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경쟁의 시작
영국의 자동차 디자이너 콜튼 테일러(Colton Taylor)는, 오늘 무척이나 중요한 미팅에 나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제운자동차 영국지사에서의 마지막 실무이자, 금년 9월 개최될 예정인 프랑크푸르트 모터쇼(IAA*[International Motor Show Germany]) 와 관련된 미팅.
제운자동차는 금년 처음 선보이게 될 신형 세단을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모터쇼 중 한 곳인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공개할 예정이었는데, 덕분에 당해 모터쇼에서 꽤 괜찮은 부스를 할당받을 수 있었다.
하여 콜튼의 오늘 미팅은, 해당 부스의 디자인과 관련된 것이었다.
제운자동차는 독일 현지에서 가장 뛰어난 전시디자이너 한 사람을 섭외하여 부스 디자인을 주문하였고, 제운자동차의 최고 수석 디자이너인 콜튼이 그와 함께 디자인 조율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
모터쇼 중 가장 권위 있는 행사가 IAA인 만큼 제운자동차 본사에서도 이번 프로젝트에 무척이나 신경 쓰고 있었으며.
그래서 콜튼을 한국으로 다시 불러들이기 전, 유럽에서 이번 프로젝트까지 그에게 맡긴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임원급인 콜튼이 직접 미팅자리에까지 나온 데에는,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지만 말이다.
“수고했네, 데미안(Demian). 덕분에 디자인은 아주 잘 뽑힌 것 같아.”
“별말씀을. 이렇게까지 가이드를 해 주는데 디자인 못 뽑아내면, 내가 은퇴할 때가 된 거지.”
“하하, 그래도 부스 아이디어 자체는 대부분 자네 머릿속에서 나온 것 아닌가?”
“이 일만 이십 년째야, 콜튼. 내가 너만큼 벌진 못하지만, 그래도 나름 이 바닥에선 알아준다고.”
이번 모터쇼에서 제운자동차의 부스를 디자인한 디자이너는, 콜튼의 오랜 지기이자 유명한 전시디자이너 데미안 군터(Demian Gunth).
본사에 디자이너를 추천한 사람도 콜튼이었으니, 이번 프로젝트까지 책임지고 관리하게 된 것이다.
콜튼은 영국인이었고 데미안은 독일인이었지만, 두 사람은 벌써 십년지기였다.
그들은 콜튼이 재규어 랜드로버에서 디자이너로 일할 당시, 재규어 브랜드의 단독전시장 디자인을 데미안이 맡게 되면서 알게 된 사이였다.
“그래도 컨셉 픽스가 나고 나니, 마음이 꽤나 후련하구만.”
콜튼의 말에, 데미안이 웃으며 답했다.
“그나저나 이번 프로젝트는 왜 이렇게 급하게 준비하는 거야?”
“급하다니?”
“그렇잖아. IAA는 9월이나 돼야 오픈인데, 부스 디자인을 벌써부터 픽스하는 게 이해가 안 돼서.”
프랑크푸르트 모터쇼는, 매 홀수년 9월 마지막 주에 개최된다.
때문에 부스 디자인은, 8월 중에나 간신히 픽스되는 게 보통.
한데 5월 초에 불과한 지금 제운자동차의 부스디자인이 벌써 픽스되었으니, 업계에서 오래 일해온 데미안으로서는 그 이유가 궁금했던 것이다.
콜튼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뭐, 크게 중요한 이유가 있는 건 아냐.”
“이유가 있긴 있다는 소리네?”
“그렇지.”
“뭔데?”
“이 콜튼님이 6월에는 한국에 들어가야 하거든.”
“……?”
“사실 3월에 한국지사로 발령 났었는데, 이 일 때문에 아직 영국에 붙어있던 거니까.”
“응?”
“아마 지난 2개월 동안, 한국지사의 부사장 자리가 비어 있었을 걸?”
콜튼의 대답에 데미안이 혀를 내둘렀다.
제운자동차쯤 되는 대기업이 콜튼의 일정에 맞춰 플랜을 운영해 준다는 사실이, 대단하면서도 부럽게 느껴졌으니 말이다.
“크, 그 회사에서 어지간히 널 사랑하는군.”
“물론이지. 실적 좋은 직원을 천대하는 회사는 대기업이 될 수가 없거든.”
“쩝.”
“그리고 제운자동차는, 글로벌 대기업이지.”
