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졸업반
3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하지만 그 3년이라는 시간을, 우진만큼 빠르게 보낸 사람도 드물 것이었다.
K대의 입학부터 시작해서 WJ 스튜디오라는 회사를 이만큼 키워내기까지.
우진은 정말 쉴 새 없이 달려왔으니까.
텅-
그래서 오랜만의 등굣길.
운전석에 앉은 우진은,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벌써 졸업반이라니…….’
3학년이 된 이후부터 우진은 다른 학생들의 절반도 등교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학교생활이 끝나간다는 생각이 들자, 문득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정신없이 달려오다 보니, 전생에 로망이었던 캠퍼스 라이프는 거의 즐기지도 못했으니 말이다.
‘돌이켜보면, 새내기 때부터 너무 조급하게 달려온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조금은 더 학창시절을 즐겼어도 됐을 텐데.’
물론 디자인학부 학생들에게 풋풋한 캠퍼스 라이프라는 건 사실 허상(?)과도 같은 것.
아마 착실히 학교에 다녀온 우진의 동기들이 그의 이런 생각을 알았더라면, 욕부터 한 바가지 쏟아내었을 터였다.
지금 우진의 삶이야말로, 거의 모든 과 동기들에게 로망과도 같은 것이니까.
다른 학생들에게는 우진의 이런 생각이, 단순히 배부른 소리로만 들릴지도 몰랐다.
부우웅-
우진이 등교하는 시간은 출근 시간이 조금 지난 10시경이었고, 그래서 도로는 비교적 한적했다.
하여 생각보다 학교에 일찍 도착한 우진은, 주차장에 차를 대 놓고 캠퍼스에 들어섰다.
오늘은 3월 4일 월요일.
새 학기 첫날이자 새내기들의 입학식이 있는 날이어서 그런지, 학교가 제법 붐볐다.
한껏 들뜬 얼굴로 등교하는 새내기들을 발견한 우진의 입에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렸다.
그들을 보고 있자니, 3년 전 이맘때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으니 말이다.
오리엔테이션을 다녀와 처음 등교를 했던 그 날의 설렘.
우진은 아직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좋을 때다, 좋을 때야.’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우진이 가장 처음 향한 곳은 학과장 윤치형 교수의 교수실이었다.
이제 본인의 유명세를 자각하고 있는 우진은 학생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해서 과 사무실까지 도착했고, 그를 맞아준 사람은 올해 새롭게 학과 조교가 된 08학번 선배였다.
그녀는 우진이 새내기 때, 3학년 졸업반 과 대표였었다.
“이야, 이게 누구야. 우진이 아냐?”
“혜영 선배, 조교해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히히. 대학원 등록금도 아낄 수 있고 좋지 뭐.”
“아, 잘됐네요, 선배.”
“조교 자리에 앉아있으니까 우리 과 샐럽 얼굴도 다 보고 이거 좋은데?”
“샐럽은 무슨요. 교수님 안에 계세요?”
“잠깐 학과회의 가셨는데, 이제 곧 오실 거야. 들어가 있어.”
“넵, 선배.”
“커피라도 한 잔 타줄까?”
“그렇게까지 해주실 필요는…….”
“아냐, 어차피 교수님 것도 타드려야 하고 나도 한 잔 먹으려고 했고.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어때?”
“좋죠. 감사합니다.”
혜영은 우진과 그렇게 친분이 있는 선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과대를 해서인지 후배들과 두루 친한 타입이었다.
그래서 그녀와 어색함 없이 반갑게 인사를 나눈 우진은, 학과장실 옆 접견실에 먼저 들어가 앉아있었다.
곧 혜영이 따뜻한 커피를 두 잔 내어왔고, 그것을 한 모금 정도 홀짝였을 때 윤치형 교수가 도착하였다.
“이야, 우리 우진이! 못 본 새에 더 훤칠해졌는데?”
우진을 발견한 윤치형 교수는, 치아까지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가장 아끼는 제자 중 한 사람을 오랜만에 만났으니,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없었다.
“교수님, 잘 지내셨죠?”
기분 좋게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푹신한 소파에 마주 앉았다.
학기 첫날에 우진이 학교에 온 이유는, 사실 수업 때문이 아니었다.
잠시 커피로 목을 축인 두 사람이, 곧 대화를 시작하였다.
* * *
두 사람이 이렇게 대면하는 것은 꽤 오랜만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대화는 일상적인 것들부터 시작되었다.
