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경쟁의 시작
우진은 골든 프린트의 비밀을 한 가지 알아내었지만, 그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할 뿐이었다.
온갖 정보들이 가득 숨겨진 ‘골든 프린트’라는 비밀의 방에, 이제야 겨우 열쇠를 구해 문을 열고 들어간 셈이랄까?
골든 프린트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았으니, 이제 그 안에 어떤 정보들이 숨겨있는지를 알아내야 할 차례.
그래서 우진은 또다시 골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골든 프린트와의 싸움은,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자신만의 싸움이었으니까.
‘도면 위에 떠 오르는 이 크고 작은 황금빛 사각형들이……. 대체 뭘 의미하는 걸까?’
지금 우진은 홀로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앞 커다란 회의실 탁자에는, 가로세로 1미터가 넘는 거대한 도면이 펼쳐져 있었다.
도면 위에 떠 오르는 골든 프린트를 조금이라도 자세히 보기 위해서는 크고 디테일한 평면도를 그릴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전지(全紙) 크기의 커다란 종이에 도면을 그려 올린 것이다.
이러한 우진의 시도는 분명히 효과가 있었다.
선명하지만 미세하게 떠올라 잘 보이지 않던 골든 프린트의 세세한 형태를, 전지 위에서는 대부분 확인이 가능했으니까.
‘문제는 형태를 봐도 대체 뭔지 짐작이 가질 않는다는 건데…….’
회의실 구석에는 두루마리처럼 말린 전지 크기의 도면이 수십 장 세워져 있었다.
엊그제 디자인 회의에서 나왔던 디자인 컨셉들을 적용하여, 우진이 직접 도면을 그리고 골든 프린트를 전부 다 띄워본 것.
당연하겠지만 도면마다 적용되는 골든 프린트의 형태는 제각기 다 다른 모양이었고.
그래서 우진은 그렸던 도면들 중, 가장 빼곡하게 골든 프린트가 떠오른 도면을 펼쳐놓고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것을 선택한 이유는 단순한 것이었다.
최대한 많은 금빛 선들을 보고 비교할 수 있는 도면이, 골든 프린트의 메시지를 찾아내기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요양원을 디자인했던 때처럼, 사람들의 동선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걸까? 아니면 사옥을 디자인할 때 봤던 빛의 흐름?’
온갖 추측과 함께 갖은 상상력을 동원하며, 골든 프린트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해석해 보는 우진.
그는 아침부터 지금까지 점심 식사도 거른 채 회의실에 박혀 있었고, 아무도 우진을 찾지 않았다.
이렇게 틀어박혀 도면과 디자인에 대한 고민을 할 때엔, 우진을 찾지 않도록 하는 게 비서실의 암묵적인 룰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오후 세 시쯤이 되었을까?
처음으로 누군가, 회의실의 문을 두들겼다.
똑똑똑-
그리고 갑자기 울려 퍼진 노크 소리에, 우진은 화들짝 놀랐다.
‘음?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누가 왔다는 사실 자체에 놀란 것은 아니다.
오늘 한 사람이 우진을 방문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니까.
다만 그녀와의 약속이 오후 세 시였는데, 워낙 골든 프린트를 분석하는 데 집중해 있다 보니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된 줄 몰랐을 뿐이었다.
멋쩍은 표정이 된 우진이, 회의실 문을 향해 입을 열었고.
“들어오세요.”
끼익-
높은 힐에 단아한 오피스룩을 입은 한 여성이 회의실 안쪽으로 들어왔다.
또각- 또각-
“회의실에서 혼자 뭐 하세요, 대표님?”
그녀의 물음에, 우진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뭐, 보다시피…….”
오늘 우진이 만나기로 한 여성은, 다름 아닌 윤민선.
석호의 소개로 알게 된 전시디자이너 윤민선이, 오늘 방문하기로 했던 유일한 손님이었다.
* * *
오늘 우진은 민선을 두 번째 만난다.
처음 석호와 함께 만났던 날을 제외하면 처음 만나는 날인 것.
그리고 그녀의 면면을 확인한 우진은 꽤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날 봤던 민선과 오늘의 민선은, 완전히 이미지가 달랐으니 말이다.
‘이렇게까지 미인이셨었나?’
편한 복장에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있던 민선도 충분히 청순한 이미지였지만, 완전히 작정하고(?) 꾸미고 나온 그녀의 모습은 또 달랐던 것.
하지만 달라진 그녀의 이미지로 인해 놀란 것도 잠깐이었을 뿐, 곧 우진은 다시 멋쩍은 표정이 되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민선에게 미안해서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작업을 하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된 줄 몰랐네요.”
사실 세 시에 그녀와의 약속 이전에는 대표실로 돌아가서 손님 맞을 준비를 하려 했었는데, 시간도 잊어버리고 회의실에 박혀 있었던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손님이 그가 있는 곳까지 찾아오게 만들었으니, 우진으로서는 미안한 게 당연한 것.
