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경쟁의 시작
뜬금없는 민선의 이야기에, 우진은 당황한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대박이라고요?”
우진의 반문에 민선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네.”
우진은 반사적으로 다시 한번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대박이라는 거죠?”
민선에게 보여준 두 번째 도면이, 첫 번째 도면보다 나은 설계라는 것은 우진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디자인적으로나 조형적으로는 뭐가 더 낫다 이야기할 수 없으나, 적어도 ‘전시’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더 많은 고민을 하며 그린 도면이 두 번째 도면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냉정히 말해 이 도면도, 처음 펼쳐뒀던 도면에 비해 크게 낫지 않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더 못난 도면이다.
적어도 우진의 눈에는 그랬다.
“어떤 의미에서냐니요. 당연히 도면이 좋다는 얘기지요.”
“그러니까 그 이유를 여쭤보고 싶어서요.”
“아하.”
우진의 말에 민선은 고개를 끄덕였고, 차분히 도면을 짚으며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일단, 제가 대박이라고 말씀드렸던 건……. 전시기획 디자인을 담당하는 실무자의 시선에서 얘기한 거예요.”
우진은 가만히 경청했고, 민선의 말이 또박또박 이어졌다.
“그러니까 실무자의 입장에서 이 전시장에 전시 디자인을 해야 한다고 했을 때……. 불편한 부분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요?”
“아……?”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실무자로서 선택지가 상당히 많은 도면이라는 거예요.”
“선택지라는 게 뭘까요?”
“공간구성에 대한 선택지요.”
민선의 손가락이 도면을 따라 흘러가기 시작하였다.
“지금 이 도면 위에는, 처음 보여주셨던 평면도보다 훨씬 더 많은 공간이 구획되어 있어요.”
“더 잘게 쪼개 놨으니까요?”
민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요. 처음 봤던 도면보다, 섹터가 거의 두 배 이상 많죠.”
아직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우진이 고개를 갸웃하였고, 민선이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물론 섹터가 쓸데없이 많은 건, 오히려 전시기획자에게 선택지를 줄이는 일이예요. 바둑판처럼 균일하게 공간만 쪼개둔다면, 그 자체로 재미없는 프레임이 되어버리니까요.”
도면을 가리키는 민선의 손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반면에 대표님께서 설계하신 이 도면을 보면, 같은 종류의 공간이 거의 보이지 않아요. 가장 평면이 비슷한 C섹터와 D섹터도, 결국 층고에서 상당한 차이가 나도록 설계되어 있고요. 공간감이 다르다는 거죠.”
우진은 감탄했다.
그녀에게 보여준 도면 안에는 입면도가 포함되어있지 않은데, 평면도와 개략적인 외관 러프스케치만 보고 공간감을 읽어낸 것이었으니 말이다.
탁월한 공간지각능력이 아니라면, 결코 불가능한 통찰력.
‘전시 디자인이 아니라 그냥 건축을 하셨어도 잘하셨겠어.’
게다가 민선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했다.
그녀의 시선은 철저히 실무자의 그것이었고, 해서 그녀가 하는 이야기들은 우진에게 다양한 자극을 줄 수 있는 내용들을 담고 있었으니 말이다.
“제각기 다른 공간감을 가진 다양한 전시 섹터는, 저 같은 실무자의 입장에서 아주 매력적인 먹잇감이에요.”
“시도해볼 수 있는 공간연출 방식이 다양해지기 때문이겠군요.”
민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바로 그거죠. 전시디자이너가 요리사라면, 전시공간은 식재료 중 하나거든요.”
“재밌는 비유네요.”
“아무리 뛰어난 요리사라도, 단조로운 재료를 가지고 만들어낼 수 있는 요리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죠.”
민선의 설명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처음 이 설계가 대박이라고 말했던 것이 빈말은 아니었는지, 설명의 대부분이 공간구조에 대한 칭찬.
그래서 그녀의 이야기가 끝나갈 즈음, 우진은 이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민선 씨.”
“네, 대표님.”
“만약 민선 씨라면, 이 도면으로 공모에 입찰할 것 같나요?”
