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303화 (303/315)

303화

돌아오다

1년이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세계 곳곳을 다 돌아본 뒤에도, 충분한 시간 여유가 남아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우진은 마지막 행선지였던 미국에 꽤 오래 머물게 되었다.

물론 미국이라는 나라는 넓고 그만큼 우진이 보고 싶었던 유명한 건축물이 많기도 했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가장 오래 머물게 된 나라가 미국인 것이다.

그래서 우진은 고민했다.

미국 각 주에 있는 멋진 마천루들을 구경하러 다니는 것도 충분히 의미 있었지만, 그 외에 또 할 수 있는 일은 없을지에 대해서 말이다.

‘한국에서 할 수 없는 것. 지금 이 순간에만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좋겠지. 음……. 가능하면 미국에서 할 수 있는 거면 더 좋을 테고.’

그리고 이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우진은 미국에 별다른 연고가 없었고, 그래서 선택지도 심플했으니까.

‘LTK 본사는……. 당연히 맨해튼에 있겠지?’

만약 우진의 최종 거주지역이 유럽이었다면, 선택지는 훨씬 더 많았을 터였다.

스페인에는 브루노나 마테오 같은 최고의 인맥들이 있었으며, 그게 아니더라도 컨퍼런스 때 얻게 된 다양한 인맥과 연결고리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미국과 우진의 연결고리는 단 하나.

마곡 MICE 프로젝트의 시행사 LTK금융그룹 뿐이었다.

그래서 우진은 망설임 없이 LTK 한국지사에 먼저 전화를 걸었다.

당연히 외부에 알려진 번호로 전화한 것은 아니었다.

“여보세요.”

[아, 서 대표님! 하하, 어쩐 일이십니까. 잘 지내시지요?]

우진은 출국 직전까지도 마곡MICE 프로젝트를 직접 디렉팅하고 있었고.

때문에 몇몇 직원들과 꽤 친분이 있었다.

그들 중에는 MICE 단지 프로젝트 총괄 디렉터인 윤상진 상무도 있었는데, 우진이 전화를 건 곳이 바로 그의 개인번호였다.

“저야 당연히 잘 지내지요. 벌써 일 년 가까이 탱자탱자 놀고 있는걸요.”

[하하, 정말 부럽습니다. 저도 대표님처럼 안식년 한번 가져보고 싶네요.]

우진이 윤 상무에게 전화한 것은 우진과 친분이 있는 LTK 임직원 중 가장 직급이 높은 사람이 그여서 이기도 했지만, 다른 이유도 한 가지 더 있었다.

“그나저나 상무님, 지금은 한국이신가 보네요?”

[아, 그렇습니다. 조만간 출국 예정이기는 한데, 무슨 일이라도…….]

마곡 MICE 프로젝트는 LTK그룹 안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초대형 프로젝트였고.

그렇기 때문에 이 프로젝트를 한국에서 총괄하는 윤상진 상무는, 미국에 있는 LTK본사에도 자주 들락거리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우진이 알기로 윤상진은, LTK 본사에서도 십 년 이상 근무했던 엘리트 금융인이었다.

MICE 프로젝트를 잘 마무리하고 돌아간다면, 본사에서도 Director 직급을 달게 될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

그런 상진이라면 미국에도 인맥이 많을 수밖에 없을 것이었고 그래서 미국에 머물던 우진이 가장 먼저 연락해볼 만한 사람이었다.

“아, 별일은 아니고……. 지금 제가 미국에 있거든요.”

[오……! 미국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혹시 어느 주에 계시나요?]

상진에게 전화를 걸던 당시 우진이 머물던 곳은 캘리포니아주였지만, 일부러 조금 거짓말을 하였다.

“맨해튼에 있습니다.”

[오오! 정말입니까? 언제까지 머무시죠?]

“최소 보름 정돈 여기 있을 겁니다. 상무님께서 혹시 본사에 와계실까 해서 연락드렸던 건데……. 국제전화로 연결되더군요. 하하.”

윤상진 상무는 최소 한 달에 두 번 이상 미국행 비행기를 탄다.

그렇기에 보름이면 충분히 그가 한 번 정도는 미국에 올 시간.

그리고 우진의 예상은 맞았다.

[저, 내일모레 출국입니다, 대표님. 한 일 주일 출장입니다.]

“오! 정말입니까?”

[대표님만 시간 괜찮으시다면, 그 쯤 해서 커피 한잔하시겠습니까?]

“좋지요. 미국은 연고가 없어서, 꽤 쓸쓸하던 참이었거든요.”

[하하하, 오랜만에 대표님 뵙겠군요.]

한국에 있을 때 사적으로 친분이 있던 사이는 아니었지만, 본래 해외에서 자국민을 만날 기회가 생기면 더 반갑고 친근감이 느껴지는 법.

게다가 두 사람 모두 친화력이 좋은 편이었으니, 어렵지 않게 약속은 성사되었다.

[저희 본사는 월 스트리트 22번가에 있습니다.]

“오, 그렇군요.”