우진으로서는 치형으로부터 학과 일들을 듣는 것이 제법 재미있었고, 반대로 치형은 최근 우진에게 있었던 일들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으니 말이다.
“교수님, 요즘 기분 좋으시겠습니다?”
“왜?”
“선빈이한테 들었는데, 올해 S대 이겼다면서요?”
“이겨? 아……! 학과 선호도 순위?”
“네. 디자인과 준비하는 동생들도, 요즘은 S대보다 저희 학교 더 오고 싶어 한다고……. 하하.”
하지만 그런 대화들이 그렇게 오래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뭐 급한 일 있으시다더니. 이렇게 잡담만 떨어도 되는 거예요?”
우진이 오늘 학교에 온 가장 큰 이유는, 치형의 부름 때문이었으니까.
며칠 전 우진에게 전화를 건 치형이, 중요한 일이 있다며 시간을 좀 내어달라고 했던 것이다.
“아, 그렇지 않아도 이제 슬슬 얘기 꺼내려 했지.”
“무슨 일이세요?”
“일단 나한테 설명 듣기 전에…….”
“……?”
“혹시 우진이 너희 회사, 전시 디자인 쪽 포트폴리오도 좀 가지고 있냐?”
“네? 전시요?”
우진의 반문에 잠시 뜸을 들인 치형은, 대답 대신 옆 책장에 꽂혀 있던 파일 하나를 꺼내어 우진에게 건네었다.
“일단 이거부터 한번 읽어 봐라.”
그리고 그 파일 표지에는, <2017 국제 모터쇼>라는 글씨가 큼지막하게 붙어 있었다.
‘모터쇼……?’
우진은 석현이나 제이든만큼 차를 좋아하진 않는다.
하지만 어느 정도 차에 관심은 있었기에, <국제 모터쇼>라는 단어에 호기심이 동하기 시작했다.
‘2017 모터쇼라면……. 서울 모터쇼일 텐데.’
한국에서 열리는 가장 큰 모터쇼는 서울 모터쇼와 부산 모터쇼다.
그중 홀수 해에 열리는 모터쇼가 서울 모터쇼였으니, 연도만 봐도 우진이 짐작할 수 있었던 것.
기대 반 호기심 반이 된 우진은 천천히 파일을 넘겨 내용물을 읽기 시작하였으며.
윤치형 교수는 커피를 홀짝이며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파일의 첫 페이지를 넘긴 우진은, 순간 두 눈이 크게 확대되었다.
‘음……?’
전시 기획서의 첫 페이지부터, 전혀 예상치 못했던 내용을 발견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전시장소 : 마곡지구 M-TEC (Magok Trade Exhibition Center) 신설 전시장. (건축 예정)]
우진은 오랜만에 머릿속을 쥐어짜, 전생의 기억을 끄집어내 보았다.
‘서울 모터쇼가 킨텍스 아닌 곳에서 열린 적이 있었던가?’
우진의 전생에서 서울 모터쇼는, 사실 이름만 서울 모터쇼일 뿐 일산 킨텍스에서 열리던 일산 모터쇼였다.
물론 2000년대 초반까지는 코엑스에서 모터쇼가 개최됐었지만, 05년 이후로는 항상 일산에서 모터쇼가 개최됐으니까.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코엑스는 십 년 전에도 이미 전시공간이 포화상태였으며, 특히 모터쇼같이 넓은 면적이 필요한 전시를 하기에 협소한 편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국제 모터쇼를 개최하기에 인천, 김포 화물공항청사가 더 가까운 킨텍스가 여러모로 편했기 때문에, 05년에 킨텍스에서 개최한 이후로는 다시 코엑스로 돌아올 이유가 없었던 것.
그래서 우진은 킨텍스도 코엑스도 아닌 이 엠텍(M-Tec)이라는 마곡 전시장이 너무도 생소했다.
전생의 기억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서울 모터쇼를 마곡 전시장에서 개최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아무래도 우진의 회귀가 불러온 나비효과가, 점점 더 크게 미래의 흐름을 바꿔놓는 듯하였다.
‘재밌긴 한데……. 좀 무섭기도 하네.’
놀란 것과 별개로 더욱 흥미가 생긴 우진은, 파일을 꼼꼼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대체 이 기획안이 왜 윤치형 교수를 통해 들어왔는지.
또 윤치형 교수는 왜 이 기획안을 우진에게 보여주는 것인지.
