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269화 (269/315)

269화

비 온 뒤에는 땅이 굳는다.

우진의 <천년의 그대> 카메오 출연은, 사전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깜짝 출연이었다.

게다가 우진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최고조에 달해있던 시점에서의 출연.

때문에 실제로 우진이 얼굴을 비춘 것이 10분도 채 되지 않는 분량이었음에도, 방송이 끝나자마자 이에 대한 이야기로 커뮤니티들이 들썩거렸다.

물론 그 반응들 대부분이 우진에 대한 호감 표시와 칭찬이었다.

그래서 우진을 비롯한 <천년의 그대> 관계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만약 오늘 방영 전에 우진의 누명이 벗겨지지 않았더라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었을 테니 말이다.

└ 뭐야, 서우진이잖아?

└ ㅋㅋㅋ미친. 서우진이 아예 카메오로 출연했네?

└ WJ 스튜디오 PPL할 때부터 혹시나 하긴 했지만……. 진짜 직접 나올 줄이야.

└ 연기 개 어색해 ㅋㅋㅋㅋㅋ

└ 일반인이 이 정도면 훌륭하지 뭐. 오히려 생각보다 잘하는데?

└ 서우진 팬 1명 검거.

└ 예능인이라 그럼. 일부러 웃겨주려고 저렇게 연기하는 듯.

└ 그나저나 저거 WJ 타워에서 찍은 거지?

└ 그런 듯?

└ 저기 진짜 서우진 대표실인가봐. 대박.

└ 와 ㅈㄴ 멋있다. 저런 데서 일하면 무슨 기분일까?

방영이 끝난 뒤 사옥 로비에 앉아 인터넷 기사들을 검색해 보던 소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다행히 잘 끝났네.”

그러자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임수호 감독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대표님. 진짜 어제저녁까지만 해도……. 오늘 방영 나가고 어떻게 될지 계속 마음 졸이고 있었다니까요.”

만약 우진에 대한 여론이 회복되지 않은 채 오늘 방영이 되었더라면, 분명 네티즌들의 반응은 싸했을 것이다.

<천년의 그대> 드라마의 이미지 또한 적잖은 타격을 입었을 것이고 말이다.

물론 소정은 그러한 결과까지 감수할 생각으로 오늘의 방영을 강행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최상의 결과가 나온 것은 정말 다행인 일이었다.

한층 기분이 좋아진 소정이, 방긋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진짜 올해, 연초부터 다이나믹하네요. 그죠?”

소정의 얘기에, 임 감독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대표님. 설마 이런 결과까지 예상하시고 방영을 강행하셨던 겁니까?”

임 감독의 질문에 소정이 피식 웃었다.

아무리 우진에 대한 믿음이 대단하다 한들, 이번에는 그녀도 어쩔 수 없을 거라고 봤으니 말이다.

차후에 우진이 누명을 벗고 이미지를 회복하면, 그때 천년의 그대가 입은 피해도 같이 복구할 계획이었던 것.

하지만 임수호 감독에게 굳이 그런 이야기까지 할 필요는 없었기에, 소정은 적당히 둘러대었다.

“글쎄요. 제 통찰력이라고 해두죠. 호호.”

임 감독과 몇 마디 더 대화를 나누던 소정은, 탁자 위에 놓여있던 차를 홀짝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제 내일, 목요일이면, <천년의 그대>라는 대장정이 전부 막을 내리게 된다.

본편에 이어 번외편 여섯 편까지, 모두 방영이 끝나게 되는 것이다.

지난 2년간,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갈아 넣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프로젝트 <천년의 그대>.

그 대장정이 드디어 끝났다는 생각이 드니, 조금은 긴장이 풀어지는 소정이었다.

‘내일 방영만 잘 마무리되면, 진짜 한동안 일 생각은 놓고 푹 쉬어야지.’

한동안이라 해 봐야 길어도 한 달을 넘지 못할 것이다.

그녀 없이 회사가 굴러가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고, 소정 또한 쉬다 보면 좀이 쑤시는 타입이었으니까.

그리고 이런 생각을 떠올리던 소정은, 문득 한 사람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그녀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그녀보다도 훨씬 더 바쁘게 움직였던 한 사람.

‘우진 씨 지금 뭐하려나. 전화나 한 번 해볼까?’

사실 소정은 엊그제부터, 우진에게 연락해보고 싶던 것을 계속 참고 있었다.

건축가협회와의 여론전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그에게, 부담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모든 일이 깔끔히 마무리되었으니, 전화 한 통이 그에게 부담을 주지는 않을 터였다.

