 그저 시작일 뿐이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우진은 더욱 커다란 폭탄들을 투여하기 시작했으니까.

[여의도 ‘JK금융그룹 한국지사’ 신사옥 프로젝트 공람(供覽).]

[스페인 마드리드, ‘AT 복합 몰’ 프로젝트 공람(供覽).]

[부산 영도구 ‘제운 오리엔트 레지던스(가칭)’ 프로젝트 공람(供覽).]

……후략……

WJ 스튜디오의 사내에 구축되어있는 인트라넷에는 새로운 프로젝트가 뜰 때마다 전 직원이 확인할 수 있도록 공람이 올라온다.

부서간 소통과 협업을 위해서라도 정보공유는 필수였으며, 경우에 따라서 융통성 있게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 인사이동을 하기도 해야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프로젝트가 동시에 인트라넷에 올라온 것은, 회사 설립 이후 단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아주 많아 봐야 두 개 정도의 프로젝트였고, 그마저도 하나가 대형 프로젝트였으면 나머지 하나는 작고 심플한 프로젝트인 경우였던 것.

그런데 2015년 10월 WJ 스튜디오의 인트라넷에는, 설계비만 백억 단위에 가까운 대형 프로젝트만 동시에 세 개가 올라와 있었다.

이만한 프로젝트를 대체 어디서 이렇게 주워왔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대표님 여행 다녀오신 것 맞아요?”

“일 년 동안 영업만 뛰다 오신 것 아냐?”

“공람 뜬 것 중에, 해외 사업장만 두 곳이에요.”

“와, 마드리드 사업장은 뭔데. 이거 왜 이렇게 커?”

“와 씨, 인사팀에서 30명 뽑는다길래 너무 많이 뽑는 거 아닌가 했는데……. 지금 보니까 그것도 부족하겠어요.”

“설계팀 두 팀 충원으로 안 될지도 모르겠는데 이거…….”

덕분에 WJ 타워는 조용할 날이 없었지만, 그래도 직원들의 표정은 전부 밝았다.

그렇지 않아도 다른 기업들보다 애사심이 큰 WJ 스튜디오의 직원들이었지만, 이렇게 회사가 또 한 단계 성장하려는 것을 보니 더욱 의욕이 넘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바쁜 직원들 중, 당장 가장 바쁜 것은 사업부의 직원들이었다.

“부장님.”

“네, 대표님.”

“문정동 쪽에 매입해뒀던 필지 전부 다 매각할 준비 해주세요.”

“음……. 조금 이르지 않겠습니까?”

“왜요?”

“최근 법조 단지 들어선다는 소문 돌기 시작하면서, 시세가 계속 오르고 있거든요.”

머릿속에 모든 계획을 정리한 우진이 목표를 향해 달리기 시작하자, 그만큼 많은 돈도 필요했으니 말이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이미 매입가 대비 다섯 배는 오르지 않았습니까?”

“그야 그런데…….”

“발바닥에 사서 허리춤 정도에서 판다고 생각하죠.”

“자금 투입해야 할 곳이 있으신 거군요.”

“당장이야 필요한 돈이 크지 않지만, 내년쯤 꽤 크게 필요할 일이 생길 겁니다.”

“그럼 언제든 처분할 수 있도록 매각 준비만 해 두고, 조금 더 추이 지켜보겠습니다, 대표님.”

“그렇게 하세요.”

“넵!”

“아, 그리고……. 이천시 부동산도 전부 매각 준비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대표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우진을 보며, 경완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놈을 내가 걱정했었다니…….’

복귀하자마자 물 만난 고기처럼 움직이는 우진을 보고 있자니, 일 년 동안의 휴식 후에 매너리즘에 빠지는 건 아닐지 진심으로 걱정했던 과거의 자신이 어이없게 느껴진 것이다.

그래서 직원들이 대부분 퇴근한 늦은 저녁, 대표실에 남아 일 얘기를 하던 경완은,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너, 솔직히 말해 봐.”

