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302화 (302/315)

302화

돌아오다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어느 가을의 오후.

깡- 깡- 깡-

육안으로 끝이 쉬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널찍한 공사장에서는, 오늘도 쇳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하지만 공사장이라 해서 앙상한 뼈대들이 우뚝 솟아있으며 포크레인이 땅을 파고 있는 그런 건설현장은 아니었다.

이곳은 이미 완공 직전인 멋들어진 고층 건물들이, 그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준공 직전의 공사장이었으니까.

현장의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한강 변을 따라 시원하게 이어진 녹빛 풍경.

그와 자연스레 이어진 아름다운 공원의 전경.

그 뒤에 우뚝 솟아있는 멋진 커튼월 마감의 건축물들은, 그 예쁜 풍경들과 어우러지며 감탄스런 광경을 연출해 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2015년 9월 1일 화요일.

강변북로 지하화 공사와 더불어 멋지게 건축된 성수 전략정비구역은, 준공까지 이제 정확히 일주일을 남겨두고 있었다.

“아니, 지금 날짜가 며칠인데 아직도 문주 마감 공사가 안 끝났어?”

“거기! 빨리빨리 안 움직여? 일정 못 맞추면 니들이 나 대신 옷 벗을 거야?!”

그래서 현장은 더욱 분주하였다.

워낙 거대한 건설현장이다 보니 마감 공사에 신경 쓸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고.

일주일밖에 남지 않은 준공기한을 맞추려면 조금이라도 더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으니 말이다.

“소장님, 손님 오셨습니다.”

“응? 누구?”

“WJ 스튜디오에 박경완 이사님이라고…….”

“아, 박 이사님! 들어오시라고 해.”

그리고 이 거대한 현장에서, WJ 스튜디오는 꽤 중요한 일을 맡고 있었다.

이 모든 건축설계를 담당한 설계사무소가 WJ 스튜디오였던 데다, 일부 내장공사까지도 WJ 스튜디오의 건설 파트에서 맡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성수 사업장은 워낙 사업 규모가 큰 탓에 여러 건설사가 동시에 들어와 있는 컨소시움 사업장이었고.

그래서 건설사 간의 조율 또한 WJ 스튜디오에서 전담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완공이 코앞으로 다가온 지금, WJ 스튜디오의 인력들은 바쁘게 뛰어다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셨습니까, 이사님.”

“하하, 소장님. 작업은 잘 돼 가십니까?”

“허허, 물론이지요. 조금 빠듯하기는 한데, 오늘까지 마감 작업은 다 끝낼 예정입니다.”

“하자 없게 잘 좀 부탁드립니다.”

“뭐, 일부 하자야 어쩔 수 없겠지만……. 최대한 빡시게 작업해 보겠슴다.”

그것이 이사씩이나 되는 경완이 현장에 직접 나와 있는 이유였다.

“이사님! 스케줄 점검 끝났습니다!”

“고생했다. 형욱이.”

“헤헤, 별말씀을요.”

“특별한 문제는 없는 것 같지?”

“그런 것 같습니다.”

“크, 여기 삽 뜬 게 엊그제 같은데…….”

“그러고 보면 사업장 크기에 비해서 진짜 빨리 지었네요.”

“그러게 말이다. 컨소라서 가능했겠지.”

지하주차장에 가설된 현장사무소에서 나온 경완은, 직속 부하직원인 형욱과 함께 단지를 둘러보며 걷기 시작하였다.

그에게 이 성수 사업장은 꽤 의미 있는 곳이었다.

처음 공사가 시작됐을 때는 시공사 중 하나인 천웅건설의 상무로서 착공 날을 함께했던 사업장이었는데, 이렇게 준공이 다가오는 이 시점에는 전체 사업을 총괄하는 디자인‧설계사인 WJ 스튜디오의 이사로 함께하게 됐으니 말이다.

이것은 업계에서 수십 년 구른다하여도, 결코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진짜 멋지게 지어졌네. 서우진이가 말했던 것처럼, 진짜 서울의 랜드 마크가 되겠어.’

서울시의 아파트는, 시의 도시계획 조례에 따라 최고층수가 35층으로 제한된다.

하지만 이 성수 전략정비구역은 ‘한강 르네상스 사업’의 일환으로 특례법에 따라 층수 제한이 50층까지 완화됐는데, 그 덕에 최고 49층으로 지어질 수 있었다.