궁금한 것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일단 이 파일 안의 내용들을 읽어보는 게 우선일 것이었다.
그리고 기획서에 담긴 내용들이 상당히 흥미로웠기 때문에, 우진은 술술 그것을 읽어 내려갔다.
[<서울 모터쇼>는 국제 전시 중에 가장 규모가 큰 전시 중 하나이다.]
[하여 그 이름에 걸맞게 서울 내에서 더욱 규모 있게 개최하여 국제적 인지도를 키우고자…….]
[COEX와 SETEC, AT 센터 등의 기존 서울시 내 전시장의 전시 수용량이 한계에 다다랐으므로…….]
[마곡 신도시의 지구 단위 개발 계획(특별계획 3구역)에 전시장 부지를 약 98000㎡만큼 할당하여, 포화상태인 서울 전시장의 수요를 분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윤치형이 건네준 기획 파일은, 도시계획 설계도까지 꽤 자세히 포함되어 있는 계획안이었다.
제목만 놓고 보면 2017 서울 모터쇼의 기획서였지만, 그 안에 마곡 엠텍(M-Tec) 컨벤션센터의 건축계획까지도 포함되어있는 문서였던 것이다.
하여 그 내용을 확인하던 우진은, 꽤 여러 번 놀라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 전시장의 규모에 가장 놀랐는데, 그 이유는 우진이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크기 때문이었다.
‘거의 10만 제곱미터잖아? 이 정도면 킨텍스랑 비교해도 안 좁은데?’
우진이 알기로 코엑스의 면적이 4만 제곱미터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서울 내 새로운 전시장을 기획한다기에 넓어도 5~6만 제곱미터를 넘지 않을 줄 알았는데, 10만 제곱미터가 넘는 부지가 할당되어 있으니 놀라는 게 당연한 것이다.
‘잘만 완성되면 진짜 멋지겠는데…….’
우진은 점점 더 기획서에 빨려 들어가듯 집중하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몇 초만 훑어봐도 흥미를 잃을 만큼 복잡한 사업계획서에 불과했지만.
개략적인 수치만 봐도 그림이 그려지는 우진의 입장에서는 이 기획서만큼 재밌는 문서도 없는 것이다.
기획안을 보는 우진은 어느새, 부지에 지어질 건축물을 상상하고 있었다.
[이렇게 신설될 마곡 엠텍(M-Tec)의 첫 번째 전시로 100만이 넘는 관광객의 모객이 가능한 서울 국제 모터쇼를 진행한다면, 새로운 컨벤션센터를 국제적으로 알리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에 13년 5월까지 설계안을 확정하고, 겨울이 되기 전에 착공 일자를 잡기로 한다.]
모든 기획안 전체를 정독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우진은 거의 30분이 넘는 시간 동안 파일을 읽어 내려갔다.
하여 마지막 페이지까지 전부 다 읽었을 때.
우진의 두 눈은 어느새 반짝이고 있었다.
슬슬 지루해지던 찰나 우진이 파일을 덮자, 치형이 기다렸다는 듯 우진을 향해 입을 떼었다.
“다 봤냐?”
“네, 다 봤습니다.”
우진은 다 식어버린 커피를 뒤늦게 한 모금 마셨다.
이어서 치형을 향해 궁금했던 것을 묻기 시작했다.
“이거, 어디서 난 겁니까, 교수님?”
“어디서 났냐니?”
“보니까 아직 공시도 안 뜬 대외비인 것 같아서요.”
“맞지.”
“교수님께서 관계자는 아니실 테니, 궁금해서 여쭤보는 겁니다.”
우진의 질문에 치형이 웃으며 설명하였다.
“우진이 너, 내 전문분야가 전시 디자인 쪽인 건 알고 있지?”
“네, 교수님.”
“내가 지금까지 참여한 전시설계가 얼마나 많겠냐.”
“…….”
“너도 잘 알겠지만, 업계 생각보다 안 넓다?”
“그렇……죠.”
“아마 지금쯤, 나 말고도 여기저기 기획서 받아봤을 거야.”
사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진은 긴가민가했다.
치형이 이 기획서를 자신에게 왜 보여줬는지.
그 진의를 정확히 알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기회를 한 번 줘보시려는 것 같은데…….’
그리고 우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우진과 눈이 마주친 치형이, 씨익 웃으며 다시 물었다.
“어때, 서우진.”
“네?”
“욕심 좀 나지?”
치형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점점 더 짙어지기 시작하였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