다행히 민선은 전혀 기분 나쁜 기색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괜찮아요. 오히려 이렇게 일하고 계신 모습으로 뵈니 더 좋은데요?”
“하하, 비서실에 미리 얘기는 해뒀는데, 뭔가 착오가 있었나 봐요.”
우진의 이야기에, 민선이 눈을 찡긋 하며 대답했다.
“제가 사실 좀 일찍 왔거든요.”
“네?”
“지금 이제 2시 50분쯤 됐을 걸요?”
“그 정도야…….”
“실장님께서 대표님 모셔온다는 걸 제가 말렸어요.”
“아하.”
“후훗, 어차피 저도 일 얘기 하러 온 거니까, 여기로 바로 오는 게 더 편하기도 하고요.”
말은 우진을 향해 하지만, 민선의 시선은 언제부턴가 탁자 위의 커다란 도면 위에 꽂혀 있었다.
오늘 그녀가 WJ 타워에 온 이유는, 우진이 설계에 대한 자문을 구했기 때문.
이것은 프리랜서 윤민선과 정식으로 체결된 외주계약이었고, 그래서 그녀는 말 그대로 ‘일’을 하기 위해 오늘 이 자리에 온 것이었다.
물론 도면에 시선이 꽂힌 이유는, 일을 하러 왔기 때문보다 순수한 흥미가 더 컸지만 말이다.
“저, 여기 앉으면 돼요?”
“편하신 대로요.”
두 사람이 잠시 대화를 나누는 사이, 비서실에서 커피를 한 잔씩 가지고 나왔다.
하여 우진도 잠시 머리를 식힐 겸, 그녀와 마주 앉아 커피를 홀짝이기 시작하였다.
물론 그 와중에도 도면은 바로 옆에 있었지만 말이다.
일상에 대한 가벼운 얘기가 잠시 오간 뒤, 먼저 일 얘기를 꺼낸 것은 민선이었다.
“그나저나 대표님께서는, 원래 이렇게 큰 종이에 도면작업을 하세요?”
눈을 반짝이는 그녀를 보며, 우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렇게 큰 면적의 설계를 진행해보는 건 처음이라, 전지에 대고 한 번 그려봤죠.”
전시 디자인에 한정한다면, 민선이 우진보다 훨씬 더 많은 경험과 포트폴리오를 가진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건축‧공간 설계라는 더 큰 카테고리를 놓고 본다면, 지금 시점에서 우진이 오히려 더 인지도 있는 디자이너.
그래서 민선은 우진의 새로운 작업방식(?)부터 시작하여 그가 그린 도면들까지도 배움의 자세로 보고 있었다.
“신선한 발상이예요. 저도 다음에 한 번 해봐야겠어요.”
“그, 그렇죠?”
“항상 같은 형식의 도면만 그리는 것보다 좀 더 다양한 시각을 가질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네요.”
고개를 주억거리며 턱을 만지작거리는 민선을 보며, 우진은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애써야 했다.
민선의 망상(?)과 달리 우진으로서는, 단지 골든 프린트의 비밀을 찾기 위해 커다란 도면을 사용했을 뿐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굳이 그녀의 이야기를 부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를 WJ 스튜디오에 스카웃하고 싶은 우진으로서는, 최대한 좋은 이미지를 심어줘야 했으니까.
두 사람이 그런 대화를 하는 사이 민선은 어느새 도면 앞에 다가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우진이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좀 어떤 것 같아요, 민선 씨?”
우진의 물음에, 민선이 웃으며 되물었다.
“뭐가요? 이 도면이요?”
“네.”
“어떤 대답을 원하세요?”
민선의 반문에, 이번에는 우진이 웃으며 말했다.
“있는 그대로를 원합니다. 그러려고 민선 씨를 모신 거니까요.”
“정말이죠?”
“물론입니다.”
우진의 이야기에 민선은 더욱 꼼꼼하게 도면을 관찰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10여 분 정도가 지났을 즈음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제가 이 도면을 보는 시점은 두 가지였어요.”
흥미로운 표정이 된 우진이 물었다.
“시점…… 이라면요?”
민선은 도면 한쪽에 손을 짚으며, 담백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하나는 건축설계 그 자체를 보는 평범한 디자이너로서의 시점.”
“……?”
“나머지 하나는, 당장 이 전시장에 전시를 기획‧디자인해야 하는, 실무자로서의 시점이에요.”
우진의 두 눈이 더욱 반짝였다.
그녀를 고용하면서 우진이 가장 원했던 부분.
‘역시 이해가 빠르네.’
민선은 이미, 우진이 가장 원하는 피드백을 줄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았으니 말이다.
“두 가지 시점에서의 감상을 다 들어볼 수 있을까요?”