어깨를 으쓱하며 커피를 홀짝이는 콜튼을 보며, 데미안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잘난 척을 빼면 시체인 사람이 콜튼이었지만, 신기하게도 밉지 않은 사람이 바로 그의 친구였다.
“어쨌든 이제 그럼 일 얘긴 이쯤 하기로 하고…….”
“좋아.”
비즈니스가 끝난 두 사람은, 탁자 위에 올려있던 서류들을 정리하여 가방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일이 끝났다 해서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지는 않았다.
국적이 다르고 일하는 나라가 다른 두 사람은 친한 친구임에도 불구하고 꽤 오랜만에 이렇게 만난 것이었고, 그래서 사적으로는 아직 용무가 많이 남아있었으니까.
특히나 수다가 많은 편인 콜튼은 이대로 데미안이 자리에서 일어난다면 두고두고 섭섭해할 게 분명한 위인이었다.
“여기 허니 브레드 하나 더 시킬까?”
데미안의 물음에, 콜튼이 손뼉을 짝 치며 대답했다.
“좋지. 휘핑크림 듬뿍 얹어서.”
업무 이야기를 끝낸 두 사람은, 사적인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었다.
서로의 자녀들까지도 친분이 있다 보니, 오랜만에 만나 할 이야기가 무궁무진했던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현역 일선에서 뛰고 있는 디자이너인 만큼 가장 큰 공통분모는 디자인이었고.
때문에 결국 이야기는 다시 디자인과 관련된 것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번 IAA말이야, 데미안.”
“IAA는 갑자기 또 왜? 일 얘기 끝난 거 아녔어?”
“오, 걱정 마. 일 얘긴 아니라고.”
“그럼?”
“갑자기 궁금한 게 생겨서 말이지.”
“궁금한 거?”
“내가 듣기로 이번 IAA가 역대급 규모로 기획됐다고 들었거든.”
데미안은 콜튼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랬지.”
“그래서 이번에 메세 프랑크푸르트(Frankfurt Main Messegelände)*[독일 헤센, 프랑크푸르트시 소재의 전시장으로, 100년이 넘은 유구한 역사와 30만제곱미터가 넘는 광활한 면적을 자랑하는 컨벤션센터이다.] 전시관 전체를 디자인 기획한 회사가 어딘지 궁금했어.”
일반적으로 전시기획과 디자인은, 하나의 디자인회사에서 전체를 맡아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프랑크푸르트 모터쇼같이 초대형 전시의 경우, 입점하는 회사가 원한다면 부스별로 개별 디자인이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제운자동차 부스의 그 개별 디자인을 맡은 사람이 바로 데미안이었다면.
콜튼이 궁금한 것은, 전체 전시장의 디자인을 맡은 메인 업체가 어디인가 하는 것.
콜튼의 질문을 들은 데미안이,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대답해 주었다.
“D&P에서 맡았어.”
하지만 대답을 들은 콜튼의 표정은, 대수로움과는 거리가 좀 있었다.
“응? Design and Partners?”
“거기, 맞아. 근데 왜? 문제 있어?”
“어……. 문제는 아니지만…….”
콜튼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사실 물어보기는 했어도 속으로 답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질문이라 생각했는데, 엉뚱한 회사의 이름이 튀어나왔으니 말이다.
‘뭐지? 블랙테일즈가 아니야?’
블랙테일즈는 유럽 전역에서 활동하는 유명한 건축사무소이자 전시 디자인 회사였다.
인지도로 따지자면 데미안이 이야기한 D&P라는 회사보다 훨씬 더 저명한 회사인 것.
콜튼은 블랙테일즈가 이번 IAA의 전시설계에 입찰했다고 알고 있었으니, 어째서 D&P에게 기회가 돌아갔는지 의문스러운 게 당연했다.
그런 콜튼의 설명을 들은 데미안이,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하. 그래서 놀란 거였군.”
“정말 D&P가 블랙테일즈를 이긴 거야?”
재차 묻는 콜튼을 보며 데미안이 다시 한번 웃었다.
“그럴 리가. D&P도 실력이 있긴 하지만, 블랙테일즈를 이기는 건 쉽지 않지.”
“그럼?”
“블랙테일즈에서 입찰을 포기한 거로 알아.”
“응? IAA의 입찰을 포기했다고?”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듣기로는 여력이 안 되는 모양이더라고.”
“오호?”
“엄청나게 큰 설계 건을 하나 준비하고 있는 모양이야.”
