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디자인과 선택
아침이 밝았다.
촤르륵-
블라인드를 말아 올리자, 창살 사이로 아침 햇살이 한가득 쏟아져 내린다.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우진은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홀짝였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WJ 타워의 대표실에서 맞는 아침.
하지만 우진의 눈 밑이 어두워 보이는 것은, 결코 기분 탓이 아닐 것이었다.
‘후우. 커피라도 마시니까 정신이 좀 드네.’
평소 같았더라면 기분 좋게 출근하여 모닝커피를 마실 시간이었지만, 오늘은 출근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퇴근한 적이 없을 뿐.
“휘유.”
탁 트인 서울숲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서 커피를 홀짝이던 우진은, 슬쩍 고개를 돌려 모니터를 다시 한번 응시하였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띠링-
우진의 모니터 위에, 작은 메시지가 한 줄 떠올랐다.
[전송되었습니다.]
방금 우진의 컴퓨터에서 전송된 파일은, 간밤에 완성한 <마곡 컨벤션센터 M-Tec> 프로젝트의 설계 공모 파일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길었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더없이 짧게 느껴졌던 이 밤.
간밤에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결국 모든 설계를 확정 짓고 공모 마감 전에 발송한 것이었다.
메시지를 확인한 우진의 표정은 꽤나 복잡 미묘했다.
다른 때 같았더라면 공모마감을 친 순간 긴장감이 확 풀리면서 뿌듯한 마음이 들었을 텐데, 이번에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나, 잘한 거겠지?’
지금 이 순간.
이번 프로젝트에 참가했던 WJ 스튜디오 직원들 중, 심란한 사람은 오직 우진 한 사람뿐일 것이었다.
골든 프린트는 오직 우진만의 숙제였으니까.
물론 어떤 방향으로든 그 숙제는 마무리되었고, 이제 더 이상 우진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결과가 나올 때까지, 고민을 완전히 털어낼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터였다.
똑똑-
우진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밤을 새고 퇴근하던 진태가 대표실 문을 두들기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어이, 대표님. 퇴근 안 하시나?”
“어, 나도 슬슬 가야지. 형은 지금 퇴근하는 거야?”
“응, 졸려 죽겠네. 운전했다가는 사고 날 것 같아서, 택시 타고 갈 거야.”
“그래, 조심해서 들어가.”
진태가 퇴근길로 나선 뒤, 우진도 퇴근하기 위해 컴퓨터를 끄고 자리를 정리하였다.
막상 퇴근한다는 생각을 하니, 다시 눈꺼풀이 뻑뻑해지는 기분이었다.
‘내일이 주말이라 다행이지…….’
철컥-
“실장님, 저 퇴근합니다.”
[네, 고생하셨습니다, 대표님. 주말 잘 쉬세요.]
“그럼 오늘 수고 좀 해주세요.”
내선전화를 들어 비서실에 전화를 남긴 우진은, 퇴근을 위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띵-!
그리고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
잠시 눈을 감은 그의 머릿속에는, 새벽에 민선에게서 들었던 한 마디가 떠오르고 있었다.
[세상에 완벽한 디자인은 없어요, 대표님.]
[다만 최선의 디자인이 있을 뿐이죠.]
‘디자인적 완성도’와 ‘기능적 편리’ 사이에서 고민하던 우진에게, 민선이 해주었던 이야기.
그것을 떠올린 우진은, 한층 더 홀가분해진 마음이 될 수 있었다.
* * *
또다시 시간은 빠르게 지났다.
13년 상반기 가장 커다란 프로젝트 중 하나였던 마곡 컨벤션센터 프로젝트의 마감이 끝난 뒤.
한 달이 넘는 시간이 또 훌쩍 지난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달라진 것은 많지 않았다.
워낙 스케일이 컸던 공모인 만큼, 7월이 다 지나가는 지금의 시점에도 아직 공모결과가 나오지 않았으니까.
원래 예정되어 있던 일정보다도 조금 더 지연된 상황이었지만, 우진은 조바심내지 않기로 했다.
최선을 다했으니 그에 맞는 결과를 기다릴 뿐.