“뭘요?”

“일 년 내내 사업구상만 하다가 온 거지? 세계여행은 핑계고?”

“무슨 말입니까? 제가 얼마나 열과 성을 다해서 놀다 왔는데.”

“젠장. 그런데 어떻게 프로젝트를 이렇게 많이 들고 돌아와?”

“운이 좋았나 보죠, 뭐.”

“운? 우리 영업팀 일 년 내내 일해도 이만큼 프로젝트 못 딴다.”

“흐흐, 이제 드디어 대표님의 유능함을 깨달으신 겁니까?”

“얼어 죽을…….”

“아직 겨울도 아닌데 왜 무슨 말만 하면 얼어 죽습니까?”

“시끄러.”

동시다발적으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할 때는, 스케줄링과 구체적인 사업계획이 가장 중요하다.

욕심만 크게 부리다가 일이 꼬여버리면, 가만히 있느니만 못한 상황이 되어버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진이 이렇게 무더기로 투하한 폭탄을 수습하는 것은, 전체 프로젝트를 관리하는 경완의 몫이었다.

모두 퇴근한 시간까지 경완이 대표실에 남아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고 말이다.

“이번 프로젝트 중에, 기간 제일 길게 잡아야 하는 게 어떤 프로젝트일까요, 이사님?”

“아무래도 제운이랑 협업하는 레지던스 아닐까?”

“흠. 역시 그러려나요?”

“그거 사업계획서 보고 진짜 기겁했어.”

“기겁이요? 왜요?”

“보수적인 제운그룹에서, 그런 별난 건축물을 지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거든.”

“하하.”

“차량용 엘리베이터가 있고 실내에 주차까지 가능한 프리미엄 주거시설이라니……. 공사 규모는 JK사옥 보다 조금 작을지 몰라도, 설계 난이도는 훨씬 더 어려울 거야.”

“그거, 원래 2013년에 짓기로 했던 건데 늦어진 겁니다.”

“뭐?”

“흐흐흐. 그런 게 있어요.”

경완과 대화를 나누던 우진은, 잠시 몇 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2011년 영국에서 콜튼 테일러를 처음 만났던 그때.

그와 나눴던 이야기가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다.

[자동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아파트를 짓는 겁니다.]

[예를 들자면, 멋들어진 리버 뷰나 오션 뷰와 함께, 거실에 슈퍼카를 전시해놓을 수 있는 그런 아파트 말인가요?]

[빙고. 바로 그겁니다. 내가 돈을 더 많이 번다면, 한강 앞에 그런 아파트를 하나 짓고 싶군요. 어쩌면 WJ 스튜디오에 의뢰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하.]

비록 한강뷰는 아니었지만, 부산의 멋들어진 오션뷰에, 그때 이야기했던 그 꿈의 건물을 지어볼 수 있게 된 것.

‘2년이 아니라 4년이 걸렸네. 그래도 반쯤 농담처럼 이야기했던 건축을 진짜 할 수 있게 될 줄은 몰랐지.’

자신의 드림 하우스를 얘기하던 콜튼 테일러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떠올린 우진의 입에서, 또 한 번 실소가 새어 나왔다.

콜튼은 이 레지던스를 꼭 한 채 분양받을 거라고, 어제 신이 나서 우진에게 전화 왔었다.

아마 차에 환장하는 석현 또한, 미래의 노동력을 저당 잡혀서라도(?) 한 채 분양받고 싶어 하리라.

‘석현이는 프로젝트 아직 못 봤으려나? 하긴. 봤으면 바로 나한테 전화부터 했을 녀석이지.’

좋은 사람들을 떠올리자, 우진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의 상념은 여기까지였다.

기분 좋은 상념에 빠져있기에는, 당장 경완과 결정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으니 말이다.

“갑자기 왜 멍 때리고 그래?”