데미안의 설명을 들은 콜튼이, 그제야 고개를 주억거리며 수긍하였다.
그런 이유 때문이라면, 입찰 포기가 얼마든지 가능했으니까.
“건축설계건 인가 보지?”
“나도 자세히는 모르는데, 그렇게 들었어.”
만약 블랙테일즈가 단순히 전시 디자인만 취급하는 회사라면, IAA보다 더 큰 일거리를 받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다른 종류의 전시보다 규모가 큰 ‘모터쇼’라는 카테고리 안에서도, 가장 인지도 높고 많은 자본이 투입되는 전시가 바로 IAA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건축으로 넘어간다면 얘기는 달랐다.
어지간한 규모의 건물만 되어도, 전시설계보다는 건축설계의 규모가 더 클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도 IAA를 포기하고 입찰한 다른 설계가 있다니……. 그게 어딘지는 좀 궁금한데?’
만약 블랙테일즈가 IAA의 기획설계를 맡았더라면, 콜튼은 데미안에게 연결을 좀 부탁하려고 했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최초 공개될 제운자동차의 신모델은 모터쇼가 끝난 직후 곧바로 한국에서 2차 공개될 예정이었는데.
그 때문에 블랙테일즈 쪽에 의뢰를 넣어볼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의뢰할 게 있다면, 팀장급 이상으로 직통 연락처를 알아봐 줄 수 있어.”
“오, 데미안. 그렇게까지는 필요 없어. 어차피 블랙테일즈가 지금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게 아니라면, 내가 다른 경로로 연락을 넣어도 되니까.”
그래서 데미안과의 미팅이 끝난 뒤.
영국으로 돌아오는 공항 대기실에서, 콜튼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띠리리링-
이어서 콜튼의 입에서는, 유창한 한국어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였다.
“여보세요? 저 콜튼입니다.”
[네, 부사장님. 말씀하세요.]
“D-X 프로젝트 때문에 알아봐야 할 일이 좀 있는데요.”
[넵.]
“설계사무소 중에 ‘블랙테일즈’라는 업체 아시죠? 재작년 킨텍스 모터쇼 전시기획 했던?”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부사장님.]
“이번 프로젝트를 그쪽에 견적 요청 한번 넣어볼까 하는데, 연락처가 좀 필요해서요.”
[부사장님께서 직접이요?]
“네. 그러려고 했는데요?”
통화하는 사이 출국 수속이 끝났고, 콜튼은 게이트를 향해 걸어가며 통화를 계속하였다.
[음, 그러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부사장님. 제가 직접 연락 넣어보겠습니다.]
“오, 미스터 킴이요?”
[넵. 킨텍스 때도 제가 직접 발주 넣었었거든요.]
“오케이, 그럼 부탁 좀 드릴게요.”
[만약 그쪽에서 하겠다고 한다면, 계약서 발송하기 전에 컨펌 요청 드리겠습니다.]
“좋아요.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전 이제 비행기 타야 하니, 메시지로 남겨 주세요.”
[알겠습니다, 부사장님.]
콜튼이 독일에서의 모든 업무를 마치고 비행기에 탑승할 즈음, 사위에는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해서 전화를 끊은 콜튼은, 스마트폰을 비행 모드로 전환하고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
‘흠. 이제 영국에 돌아가면, 슬슬 한국으로 들어갈 준비를 해야겠어.’
한국을 떠올리자 자연스레 그곳에서 고생(?) 중인 아들내미의 얼굴이 떠올랐다.
‘제이든은 잘 있으려나.’
한국의 디자인 대학에 입학했다고 한 것이 엊그제 같건만, 어느새 졸업반이라고 자랑하던 그의 아들 제이든.
하지만 콜튼의 아들 생각은 그리 오래 이어질 수 없었다.
비행기의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할 즈음, 안대를 낀 콜튼이 잠에 빠져들었으니 말이다.
쿠우우우웅-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이륙하는 비행기가 익숙한지, 소음과 별개로 순식간에 잠에 빠져드는 콜튼.
그런데 그가 이렇게 잠든 사이, 비행기 모드로 되어있는 그의 스마트폰으로 메시지가 하나 전송되었다.
[부사장님, 지난번에 저와 일했던 블랙테일즈 디자인팀장이, 지금 한국에 들어와 있다고 합니다. 마곡 컨벤션센터 설계 입찰 때문에 들어왔다더군요. 차주에 저도 귀국할 예정이니, 오프라인으로 미팅 한 번 잡아보겠습니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