띠리링-

곧바로 스마트폰을 들어 우진의 번호를 누른 소정은, 로비에서 일어나 대표실로 향했다.

“저, 전화 좀. 감독님 먼저 퇴근하세요.”

“네 대표님. 오늘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일 봬요!”

그리고 잠시 후.

[여보세요.]

소정의 수화기 너머로, 우진의 담담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에 소정은, 다짜고짜 물어보았다.

“우진 씨, 내일 저녁. 바빠요?”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내일 성수동으로 퇴근할게요. 한잔해요.”

어차피 주말에는 <천년의 그대> 제작진 회식이 있었고, 거기에 우진도 잠시 얼굴을 비추기로 했지만.

그것과 이건 다른 맥락이었다.

[뭐……. 좋아요. 마지막 본방이나 같이 사수하시죠.]

“콜!”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가장 의지 됐고 가장 믿음직스러웠던 동료.

소정은 이 대장정의 마침표를, 그와 함께 찍고 싶었다.

* * *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 시작된, <천년의 그대> 마지막 회차.

본편의 스토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마지막 회차는, <천년의 그대>의 또 다른 클라이막스였다.

<천년의 그대> 안에 숨겨져 있던, 본편에서 풀리지 않은 모든 떡밥이 한 번에 공개되는 화였으니까.

그래서 단골 칵테일 바에 앉아 소정과 함께 본방을 사수하던 우진은, 완전히 몰입해서 마지막 화를 감상하였다.

우진은 천년의 그대 모든 방영분 중 이 번외편의 마지막 편이 가장 재미있게 느껴졌다.

우진의 개입 때문인지 번외편의 스토리는 전생의 <천년의 그대>와도 완전히 다른 양상이었으며.

그래서 내용을 다 알고 있던 우진조차도 예상할 수 없는 전개였으니까.

‘이런 떡밥도 있었어? 내가 알던 천년의 그대랑은 좀 다른데…….’

마지막 회차가 재밌던 것은 우진뿐만이 아니었는지.

번외편 방송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방영 최고 시청률에서 크게 떨어지지 않은 높은 시청률이 끝까지 유지되었다.

성수동 칵테일 바에서 우진과 함께 그 마지막 장면을 시청하던 소정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였다.

너무 기뻐서. 혹은 벅차오르는 감격으로 인해 차오른 눈물일 것이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우진이 넌지시 물어보았다.

“뿌듯하시죠?”

우진의 물음에, 소정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를 마주 보며, 우진은 빙긋 미소 지었다.

소정이 <천년의 그대> 마지막 장면에 빠져있는 동안, 우진은 슬쩍 스마트폰을 열어 보았다.

드라마도 충분히 재밌었지만, 지금쯤 그 이상으로 흥미로운 떡밥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기 때문이었다.

우진이 준비했던 마지막 한 수.

그 한 수란 바로, 목요일 마지막 회차 방영 직전에 인터넷에 뿌려진 새로운 기사들이었다.

[WJ 스튜디오 서우진 대표. 논란됐던 이천시 토지보상금, 지역사회에 전액 기부!]

그 기사들은 이 순탄한 흐름에 날개까지 달아주고 있었다.

우진이 의도하고 예상했던, 바로 그대로 말이다.

[17억에 달하는 토지보상금 전액, 지역사회에 그대로 쾌척한 서우진!]

[국가사업으로 인해 의도치 않게 발생한 이익금, 지역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싶었다.]

[이천시장, 서우진 대표가 기부한 금액, 이천시 관광산업 발전에 그대로 투입 예정.]

사실 우진의 누명이 벗겨진 뒤에도, 우진을 공격하는 네티즌들은 아직까지 남아있었다.

어쨌든 우진이 국가사업으로 인한 차익을 본 것은 분명하고,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어떤 거래가 분명히 있을 거라는 둥.

젊은 나이에 성공한 우진을 시샘하는 이들은, 음모론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악플을 아직까지 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진의 이 한 수로 인해, 그런 악플들은 기도 펼 수 없게 되었다.

이전까지도 거의 모든 명분이 우진에게 있었지만.

이제 우진의 명분은 완전무결해졌다.

└ 와, 이걸 다 기부한다고?

└ 끝까지 서우진 까던 애들 다 어디 갔냐?

└ 이래도 까는 애들은 까겠지?

└ ㄴㄴ 여기서 어떻게 더 깜. 서우진, 진짜 존경한다.

└ 건축가협회 버러지 새끼들. 진짜 우진이는 얼마나 억울했을까?

└ 이번 기회에 협회는 아예 해체하자 그냥. 업계 암 덩어리들인 듯.