사실 공모결과를 조바심내며 기다릴 정신이 있지도 않았다.
이제 어지간한 중견기업 수준으로 성장한 WJ 스튜디오에는, 마곡 프로젝트 말고도 많은 일들이 산재해 있었으니까.
7월의 셋째 주 월요일.
우진은 오늘 오랜만에, 반가운 사람과 점심을 함께하기로 하였다.
끼익-
“서 대표! 여기야, 여기!”
“엇, 누나!”
오늘 우진과 점심 약속이 있던 사람은, 최근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는 여배우 임수하.
“이야, 왜 이렇게 오랜만인 것 같지?”
“그야, 진짜로 오랜만이니까.”
“그런가? 우리 마지막에 본 게 언제야?”
“천년의 그대 뒤풀이 파티 때?”
“어? 진짜 그때 이후로 처음인가?”
“진짜 그때 이후로 처음임.”
“흐, 내가 좀 뜸하긴 했네.”
“그러니까 바쁜 척 좀 그만하라고, 누나. 아니, 척은 아니고 진짜 바쁜 건가?”
“뭐, 내가 바빠 봐야 서 대표님만 하겠어? 프흐흐.”
하지만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친해진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하였다.
“뭐, 오랜만에 만나긴 했지만, 누나 근황은 딱히 물어보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응? 그건 무슨 말이야?”
“요즘 임수하 씨 근황, 모르면 간첩 아니야?”
“에이. 그 정돈 아니다.”
“<한남동 로맨스> 요즘, <천년의 그대> 이후로 제일 핫한 영상 컨텐츠던데?”
“히히. 작품이 좀 잘 되긴 했지.”
“직원들 중에서도 안 본 사람이 없더라고, 진짜.”
우진의 전생에서도 ‘임수하’ 라는 배우를 국민배우로 만들어줬던, 천만 관객의 영화 <한남동 로맨스>.
그 <한남동 로맨스>는 우진이 한창 마곡 프로젝트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5, 6월에 개봉하였고.
7월이 된 지금, 우진이 알던 대로 초대박을 터뜨린 상태였다.
물론 우진의 전생과 달라진 부분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바뀐 미래만 놓고 보면, 꽤 크게 바뀌었다고 표현하는 게 맞았다.
‘나 때문에 미래가 바뀌어서, 누나가 피해 보는 건 아닌지 걱정했을 정도였으니까.’
우진의 기억에 원래 한남동 로맨스는, 2012년에 개봉했어야 하는 작품이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연말부터 개봉 일정이 계속해서 밀렸고, 그래서 거의 8개월이나 지난 시점에 이렇게 개봉하게 됐다.
개봉 일정만 늦어진 것이 아니다.
꽤 중요한 역할을 하던 조연 두 사람도 우진의 기억과 다른 배우가 맡게 되었고.
그래서 우진은 속으로 많이 걱정했었다.
물론 지금에 와서 그 걱정은, 한낱 기우에 불과했던 것으로 판명 났지만 말이다.
‘내가 무슨 나비효과를 일으켰든, 결국 될 사람은 되고 갈 작품은 가는 거지.’
어쨌든 그런 비하인드 스토리를 뒤로 하고.
오늘 우진이 이렇게나 바쁜 수하를 만나러 온 이유는 단순히 사적인 이유 때문만이 아니었다.
<한남동 로맨스>가 터지면서 본격적으로 탑 티어 배우가 되어가는 임수하.
오늘 우진은 이 임수하라는 최고의 지인 찬스를 한 번 쓰기 위해 나온 것이었으니까.
두 사람이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음식은 전부 나왔고, 그것을 한 숟갈씩 뜨면서도 둘의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그나저나 서 대표.”
“응?”
“너, 누나한테 부탁할 거 있다며?”
“아하, 있지.”
“뭔데? 딴 얘기 하다가 까먹을 뻔했네.”
“걱정 마. 누나가 까먹었어도 난 안 까먹었을 테니까.”
지금 WJ 스튜디오는, 두 가지 중요한 일정을 앞두고 있었다.
하나는 우진이 컨트롤할 수 없는 일정인 <마곡 컨벤션센터> 프로젝트의 공모 발표.