“아, 별거 아닙니다. 다시 얘기하시죠.”

그래서 다시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두 사람은, 밤 11시가 넘어서야 업무정리를 마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대표실을 제외한 모든 사무실은 전부 소등되어 있었다.

“전, 이사님만 믿겠습니다.”

“후……. 그래. 한번 해 보자.”

결국 가장 늦게 회사에서 나온 둘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왔다.

WJ 타워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사는 우진과 달리 경완은 보통 자가 운전하여 출퇴근했지만, 오늘은 차를 가지고 오지 않은 날이었다.

“이사님.”

“왜?”

“지금 세팅된 프로젝트, 내년까진 전부 마무리할 수 있겠죠?”

“야, 씨. 그걸 말이라고…….”

“인원도 충원하잖습니까. 어떻게든 내년 하반기까진 끝내야 해요.”

우진과 나란히 건물 밖으로 걸어 나오던 경완은, 우진의 의미심장한 이야기에 게슴츠레 미간을 좁혀 보였다.

“내년 하반기?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무, 무슨 말이긴요. 프로젝트 빨리 쳐내야 여유가 생긴다는…….”

“요놈. 요거 뭔가 또 있는 것 같은데…….”

그리고 그런 경완을 향해, 우진은 피식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 우리 이사님. 진짜 눈치 백 단이라니까.”

“뭔데? 또 무슨 수작을 벌이는 중인 건데?”

WJ 타워 후문 방향으로 걸어 나오자, 서울숲을 따라 이어진 산책로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편의점에서 캔맥주를 한 캔씩 사서 벤치에 앉은 우진은, 경완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래 픽스 되고 나면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또 배신이니 뭐니 하실 테니까 미리 말씀드릴게요.”

“야, 무섭잖아. 또 무슨 일이야.”

배신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의 언급에 경완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고, 잠시 뜸을 들인 우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사님 혹시 이런 기사 본 적 있으세요?”

“어떤 기사?”

“SH물산에서 삼성동 알짜 부지에, 서울 최고 규모로 글로벌 업무지구 지어 올린다는 기사 말입니다.”

“음? 그건 당연히 알지. 그거 때문에 작년에 SH물산 휘청했는데.”

“거기 사업 한 번 엎어졌잖아요?”

“그렇지?”

“아마 조만간 소송 끝나면, SH물산에서 손 뗄 확률이 높아요.”

“그럴 수밖에 없지. 거기 상무 하나 내가 아는데, 아주 학을 떼더라고.”

이어서 우진은 별 것 아니라는 양, 폭탄 같은 말을 이어 붙였다.

“거기 설계권, 내년에 제가 한 번 가져와 보려고요.”

“뭐……?”

“시행사에서 내놓는 지분 일부 인수하는 조건으로 설계권 달라고 하면, 아마 어렵지 않게 따올 수 있을걸요? 우리가 이제 구멍가게는 아니잖아요?”

“야, 거기 공사비만 1조가 넘는 사업장이야. 그걸 우리가 건드린다고?”

“공사비야 성수 전략정비도 1조 넘는 사업장이었잖아요?”

“그, 그렇긴 한데…….”

“일단 그림 좀 더 그려지면 다시 말씀드릴게요.”

놀랄 일이 아직도 또 남아 있었다는 사실에 경완은 앉은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고.

우진의 시선은 어느새 까만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을 향해 있었다.

‘서울에서 가장 높고 멋진 건물……. 그에 여기보다 더 적합한 프로젝트는 없지.’

우진의 머릿속에는 오랜만에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 있었다.

2020년이 넘어서야 완공됐던, 무려 500미터가 넘는 높이의 초고층 빌딩.

전생에서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으며 서울의 흉물이라고까지 불렸던 삼성동의 마천루는, 우진의 손에서 다시 태어날 것이었다.

우진은 기필코, 그렇게 만들어 보일 생각이었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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