게다가 2015년의 성수동은 고층 건물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돋보이는 건물이 될 수 있었던 것.

물론 외관 커튼월 룩 디자인에 우진의 패러매트릭 디자인기법이 적용되어, 서울 어디에도 없는 미래지향적인 비주얼을 가진 것도 크게 한몫했지만 말이다.

“크, 이사님.”

“왜?”

“여기 조합원들은 정말 좋겠습니다.”

“누구? 우리 대표님?”

“헉. 대표님 여기도 지분 있으세요?”

“그냥 있는 정도가 아닐걸? 펜트 한 채 받으시는 거로 아는데.”

“네……? 펜트하우스요?”

“그래. 그 펜트하우스.”

“와 씨, 저기 50층 펜트에 살면 어떤 기분일까…….”

“나도 안 살아봐서 모른다.”

형욱과 실없는 이야기를 하며 걸음을 옮기던 경완은, 문득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경완을 업무 지옥(?)으로 몰아 넣어두고는, 홀연히 사라져버린 괘씸한 한 사람.

‘그나저나 서우진이 이놈. 이제 올 때도 된 것 같은데…….’

지나고 보니 순식간에 지나간 1년이었지만, 그래도 우진이 괘씸한 건 마찬가지였다.

지난 1년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우진 없이 연말정산을 하면서 받았던 고통(?)은 상상 이상이었다.

‘진짜 어떻게 하면 일 년 동안 일을 이만큼이나 벌릴 수 있는 건지……. 정산하다 보니 신기할 정도였지.’

장점도 있었다.

우진 없이 한 해를 보내다 보니, 경완은 강제로 WJ 스튜디오라는 회사의 모든 일들을 빠삭하게 체득할 수 있었으니까.

그 과정은 천웅건설의 상무로 있을 때와는 또 다른 경험이었고, 그래서 성장할 수 있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도,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이제 한 보름 정도 남은 건가? 서우진 이 자식, 늦기만 해 봐.’

오랜만에 속으로 우진을 한 번 별러 준 경완은, 툴툴거리며 차에 올라탔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경완의 표정은 밝았다.

오전 내내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다닌 덕에 성수 사업장의 점검을 마칠 수 있었고.

해서 중요한 오후 일정까지 조금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으니까.

“야, 김형욱이.”

“옙, 이사님.”

“JK증권 미팅, 너도 따라오냐?”

“헤헤, 당연하죠. 제가 이사님 옆이 아니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럼 밥이나 먹고 움직이자.”

“예썰!”

성수 사업장은 WJ 타워에서 차로 오 분 거리였고, 그래서 일단 본사로 돌아온 두 사람은 수제비 칼국수 집에 들어와 앉았다.

WJ 타워에 입점한 음식점들 중, 경완이 가장 좋아하는 가게.

경완은 이곳이 우진의 어머니가 영업하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딱히 그 때문에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경완의 아재 취향을 수제비 칼국수가 완벽히 저격했을 뿐이었다.

“크으……! 이 맛이지.”

얼큰한 국물까지 싹싹 긁어먹자 경완은 한층 만족스런 표정이 되었다.

미팅은 네 시였고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아있었으니, 천천히 프로젝트나 점검하며 카페에서 커피 한잔하면 딱이라고 생각했다.

‘크음. 그나저나 오늘 미팅은 중요한데……. 이런 큰 건 하나 따 놔야 서우진이 왔을 때 생색 크게 내지.’

오늘 미팅 건은, 국제 금융회사인 JK증권의 한국지사 사옥 건설 건이었다.

사업장 규모가 엄청 크지는 않지만, 여의도 증권가의 금싸라기 부지였고, 그래서 남는 것도 많은 알짜배기 프로젝트.

‘금융권 놈들, 겁나 까다롭게 굴 텐데…….’

남은 깍두기 하나를 집어 먹으며 이런 생각을 하던 경완은, 문득 스마트 폰을 꺼내 들었다.

미팅에 가기 전에 기획팀으로부터, 확인받아야 할 부분이 하나 있었으니 말이다.

툭-

하지만 스마트폰을 집어 든 경완은, 순간 당황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지이잉-!

그가 집어 든 순간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진동하기 시작했고…….

“뭐야? 기가 막히는 타이밍이네.”

마침 전화를 걸어 온 사람은, 그가 전화하려 했던 기획실 실장이었으니 말이다.

“어, 영준 씨. 그렇잖아도 전화하려 했는데.”

[아,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니, 이따가 JK증권 미팅이잖아.”

