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디자인과 선택
“왜 그러세요, 대표님?”
민선의 목소리에, 우진이 화들짝 놀라며 반문했다.
“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순간적으로 사고가 정지돼 있었던 것.
“무슨 일 있어요?”
“아, 그냥 잠깐 뭐가 생각나서…….”
그녀의 말에 대답하는 와중에도, 우진의 두 눈은 여전히 도면 위에 꽂혀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민선도 살짝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마무리가 다 되어가야 하는 이 시점, 도면에 크리티컬한 결함이 있다면 그야말로 재앙이었으니까.
“도면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 아니죠?”
하지만 다시 평정을 찾은 우진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고, 그에 민선도 안심할 수 있었다.
“네, 그런 것 아닙니다.”
“휴우, 놀래라.”
“제 반응이 너무 격했나 보네요.”
“조금요……?”
“무튼……. 문제 있는 것 아니니, 작업하던 거 다시 진행해 주세요.”
“네, 대표님.”
민선의 시선이 다시 자신의 노트북 모니터로 옮겨가자, 우진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두 손을 도면 위에 짚었다.
우진의 시선이 닿아 있는 곳은, 도면의 일부분에 화려하다 못해 복잡하게 떠올라 있는 골든 프린트.
‘후우, 이번엔 또 뭘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 상황에, 우진은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기존 설계의 미진한 부분을 수정하기 위해 하루 꼬박 투자한 도면이었다.
그런데 이전에 떠올라 있던 금빛 선들이 사라지기는커녕, 그 몇 배는 될 법한 골든 프린트가 무자비하게 도면 위를 가득 채우고 있는 상황이라니.
‘이 정도면, 도면 조금 뜯어고친다고 해결될 수준이 아닐 것 같은데…….’
우진으로서는,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막연히 한숨만 쉬고 있을 수는 없다.
가만히 손 놓고 한숨을 쉬고 있기엔, 시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우진과 WJ 스튜디오 설계팀에게 남은 시간은, 이제 12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뭐가 문젤까? 찬찬히 뜯어보자.’
정신을 차린 우진은, 차분히 자리에 앉아 도면을 살피기 시작했다.
일단 2차 수정은 둘째 치고, 원인을 찾아야 했다.
수정 전의 도면도 꺼내어 놓고 함께 비교했다.
어쨌든 도면의 변경 이후에 골든 프린트가 대폭 증가했으니, 이 두 가지 도면을 비교하다 보면 결정적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터였다.
금빛 선들이 가장 많이 뒤엉켜있는 부분부터, 꼼꼼히 도면을 뜯어보기 시작하는 우진.
상황이 상황인 만큼 우진은 극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조용해진 대표실에는, 시곗바늘 움직이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째깍- 째깍-
‘북측 전시관 쪽은, 수정 이후에 확실히 골든 프린트도 정돈되었어. 그렇다는 말은, 수정 방향성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얘긴데…….’
지금 우진이 살피고 있는 D 섹터의 도면은, 대부분의 공간이 부대시설이 아닌 전시관으로 이뤄져 있는 평면이었다.
때문에 도면의 수정 방향성도 모든 구획이 비슷하게 진행되었으며.
그래서 만약 수정 방향성에 문제가 있었다면, 모든 공간이 전부 다 금빛으로 빛났어야 한다.
한데 지금 우진의 책상 위에 펼쳐져 있는 D 섹터의 평면도에서는, 금빛 선들이 우측 하단에 모여 있었다.
심지어 가장 많은 수정이 들어갔던 서쪽의 컨벤션 홀은, 한 올의 금선도 남지 않은 채 말끔하게 완성되어 있었고 말이다.
‘원인이 뭘까. 어떤 부분에 결함이…….’
우진은 가지고 있는 근거들을 토대로, 결함의 가능성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빠르게 일부 수정한 도면을 다시 출력해 보기도 하였으며, 문제 있어 보이는 공간을 따로 분리해 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다양한 시도를 하던 중, 우진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이럴 게 아니라, 모든 도면을 다 뽑아서 이어볼까? 문제가 D 섹터에만 있는 건 아닐 수도 있잖아?’
지금 이렇게 이 D 섹터의 도면만 가지고 씨름하다가 시간을 다 보냈는데, 남아있는 다른 도면에서 또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때는 정말 답도 없는 상황이 올 수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 일단 다 뽑아보자.’
우진은 곧바로 자신의 생각을 실행에 옮겼고, 프린터기에서는 열 장도 넘는 도면이 연이어 뽑혀 나왔다.