└ 와 서우진 개멋있어. 오늘 종방 하자마자 어제 방영분 다시 보러감.

└ 222222 더러운 협회랑은 차원이 다르네 그냥.

그리고 이런 기사의 반응과 더욱 타오르는 여론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그는 바로 우진의 지시를 받아 이 기사를 언론에 직접 배포한, WJ 스튜디오의 마케팅 실장.

기사를 모니터링하던 그는 혀를 내두르며 감탄하고 있었다.

‘반응이 진짜 엄청나네.’

평소에도 항상 기대 이상의 결과를 만들어내던 우진이었지만, 이번 한 수는 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거의 이십억에 달하는 돈을 서슴없이 쾌척하는 배포와, 큰 그림을 볼 줄 아는 시야.

그는 우진이 정말 존경할 만한 상사라는 생각을 새삼 다시 하게 되었다.

‘우리 회사……. 어쩌면 대표님 말씀처럼, 정말 세계적인 건축회사가 될지도 모르겠어.’

천년의 그대 마지막 화는, 평소보다 30분이나 더 길게 방영되었다.

국민 드라마라는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역대급 성적을 보여준 천년의 그대였기에, 드라마에 여운이 가득할 수많은 팬들을 위해 방송국에서 이례적으로 시간을 좀 더 빼준 것이다.

하여 이 방영이 전부 끝났을 때, 한국 최고의 검색포털 검색어 1위와 2위는, 바로 다음과 같았다.

[1위 - 천년의 그대 종방]

[2위 – 서우진 기부]

* * *

좋은 흐름이 이어질수록, 우진은 더욱 바쁘게 움직였다.

드라마가 모두 끝난 것과 별개로, 우진의 일들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소송전이야 로펌에서 알아서 처리해 주겠지만.

건축가협회의 몰락으로 인해 대부분 WJ 스튜디오의 일감으로 들어온 지구단위계획의 공공건축 설계 일정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

게다가 주말에는 드디어 천년의 그대 세트장이 대중에게 오픈되었는데, 이천에는 말 그대로 구름같이 많은 인파들이 몰려들었다.

소정의 배려로 배우들의 사인회까지 함께 열리기는 했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여기서 재밌는 것은.

원래 사인회 같은 것이 예정되어 있지 않던 우진까지도 함께 날벼락을 맞았다는 점이었다.

“형, 거기서 뭐해요. 여기 옆에 앉아요, 빨리.”

“나? 나는 왜?”

“우리만 고생시키고, 형은 구경만 할 생각이었어요?”

“응?”

“형도 같이 사인하셔야죠. 아마 오늘 오는 사람들 중에, 형 사인받고 싶은 사람도 엄청 많을걸요?”

“에이. 그 정도는 아닐 텐데.”

민우의 권유에 얼떨결에 그의 옆자리에 앉았건만.

<천년의 그대> 출연진들 못지 않게, 우진의 앞에도 셀 수 없이 많은 팬들이 줄 서서 사인을 받았던 것.

“으아앗! 서 대표님이다!”

“민우 사인받고 바로 서우진 사인받아야지.”

“난 서우진 사인부터 먼저 받을래.”

“대박! 서우진이다!”

덕분에 사인회가 열리는 한 시간 동안, 우진도 손목이 시큰거릴 만큼 사인을 해야만 했다.

“와, 민우. 물귀신 작전 뭔데.”

“흐흐흐. 거봐요, 형. 팬들이 좋아하잖아요.”

우진만 열심히 일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우진 덕에 공공설계 건만 열 건이 넘게 들어온 WJ 스튜디오의 설계팀은 밤낮없이 야근을 해야 했으며.

<천년의 그대> PPL로 인해 급부상한 WJ 스튜디오의 브랜드 이미지를 더욱 펌핑하기 위해, 마케팅 팀도 쉴 틈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야근을 불사하며 일을 하면서도, 불평을 하는 직원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일단 그 어떤 직원보다도 가장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대표 서우진이었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이 열심히 일하는 만큼 회사가 성장하는 것도 피부로 체감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WJ 스튜디오의 직원들은, 모두가 이 회사에 주인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회사가 성장하면 성장하는 만큼 그 보상이 모든 직원에게 돌아오는 회사가 WJ 스튜디오였으니까.

폭풍같이 몰아치던 폭우가 그치고, WJ 스튜디오의 하늘이 다시 맑게 개었다.

그러는 사이 2월이 지났고, WJ 스튜디오는 더욱 내실 있는 회사가 되었다.

그렇게 3월이 되었을 때.

우진은 어느새 K대 디자인과의 졸업반이 되어 있었다.

골든 프린트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