단도직입적인 우진의 질문에, 민선은 대답 대신 잠시 웃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반대로, 우진을 향해 되물었다.
“제가 그렇다고 하면, 대표님은 이 도면으로 입찰 넣으실 수 있겠어요?”
그녀의 반문에 우진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야 당연히…….”
그에 대한 대답은 정해져 있었으니까.
‘이 도면으로 입찰하면, 그대로 탈락이지 뭐.’
민선은 계속해서 칭찬을 거듭했고, 그 이야기들에 우진은 9할 이상 공감하였다.
그런데 대체 왜 우진은, 그대로 탈락이라고 생각했을까?
우진이 말을 멈춘 사이, 민선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제 생각에는 말이죠, 대표님.”
“말씀하세요.”
그녀는 잠시 도면을 훑어본 뒤 다시 우진과 눈을 마주쳤다.
“이 도면의 장점을 다 살린 채로, 대표님 마음에도 드는 도면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공모에서 충분히 당선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장점이라…….”
“정확히는 이 도면의 장점을 그대로 가지면서도, 처음 제게 보여주셨던 도면 이상의 조형성까지 살릴 수 있다면……. 최고의 전시공간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우진은 이제 머릿속이 좀 더 선명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민선과 대화를 나누기 전만 하더라도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엉켜있던 디자인 방향성이, 제법 명확하게 잡혔으니 말이다.
‘다양한 공간구조와 사용자의 편리성. 공간의 기능성과 동선 구조까지 최대한 살리면서도, 조형적인 아름다움까지 갖춘다면…….’
두 번째 도면이 우진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유는 간단했다.
기능성에 대한 고민을 최대한 했을지언정, 시각적인 아름다움과 조형성에서는 다소 밋밋한 구조였던 것이다.
오히려 외관이나 공간디자인의 스타일만 놓고 봤을 때는, 처음 민선이 혹평했던 도면이 훨씬 더 우진의 마음에 들었던 것.
‘결국에는 건축의 기본. 다양한 제약 속에서 최대한의 조형성과 디자인적 아름다움을 뽑아내는 게, 내가 해야 할 일이었네.’
사실 이러한 이야기는 우진이 말했듯 건축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우진이 기본적인 부분에 대해 명확히 떠올리지 못했던 것은, ‘컨벤션센터’라는 건축의 기능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설계 이전에 컨벤션센터에 대한 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경험하지 못하고 알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던 것.
기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니 어떠한 제약을 둬야 할지 모호했던 것이며.
어떤 제약이 필요한지 명확히 알지 못하다 보니, 디자인 방향성 차원에서 쉽게 갈피를 잡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우진의 앞에 있는 민선은, 우진이 부족한 부분을 가장 잘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우진이 아름다운 건축을 추구하기에 앞서 어떤 제약들에 대한 고민이 선결되어야 할지.
그 누구보다 꼼꼼히 체크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전시 디자인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디자이너 민선이었던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골든 프린트에 대한 고민도 일부나마 해결되었다.
아직 골든 프린트가 보여주는 메시지를 100퍼센트 이해하진 못 했을지언정, 방향성은 깨달을 수 있던 것이다.
‘아마 골든 프린트의 변화도 이 부분에 가장 밀접한 연관이 있었던 거겠지. 이번에 골든 프린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디자인의 아름다움이나 조형성에 대한 조언이 아니었어.’
공간의 기능성에서 비롯된 제약에 대한 이해가 선결되지 못한 상태에서, 골든 프린트에 대한 한 가지 오해가 중첩됐었다.
골든 프린트는 항상 나은 디자인과 기능에 대한 힌트를 보여준다는 오해.
이러한 오해를 가지고 있다 보니 지금까지와 상반되는 골든 프린트의 표현을 이해치 못하고 고생했던 것이다.
생각의 방향성이 달라지니, 다른 길이 보였다.
두 번째 도면도 다시 말아 세워 둔 우진은 다른 도면들도 민선에게 보여주었고, 그 과정속에서 골든 프린트의 메시지를 점점 더 명확하게 해석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여 그렇게 무려 네 시간 동안을 회의실에 있던 두 사람은, 퇴근 시간이 지나서야 이야기를 마칠 수 있었다.