[인근에 괜찮은 커피숍이 있으니, 제가 구글 맵으로 찍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무님. 그럼 차주에 뵙겠습니다.”

[예 대표님!]

능력 있는 인물인 윤상진과의 친분이 두터워지는 것도 어떻게든 우진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이었지만, 우진의 목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윤 상무님 통해서 ALuna쪽과 연결이 가능하다면, 미국 디자인업계 인맥을 터볼 수 있을지도…….’

세계적으로 최고의 디자인 그룹 중 하나인 ALuna쪽 인맥들, 우진은 그게 가장 탐이 났던 것이다.

“자, 그럼 비행기 표부터 예약해 볼까…….”

하여 윤상진과의 전화를 끊은 우진은, 곧바로 맨해튼행 비행기 표를 끊고 숙소도 잡았다.

“잘하면 남은 시간을 정말 알차게 보낼 수 있을지도…….”

하지만 이때만 해도 우진은 알 수 없었다.

갑작스런 이 맨해튼행 결정이, 어떤 결과들을 불러오게 될지 말이다.

맨해튼에 도착한 우진은, 처음부터 예상외의 상황에 마주하게 되었으니까.

“대표님! 여깁니다.”

“하하, 상무님! 진짜 오랜만에 뵙네요. 거의 일 년 만이군요!”

월 스트리트에서 윤상진과 만난 바로 그날.

“그런데 혹시 여기 이분은…….”

“반갑습니다, 서우진 대표님. 저는 JK금융그룹에 근무하는 조진철이라고 합니다.”

“하하, 당황하셨지요? 이 친구가 하도 조르는 바람에…….”

ALuna쪽 인맥을 노리고(?) 맨해튼에 왔던 우진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다른 인맥들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이 근처에서 일하는 친군데, 저랑 상당히 오래된 친굽니다. 서우진 대표님 팬이라며 따라오면 안 되겠냐고 하도 조르는 바람에…….”

그리고 이렇게 시작된 만남이, 바로 또 다른 나비효과들의 시발점이었다.

* * *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듯, 윤상무의 친구라던 조진철 또한 JK금융그룹의 임원급 인사였다.

나이는 둘이 동갑인 듯 보였고, 그렇다면 조진철 또한 40대 중후반 정도라는 이야기.

‘이 나이에 국제 금융기업의 임원이라니…….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야.’

우진은 금융권에 대해 잘 모르지만, 금융업계가 그 어떤 업계 이상으로 경쟁이 치열하다는 정도는 들어 알고 있다.

하물며 월스트리트의 국제금융기업임에야.

경쟁상대가 전 세계의 수많은 엘리트들이라는 말이다.

“제 딸래미가, 사실 디자인 꿈나뭅니다.”

“따님 나이가……?”

“올해 고등학교 입학했죠.”

“하하. 디자인 공부 시작하기 딱 좋은 시기네요.”

“이미 중학생 때부터, 미술학원은 다니고 있었습니다. 하핫.”

조진철은 사실, 서우진이라는 사람을 알게 된 지 얼마 안 됐다고 했다.

한국에 더 오래 머무는 윤상진과 달리 조진철은 거의 십 년 이상 미국에 살고 있었고.

그러다 보니 우진이 한국에서 유명하다 해도 그에게는 딴 세상 얘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딸은 아니었다.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던 그의 딸은 언제부턴가 우진과 같은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며 노래를 불렀고.

그에 궁금해진 진철이 최근 우진에 대해 찾아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서우진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진철은 더욱 놀람을 금치 못했다.

디자인에 대해 문외한인 진철이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우진이 대학생 때 설립했다는 WJ 스튜디오라는 회사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알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진철은 업계를 불문하고 우진이라는 사람의 팬이 되었다.

상진이 우진과 함께 일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땐, 꼭 소개받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맨해튼에 있지만, 조만간 JK금융이 한국에 진출하게 되면 보금자리도 서울로 옮길 예정이었으니, 그때가 되면 충분히 실현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던 차에 이렇게 기회가 왔다.

“이렇게 얼굴에 금칠을 해주시니까, 좀 부끄럽고 그러네요. 하하.”

“금칠이라니요. 다 사실 아닙니까.”

상진의 추임새에, 진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맞습니다. 저희는 대표님 나이에, 취준생이었습니다. 하하하.”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상진과의 약속을 잡았던 우진은, 두 사람과 저녁에 이어 술자리까지 함께 하게 되었다.

커피만 한잔하려던 기존의 계획과는 상당히 달라졌지만, 세 사람 모두 무척이나 즐거운 시간이었다.

분야는 다를지언정 그들 모두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 만큼 깊이 있는 사람들이었고.

그런 깊이 있는 이야기들을 나누는 것을 다들 좋아하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럼 조 이사님은, 조만간 한국으로 들어오시는 겁니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요. 조만간이라기엔 아직 1년은 더 걸릴 테지만……. 제가 귀국을 원하기도 하고, 한국지사가 새로 생기면 임원진 한 명은 가야 할 테니까요.”

“아하. JK임원진 중에 이사님 말고는 한국인이 없나 보군요.”