[네, 이사님.]

“그래서 요청할 자료가 좀 있어가지고, 준비해 놓으라고 하려 했지. 나 형욱이랑 지금 올라가거든.”

하지만 더욱 기가 막히는 일은, 다음 순간 벌어졌다.

[아, 이사님. JK미팅 관련 자료라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수화기 너머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사실 제가 전화 드린 이유가, JK증권 미팅 취소된 것 때문이었거든요.]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취소라니?”

[방금 전에 담당자한테 연락이 왔어요.]

“뭐라고?”

[본사에서 업체 선정 이미 끝났다고, 프로젝트 미팅 전부 철회하라고 했다던데요?]

그리고 경완은 격분(?)하기 시작하였다.

“뭐? 이런 십팔 색…… 크레파스 같은 놈들이 다 있어?!”

[아니, 이사님. 잠깐 진정 좀 하시고…….]

“아니, 진정하게 생겼어? 그거 프로젝트 때문에, 어? 설계팀 어제까지 야근하고, 어?”

[그러니까 이게…….]

“아오, 오랜만에 열불 나네. 이럴 거였으면 최소 미팅 일주일 전에는 알려주던가!”

기획실장은 뭔가 얘기하려 했지만, 흥분한 경완의 목소리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잠시 후.

[다 화내신 거죠……?]

“아니, 담당자 번호 좀 줘봐. 내가 전화해서 따지기라도 해야겠으니까.”

[…….]

“걱정 하지 마. 내가 설마 욕을 하겠냐?”

[그럼 뭐라고 따지실 건데요?]

“준비한 거 억울하잖아. 디자인 설계 피라도 받아 내야지.”

[음…….]

“이 양아치 쉐키들, 국제 증권사라는 놈들이, 고 푼돈 쓰기 싫어서 미팅 직전에 프로젝트를 파토 내?”

드디어 흥분이 좀 가라앉은 경완을 향해, 기획실장의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일단,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왜?”

[디자인 피는 어차피 받을 테니까요.]

“뭐? 그놈들이 그렇게 양심적인 놈들이라고?”

[아니, 양심적인 건 모르겠고, 당연히 줘야 하는 겁니다.]

“그치. 당연히 줘야 하는 거긴 한데…….”

[그 본사에서 선정했다는 업체가, 저희니까요.]

“뭐…… 라고?”

기획실장의 이야기에, 경완은 순간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일단 이 상황 전개 자체가 한 치 앞이 예측 불가능한 반전에 반전이었으며, 그와 동시에 경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아니,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이야?’

JK금융그룹의 본사는 미국에 있다.

게다가 한국에 지사를 내는 것은 이번이 처음.

그러니까 WJ 스튜디오와는 전혀 연고가 없는 회사라는 말이다.

‘본사에서 우릴 선정했다고? 대체 왜?’

의문점은 또 있다.

분명히 기획실장은 ‘선정됐다’고 말했으며, 그렇다는 말은 이미 확정됐다는 소린데.

정작 선정된 WJ 스튜디오는 전화를 받고 그걸 안다는 게, 선후 관계가 절대로 성립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니지?”

그래서 경완은 다시 물을 수밖에 없었고, 그에 기획실장이 웃으며 대답했다.

[네, 물론입니다. 제가 이런 중요한 얘길 가지고 이사님께 장난치겠습니까?]

“그럼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예?]

“내가 승인을 아직 안 했는데, 어떻게 업체 선정이 끝났다고 연락이 올 수 있냐는 말이야.”

우진이 없는 지금, 프로젝트 진행에 대한 대부분의 결정권은 경완이 갖고 있었다.

물론 다른 이사진과의 협의가 있어야 하지만, 도장을 찍는 건 결국 경완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경완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이에 대한 답은 생각보다 간단한 것이었다.

[어, 그래서 저도 담당자한테 물어봤는데…….]

“그런데?”

[대표님이 직접 사인하셨대요.]

“뭐……라고?”

[저도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는데, 대표님 도장 찍혀 있더라고요.]

“……?”

[도급계약서 사본 팩스로 받았거든요.]

“아니 그게 무슨…….”

[심지어 뉴욕 본사에 가서 직접 사인하셨다고 하던데요?]

스마트폰을 귀에 대고 있던 경완은, 이제 아예 멍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런 그의 귓전으로, 계산대에 서 있던 직원의 조심스런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손님, 혹시 계산은…….”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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