드르륵- 드르륵-
이어서 인쇄된 도면들을 돌돌 말아 허리춤에 낀 우진은, 대표실 문을 나섰다.
“음? 대표님 갑자기 어디 가요?”
“회의실 좀 다녀올게요.”
“벌써 다시 회의해요?”
“아, 그런 건 아니고, 도면을 한 자리에 펼칠 공간이 필요해서요.”
후다닥 회의실에 도착한 우진은, 가져온 도면을 전부 펼쳐 그 위에 깔았다.
무려 10만 제곱미터에 가까운 부지를 설계한 도면이었기에, 그리 크지 않은 축척으로 인쇄했음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회의실 테이블이 가득 찼다.
‘자, 그럼 이제 이어 붙여볼까…….’
도면을 하나하나 잇자, 평면도의 외곽선을 따라 은은한 금빛 선이 스며든다.
이렇게 말끔한 선이 외곽으로 스며드는 도면은, 결함 없이 완벽하게 완성된 도면.
하지만 역시 D 섹터의 도면은, 이어붙인 완성형 도면에서도 금빛 선들이 요동치고 있었다.
‘순서가 이렇게…….’
그렇게 총 열두 장의 도면을, 정교하게 이어붙인 우진.
모든 작업이 끝난 뒤 우진은 의자 위로 올라섰다.
커다란 평면을 한눈에 보기 위해서는, 좀 더 와이드한 시야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으니 말이다.
끼익-
하여 의자 위에 올라선 우진이, 도면을 내려다본 순간.
“……!”
뭔가를 발견한 우진의 두 눈이, 점점 크게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 * *
모든 공간은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작은 방부터 시작해서 커다란 광장까지.
인접한 모든 공간은 서로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주게 되고, 그 요소들이 하나하나 모여 공간에 생명력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우진은, 복잡하게 뒤엉킨 골든 프린트의 원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
모든 공간과 공간을 전부 이어붙이고 난 뒤에야, 그 관계성 속에서 부자연스러운 연결점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원인을 발견한 순간, 우진은 저도 모르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 하하.”
그 원인이라는 것은 우진이 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었으니 말이다.
‘마지막에 바꾼 광장 설계가 문제가 됐을 줄이야.’
방금 전까지의 긴장이 풀린 탓인지,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 우진.
우진의 표정은 무척이나 미묘하였다.
원인을 찾아낸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 해결방안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다시 복잡해졌으니 말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내가 의도한 결과인데…….’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지금 골든 프린트가 지적하는 설계의 결함은 우진도 알고 있던 부분이었다.
그러니까 공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설계 과정에서의 실수가 아닌,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결함이자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모순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
컨벤션센터의 전시장 정 가운데 설계된, 광장의 역할을 하는 중정(中庭).
이 공간의 태생 자체가, 컨벤션센터의 사용자 동선을 의도적으로 방해하는 것이었으니까.
우진은 바로 어제저녁, 민선과 나눴던 대화 내용을 떠올렸다.
[됐어요, 대표님. 정말 완벽한 것 같아요.]
[흐음. 그런가요?]
[이렇게 D 섹터와 H 섹터 사이의 중정이 사방으로 개방되면서 통로의 역할을 해 주면, 모든 동선이 순환되면서 깔끔하게 동선이 맞아떨어지거든요.]
[음…….]
[왜요? 대표님은 마음에 들지 않으세요?]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실 D 섹터와 E 섹터의 도면은, 이미 며칠 전에 픽스됐던 구역이었다.
완벽하다는 민선의 말처럼, 골든 프린트의 인정도 가장 먼저 받았던 도면.
하지만 그 완성됐던 도면이, 우진은 오늘 오전까지도 계속해서 아쉬웠었다.
기능적으로 문제없고 디자인적으로도 세련된 공간이었지만.
우진은 계속해서 한 가지가 아쉬웠던 것이다.
그래서 어제 우진은 민선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민선 씨.]
[네?]
[이곳 중정이야말로, 컨벤션센터의 모든 전시공간을 이어주는 핵심적인 공간이잖아요. 그렇죠?]
[그렇죠. 어떤 전시장을 지나든 이 공간을 꼭 거쳐서 가야 하니……. 전시 기획자의 의도에 따라 다양한 용도로 활용할 수 있는 재밌는 공간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는 지금, 조금 아쉽습니다.]
[그래서 아쉽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전시장을 방문한 모두가 필연적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 공간을, 이렇게 밋밋하게 마무리해야 된다는 게 아쉽습니다.]
[……!]
[방금 민선 씨도, 전시 기획자의 입장에서 다양한 용도로 활용할 수 있는 재밌는 공간이라고 하셨죠?]