“그렇습니다. 한인 선배가 한 분 계시기는 한데, 미국에서 나고 자라신 그분은 사실상 미국인이시지요.”

조진철의 설명에, 윤상진이 한마디 거들었다.

“그래서 이 친구는 잘하면, 한국지사 지사장으로 들어올 수도 있을 겁니다. 방금 말씀 들었듯, JK안에 이 친구 말고 딱히 할 만한 사람이 없거든요.”

“와……! 지사장이면 한국 기업으로 치면 사장급 아닙니까?”

“그렇지요.”

“하하, 사장급이라기엔 좀 민망합니다. 이제 처음 만들어지는 지사에 지사장이라 해 봐야, 규모가 그리 크지 않거든요.”

그래서 밤늦게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던 술자리에서는, 이런 얘기도 나왔다.

“그나저나 서 대표님.”

“네, 조 이사님.”

“최근에는, 회사 일에서 아예 손을 떼고 계신 겁니까?”

“뭐, 그렇죠. 그 덕에 누군가 무진장 고생하고 있겠지만……. 하하. 이제 이런 생활도 한 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럼 9월 즈음에는 다시 회사로 복귀하시겠군요.”

“네, 그렇죠. 그런데 그건 왜……?”

우진의 사람됨과 건축디자인이라는 분야에 가지고 있는 깊이에 매료된 조진철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제안을 꺼낸 것이다.

“사실 지금 저희 본사에서, 여의도 금융가에 부지를 하나 매입해 뒀습니다.”

“사옥부지요?”

“그렇죠. 처음에는 임대를 생각했는데, 괜찮은 부지가 적당한 가격에 나와서 매입했거든요.”

“오, 그거 잘하셨네요. 여의도라면, 투자가치도 충분히 있을 겁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들은 우진은, 눈이 반짝이지 않을 수 없었다.

눈치 없는 사람이라도 이쯤 됐으면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알 만했으니, 눈치 백단인 우진이 모를 리 없는 것이다.

“혹시 차주에 시간 되신다면, 저희 본사에 한 번 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다음 순간, 우진은 꽤 놀랄 수밖에 없었다.

“본사에요?”

조진철은 우진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적극적이고 직접적으로 얘기했으니 말이다.

“가능하다면 저희 한국지사 사옥을, 서 대표님께서 설계해주셨으면 좋겠어서 말이지요.”

* * *

“그러니까 이게……. 그렇게 된 겁니다.”

우진의 설명을 쭉 들은 경완은, 어이없는 표정이 되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재수가 좋은 놈은 걷다가 자빠져도 금덩이를 줍는다더니…….”

“그거, 있는 속담입니까? 처음 들어보는데요.”

“내가 방금 만들었다.”

“그리고 재수가 좋다니요. 이게 다 제가 안식년 동안에도 저는 항상 회사 생각밖에 없었다는 방증 아니겠습니까.”

“얼어 죽을.”

우진은 아직 회사에 출근한 게 아니었다.

다만 집에서 쉬고 있던 우진에게 경완이 들이닥친(?) 것뿐.

기획실장으로부터 기가 막힌 전화를 받은 뒤 경완은 곧바로 우진에게 전화를 걸었고.

우진이 한국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경완이 다짜고짜 집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정확히는 우진이 사는 주상복합 아파트, 2층에 있는 맥주집이었다.

“그나저나, 이런 일이 있었으면 미리 귀띔을 줬어야지.”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연락이 이렇게 빨리 갈 줄 몰랐어요.”

“네가 조금만 더 빨리 알려줬어도, 우리 애들 개고생 안 했잖아.”

“무슨 개고생이요?”

“제안서 준비한다고 얼마나 피똥 싼 줄 알아?”

“그건 좀 죄송합니다……. 회사에서 준비 중인 줄 몰랐어요.”

“뭐?”

“그냥 그날 본사 찾아가서 조 이사님께 제 포트폴리오 보여드렸고, 그러다가 얼떨결에 일이 급 진전돼서 도장까지 찍게 된 거였거든요.”

“…….”

“그러니까 너무 뭐라 하지 마시죠, 이사님.”

너무 당황한 탓인지, 순간 말문이 막힌 경완.

결국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우진과 다시 눈이 마주친 경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후우……. 제가 대표님께 어찌 뭐라 하겠습니까.”

“다,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맥주가 들어가자 신나게 떠들기 시작하였다.

‘서우진이 이놈은, 복귀도 참 유별나게 한단 말이지.’

갑작스런 방문이었지만 우진이 한국에 들어온 뒤 처음 보는 것이었고.

오랜만에 만난 만큼 회포를 푸는 자리가 된 것이다.

JK금융그룹의 사옥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자, 소재는 다시 우진의 여행 이야기로 넘어갔다.

처음 홍콩으로 가게 됐던 이야기부터 무척이나 흥미진진한 우진의 여행 이야기.

하지만 우진의 여행 이야기를 듣던 경완은, 점점 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너……. 여행 다닌 거 맞냐?”

JK그룹 본사에 갔던 이야기만큼이나, 어이없는(?) 이야기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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