또 하나는 오늘 이곳에 오기 직전까지도 우진이 준비하고 있던 프로젝트인, <청담 아르코> 브랜드의 모델하우스 오픈.
그리고 우진이 임수하라는 지인 찬스를 쓰려는 프로젝트는, 당연히 후자였다.
조만간 론칭 될 WJ 스튜디오의 첫 번째 자체 브랜드인 이 아르코 브랜드의 홍보모델을, 최근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임수하에게 부탁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지금 시점, 수많은 대기업들에서 노리고 있는(?) 임수하라는 스타를 홍보모델로 데려오는 것은 우진이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인맥이라는 게 괜히 있는 건 아니었다.
일단 당사자인 수하가 우진과 가장 가까운 지인 중 한 사람이었던 데다, 그녀의 소속사 대표까지도 우진의 최측근이었으니 말이다.
“뭔데? 무슨 어려운 부탁을 하려고 이렇게까지 뜸을 들여?”
“뜸 들이는 거 아냐. 설명하려면 먼저 보여줄 게 좀 있어서.”
“응?”
“자, 여기. 일단 이것부터 한번 봐봐.”
우진이 수하에게 건넨 것은, 다름 아닌 <청담 아르코>의 홍보 브로셔(Brochure)였다.
지난 일 년 동안 다듬고 다듬어 완성된, ‘주거’라는 건축의 디자인에 대한 우진의 모든 정수가 담긴 두꺼운 브로셔.
마치 애장품으로 판매되는 양장본 도서처럼 고급스런 가죽으로 포장된 이 브로셔는, 무려 페이지 수만 10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자였다.
“와, 이건 또 뭐야? 나 책 알러지 있는 거 몰라?”
“아, 이 누나가 진짜. 그런 책 아냐.”
“뭔데?”
“이번에 내가 새로 론칭하는 주거 브랜드 브로셔야.”
“주거…… 브랜드?”
“일단 펼쳐보면 알 테니까, 조금이라도 읽고 나서 얘기하자고.”
그녀에게 브로셔를 넘긴 우진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수하의 표정을 살피기 시작하였다.
이 아르코 브랜드의 브로셔를 보는 잠재적 소비자(?)가 수하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워낙 최상류층을 타겟으로 하는 브랜드인 만큼 이 브로셔를 누군가에게 보여줄 때마다 기대되고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수하에게는 홍보모델을 제안하기까지 해야 했으니, 조금 더 긴장되는 것은 당연했다.
“청담 아르코……? 아파트야?”
“아파트라기보단 고급 타운 하우스?”
하지만 수하가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우진의 표정에 어려 있던 긴장은 금세 풀릴 수 있었다.
“응……? 청담동에 타운 하우스라고? 그게 돼?”
“운이 좋아서 엄청난 지주를 만날 수 있었지 뭐.”
첫 페이지에 그려진 조감도에 시선이 꽂힌 수하는, 멍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와……. 미쳤다. 대박……. 강남 한복판에 이런 집이 생긴다고?”
“흐흐, 그럼 내가 누나한테 거짓말 치겠어?”
그리고 잠시 후 수하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에, 우진은 피식하고 실소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그 한 마디가, 바로 우진이 가장 듣고 싶었던 한 마디였으니 말이다.
“나한테도 한 채 분양해 줘.”
“생각보다 비쌀걸?”
“나도 아마 네 생각보다 돈 잘 벌걸?”
“이제부터 고객을 모집할 생각이니까, 누나한테 한 채 분양해 주는 게 어렵지는 않은데…….”
“얼만데?”
“평수에 따라 다르지만, 누나가 지금 보고 있는 그 평수가 대충 40억?”
“켁.”
“평수는 70평대야. 어때 생각 있으십니까, 고객님?”
물론 지금의 수하에게는, 이 정도 가격대도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지만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과 부담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
“지인 할인. 뭐, 그런 건 없어?”
“일단 좀 더 보고 얘기하지? 이제 한 페이지 봤어, 한 페이지.”
“크흠. 알겠어. 구박하지 마.”
다시 조용해진 수하는 찬찬히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하였고, 우진은 두 눈을 빛내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