“상처받지 마세요?”
“제 멘탈이 그 정도로 허약하진 않습니다. 하하.”
지금 회의실 탁자 위에 놓여있는 설계는, 우진의 베스트 설계가 아니다.
다만 여러 가지 중간과정 중 하나를 펼쳐놓은 것일 뿐.
그래서 우진이 보기에도 디자인적으로 완성도가 많이 떨어지는 설계였고, 그것에 대해 민선이 혹평을 한다 하더라도 딱히 상처받을 일은 없었다.
‘오히려 칭찬을 한다면 조금 실망할 지도…….’
그리고 민선은, 우진의 기대에 완벽히(?) 부응하였다.
“일단 평범한 디자이너로서 이 설계에 대한 말씀을 먼저 드리자면, 한 마디로 미완성 설계 같아요.”
“오호, 어째서 그렇죠?”
“평면 자체는 신선하고 공간에 대한 고민도 상당히 들어간 것 같은데…….”
민선이 도면의 군데군데를 짚으며 설명을 계속하였다.
“이런 부분들을 보면, 너무 컨셉에만 집착한 것 같거든요.”
“공간구획이 별로인가요?”
“아뇨. 동선이 문제에요.”
“아하.”
“이렇게 되면 A섹터와 C섹터의 진출입로가 겹치게 되는데, 좋은 설계는 아니라고 보여져요.”
민선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우진은 속으로 꽤 감탄 중이었다.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이 정도나 파악했다고?’
지금 탁자 위에 올려둔 도면이 그리 마음에 드는 도면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민선은 우진이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단점들까지 짧은 시간 내에 콕 콕 찝어 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역시 오늘 민선 씨를 모셔오길 잘했네요.”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요.”
“그럼 이번에는 실무자의 시점에서도 한 번 들어볼 수 있을까요?”
“좋아요.”
처음부터 꽤 날카로운 지적들을 했던 민선은, 실무자의 시점에서 한층 더 강도 높은 비판을 하였다.
“모터쇼에서 이런 공간들은 아예 죽은 공간이나 다름없어요, 대표님.”
“음, 어째서 그렇죠? 최소 세 대 정도는 전시 가능한 공간으로 보이는데요.”
“이쪽에 단차가 있는 것 맞죠?”
“아……?”
“차량 진입이 아예 불가능한 구조예요.”
“오호, 그런 부분은 생각 못 했는데…….”
“해서 이쪽 섹터는, 완전히 설계를 다시 해야 할 수준이예요.”
처음 우진이 펼쳐놓았던 도면 위에서, 민선의 이야기는 거의 20분도 넘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전부 끝났을 때, 우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확실히 실무자라 보는 눈이 다르네. 아니, 그냥 민선 씨 실력이 뛰어난 건가?’
우진이 탁자 위의 도면을 둘둘 말아 구석에 치우자, 자연스레 그곳에 둘둘 말려 세워져 있던 다른 도면들이 민선의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발견한 민선의 두 눈이 휘둥그레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고 할수 있었다.
“헉……. 설마 저게 다 도면은…… 아니겠죠?”
우진이 웃었다.
“하하, 왜 아니겠습니까.”
민선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재차 물었다.
“공고 난지 일주일쯤 된 것 아닌가요?”
“맞습니다.”
“그런데 그 일주일 만에 도면을 이렇게 많이 그리셨다고요?”
“생각해보니 잠을 별로 안 잔 것 같군요.”
“대박…….”
우진이 반쯤 농담조로 민선을 향해 물었다.
“오늘 이거 다 피드백 주시기 전에 못 가시는데……. 괜찮죠?”
민선도 웃으며 답했다.
“뭐, 각오는 하고 왔어요. 통장에 찍힌 돈이 제법 많더라고요. 흐흐.”
회의실 벽으로 간 우진은, 민선에게 보여줄 다음 도면을 천천히 골랐다.
‘골든 프린트가 가장 많이 떠 있어서 그 도면을 먼저 보여주긴 했는데……. 역시나 그리 좋은 도면은 아니었던 것 같군.’
처음 펼쳐져 있던 도면과 민선의 피드백을 떠올리며, 다음으로 어떤 도면을 펼쳐놓을지 고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던 도중, 우진의 머릿속에 한 장의 도면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이걸 펼쳐볼까?’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제법 깔끔하게 뽑혔다고 생각했던 도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든 프린트의 환영은 가장 조금 발생했던 도면.
우진은 일부러 처음 보여줬던 도면과 스타일이 완전히 다른 도면을 펼쳐 보였고.
촤르륵-
그 앞에 다가간 민선은 이번에도 찬찬히 설계를 관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다시 십여 분 정도가 지났을 때.
민선의 입에서 가장 처음 흘러나온 한 마디는, 바로 이것이었다.
“대표님.”
“네?”
“이 도면……. 대박인데요?”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