“오늘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민선 씨.”
우진의 이야기에, 민선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고생은요, 무슨. 오랜만에 재밌었는데요.”
“하하, 그럼 다행입니다.”
“항상 크리에이터의 입장이었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도면을 가지고 분석하는 작업도 재밌네요.”
퇴근 시간이 지났기에, 우진도 대표실에서 곧바로 짐을 챙겼다.
두 사람은 같이 나왔고, 엘리베이터에서 민선이 물었다.
“대표님 배 안 고프세요?”
“음. 그러고 보니 배가 좀 고프긴 하네요.”
“뭐에요, 로봇도 아니고. 연료 떨어진 걸 누가 알려줘야 아는 거예요?”
“하하. 오늘 워낙 정신이 없었나 봅니다.”
낄낄거리며 웃은 민선이, 우진을 향해 다시 말했다.
“그럼, 밥 먹으러 가요.”
“네?”
“저녁 약속 따로 없으시면요. 밥이나 같이 먹자고요.”
“약속이야 없는데…….”
우진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민선과 저녁을 함께하기 싫은 것은 당연히 아니다.
다만 갑작스런 말에 조금 당황했을 뿐.
“밥, 제가 살게요.”
“민선 씨가요?”
“저 오늘 돈 벌었잖아요. 지난번에는 얻어먹기도 했고.”
“…….”
“서울숲역 쪽에 곱창집 맛있는데 하나 생겼대요. 혹시 곱창 싫어하세요?”
“아뇨, 좋아합니다만.”
“그럼 됐네. 거기로 가요.”
민선이 말을 마친 순간,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또각- 또각-
먼저 걸음을 옮겨 엘리베이터를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우진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참, 재밌는 캐릭터네, 이분도.’
사실 다음 미팅 때나 작업이 있을 땐, 우진이 먼저 식사를 제안하려 했었다.
그녀와 친해질수록 프로젝트의 결과물을 뽑는 것도 더 수월해질 것이었고, 무엇보다 앞으로도 쭉 함께 일하고 싶은 인재였으니까.
“걸어가게요?”
“가까워요. 차 가져가 봐야, 주차할 곳도 없고요.”
그래서 우진은 기꺼운 마음으로 그녀와 저녁 식사를 함께하였고, 유쾌한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었다.
“재밌었어요, 오늘.”
“하하, 저도 그렇습니다. 덕분에 맛있는 곱창도 얻어먹었고요.”
“다음 미팅은 다음 주 금요일이죠?”
“네, 민선 씨. 그때는 컨셉 설계 어느 정도 픽스해 두도록 하죠.”
“후훗, 기대할게요.”
민선이 돌아간 뒤, 집에 도착한 우진은 곧바로 따뜻한 물로 샤워부터 하였다.
쏴아아-
물줄기를 맞으며 생각을 정리하면, 복잡한 머리를 좀 식힐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방에 들어간 우진은, 또다시 노트를 펼쳤다.
‘까먹기 전에 아이디어는 정리해 둬야지.’
민선과의 미팅 과정에서 머릿속에 떠오른 공간에 대한 아이디어들을, 간단한 스케치로 남겨놓고 쉬려는 생각이었다.
‘이번 달 안에 설계 컨셉이나 구도는 무조건 픽스해야 해. 그래야 일정을 맞출 수 있어.’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5월은 금세 지나갔으며, 6월도 어느덧 마지막 주가 되었다.
본격적인 설계가 시작된 6월부터는, 민선도 거의 WJ 타워에 출근하다시피 했다.
공모가 마무리단계에 이르자, 논의해야 할 설계 디테일들이 거의 매일같이 발생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 속에서, 우진의 마곡 컨벤션센터 설계는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민선을 통해 알게 된, 전시장 공간의 수많은 기능‧편리에 대한 고찰과, 우진의 고심 속에서 만들어진 아름다운 공간감이 전부 담긴 만족스러운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공모 마감을 하루 남겨둔 시점, 우진에게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 고민이 남아있었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