[그, 그랬죠.]
[그렇기 때문에 저도 아쉬운 겁니다.]
[그게 무슨…….]
[이 공간을 설계한 디자이너로서, 이 매력적인 공간에 좀 더 메시지를 담고 싶은 거죠.]
우진이 민선에게 했던 이야기는 이런 것이었다.
이 컨벤션센터 전반을 아우르는 건축 디자인의 철학과 정수를, 모든 사용자가 경험할 수밖에 없는 이 공간의 특성을 이용해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겠다는 것.
[이 중정을 기점으로, 좌측 건물들과 우측 건물들의 디자인 컨셉이 상이하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지요? 좌측의 건축구조가 좀 더 전투적이고 공격적인 디자인 템포를 갖고 있다면, 우측 건축구조는 안락하고 편안한 공간을 표현했다는 것…….]
[당연하죠. 여러 번 설명하셨잖아요.]
[그럼 그런 디자인이 나온 이유도 혹시 알고 계세요?]
[음, 그건 모르겠네요.]
‘MICE단지’라는 공간은, 업무와 휴식 두 가지 역할을 해야 하는 공간이다.
기본적으로는 비즈니스를 위한 공간이지만, 한편으로는 ‘Work’와 ‘Break’가 공존해야 하는 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우진의 이번 컨벤션센터 디자인 컨셉은 바로 그러한 건축의 특징적인 부분에서 시작되었고, 그런 의미에서 컨벤션센터의 디자인 방향성은 두 가지로 나뉘게 되었다.
업무지구(Work)와 가까운 서쪽 구조물들의 디자인에 날카롭고 세련된 디자인 감성을 담았다면, 호텔건물(Break)과 가까운 동쪽 구조물들의 디자인에 부드럽고 편안한 감성을 담은 것이다.
우진은 이 컨벤션센터가 MICE 단지의 모든 건축물들과 조화를 이루기를 바랬기에 두 가지 감성을 전부 담은 건축을 디자인하였고.
그래서 두 가지 디자인 흐름이 만나는 컨벤션센터의 중앙에 위치한 이 중정은, 완전한 무색(無色)의 공간이 되어 있었다.
[아하. 그런 이유가…….]
그리고 우진은 바로 오늘의 디자인 회의에서, 이 중립적인 공간에, 마지막 한 가지 메시지를 담았다.
[모든 공간과 연결되는 이 공간을, 절반으로 단절시켜버리는 것은 어떨까요?]
[네? 단절이라고요?]
[의도적으로 동쪽 공간과 서쪽 공간의 동선을, 이 중정의 가운데에서 단절시켜버리는 겁니다.]
[……!]
[컨벤션센터 전체의 공간디자인 흐름은 날카로움에서 편안함으로 점진적으로 흘러가도록 설계되어 있지만, 이 중립의 공간에 의도적으로 ‘단절’을 표현함으로서 이 건축에 담겨있는 디자인적인 메시지를 사용자들에게 전달하는 거죠.]
이것은 어쩌면, 디자인적인 메시지의 전달을 위해 공간의 편리성을 의도적으로 제한하는 것.
하지만 우진은 디자인적 완성도와 건축의 구조적 편리성 사이에서 전자에 더 큰 비중을 두었고.
[재밌네요.]
그러한 우진의 이야기에, 민선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던 것이다.
[그럼 이제 사용자 동선만 해결하면 되겠네요.]
[중정의 크기를 조금 축소 시켜 외곽에 순환통로를 만들면 어떻습니까?]
[아하. 그러면 크게 불편하지 않겠어요.]
물론 기존에 뻥 뚫린 공간으로 두는 것보다, 사용자의 입장에서는 조금 불편해질 수밖에 없다.
원래대로라면 그대로 가로질러 이동하면 되는 공간을, 빙 둘러서 움직여야 하게 됐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약간의 ‘불편’ 자체에 디자인적 의도가 담겨있는 것이었고, 그래서 우진은 이 공간 때문에 골든 프린트가 뒤엉켰다고 생각지 않았었다.
건축 자체의 디자인적 완성도 만큼은, 이 변경설계가 훨씬 더 좋다고 우진은 확신했으니까.
그리고 골든 프린트는 언제나, 더 나은 디자인을 우진에게 제시해줬으니까.
그래서 우진은 지금 이 순간, 한 가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 공간이 내 디자인을 완성 시키는 가장 핵심적인 열쇠라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사족(蛇足)일까, 아니면 디자인을 완성 시키는 마스터 피스일까.
우진의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지기 시작하였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