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우진의 이야기
욕심이 나지 않느냐?
당연히 욕심이 날 수밖에 없다.
어떤 카테고리를 막론하고 이런 대규모의 건축설계는, 건축가로서 쉽게 접할 수 없는 기회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진은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그렇게 좋은 기회인 만큼, 조금 더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래서 잠시 뜸을 들인 우진은, 먼저 윤치형에게 물어보았다.
“교수님께서는요?”
“응?”
“저보다도 교수님께서 욕심나실 만한 프로젝트 같아서요.”
“하하.”
“교수님께서는 공모에 참여하지 않으십니까?”
우진의 질문에, 윤치형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덥썩 하겠다고 할 줄로만 생각했는데,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우진의 생각이 더 깊었으니 말이다.
우진이 보통의 20대와 다르다는 사실을, 치형은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하하핫, 내가 교수 생활을 하면서, 제자에게 이런 얘길 듣는 날이 오게 될 줄은 몰랐다.”
“주제넘었다면 죄송합니다.”
“에잉, 주제넘기는 무슨. 우진이 넌 이제 국내에서 제일 핫한 건축사무소 대표 아니냐.”
“아직 멀었습니다.”
“겸손은…….”
치형은 피식 웃으며 커피잔을 들었다.
그리고 우진의 두 눈을 슬쩍 살펴보았다.
일견 담담해 보이지만, 열망이 느껴지는 우진의 눈동자.
그것을 확인한 치형이,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이 프로젝트. 당연히 나도 욕심이 난다.”
우진은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기 시작했고, 치형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하지만 너도 봤다시피 일정이 너무 빠듯하고, 도저히 준비할 여력이 안 돼.”
그 말에 우진이 살짝 당황하며 물었다.
“기획서에는 마감이 5월로 되어 있던데, 그거 픽습니까?”
“하하. 왜?”
“진짜 5월이 마감이면 저도 못 합니다. 일정은 아직 조율 중인 거 아닙니까?”
우진은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다.
우진이 본 문서는 기획 초안에 가까운 것이었고.
보통 이런 초안에 명시된 일정이 조율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기에, 애초에 5월이라고 쓰여 있던 일정은 신경 쓰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진짜 그 일정 그대로라면?
아무리 우진이라 해도 불가능하다.
아마 전시관 한 동 뽑아내기도 힘든 일정일 것이다.
우진의 놀란 표정이 재밌었는지, 치형의 입가에 웃음이 더 짙어졌다.
“그야 당연하지. 5월은 가 일정일 뿐이야.”
“아…….”
안도하는 우진의 표정을 보며, 치형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실제 일정이 픽스 된 것도 사실이다.”
“그래요?”
“나도 확인해 봐야 하는데, 아마 8월이나 9월 초쯤일 거야.”
“아하.”
“그래도 빠듯한 건 마찬가지지.”
우진의 머리가 다시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치형의 말처럼, 8월이나 9월이라고 시간이 많이 남은 것은 아니다.
워낙 설계 규모가 크다 보니, 기본설계만 하더라도 몇 개월은 잡아야 하니까.
만약 우진의 회사도 프로젝트가 많이 산재해 있다면 포기했어야 할 수준.
‘클라우드 파트너스 쪽에는 설계 다 넘겼고. 지금 남아있는 프로젝트가…….’
하지만 다행히 지금 WJ 스튜디오에 남아있는 대형 프로젝트는 청담 아르코 정도가 전부였고, 때문에 우진의 머릿속에는 충분히 해볼 만하다는 계산이 섰다.
“그 정도면 할만한 것 같은데…….”
조심스레 다시 운을 떼는 우진을 보며, 치형이 피식 웃었다.
“우진이 너야 네 회사가 있고 직원들이 있지만, 나는 혼자 아니냐.”
“음…….”
“게다가 학기 초라 학과 일도 쌓여 있고……. 난 도저히 일정을 맞출 자신이 없다.”
치형의 그 설명에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에게는 정말 여력이 없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진은 마음 편히 얘기할 수 있었다.
이 프로젝트. 한번 해보고 싶다고 말이다.
“그럼……. 제가 한번 해봐도 괜찮겠습니까?”
그리고 치형은, 장난스런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래. 처음부터 네게 주고 싶었던 프로젝트였으니까.”
“감사합니다……!”
“단…….”
“……?”
“내 부탁을 하나 들어줘야 한다.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야.”
생각지 못했던 치형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하는 우진.
“어떤 건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런 그를 향해, 치형이 다시 한번 씨익 웃어 보였다.
“오늘 시간 좀 비워뒀다 했지?”
“네, 교수님.”
“파릇파릇한 후배들 위해서, 봉사 한 번 해라.”
“예?”
툭-
치형은 대답 대신 작은 팸플릿을 하나 탁자 위에 던져 올렸고, 그것을 본 우진은 영문 모를 표정이 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신입생들에게 주어지는 입학식 팸플릿이었으니 말이다.
“이건 왜……?”
이어서 우진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치형이 다시 입을 열었다.
“거기 목차 보면, 입학식 축사 보이지?”
우진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보이긴 하는데요…….”
치형은 정말 별거 아니라는 듯, 툭 하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거, 네가 해라.”
“네?!”
“왜 못 들은 척하고 그래? 축사, 네가 하라고.”
“하지만……!”
입학식 팸플릿에는, 분명 ‘공간디자인학과 학과장 윤치형’이라고 연사(演士)가 명시되어 있다.
그래서 우진은 더 당황했지만, 치형은 별 것 아니라는 듯 이렇게 대답했다.
“왜, 싫어?”
“여기, 교수님 성함 적혀 있는데요?”
치형이 씨익 웃었다.
“뭐 어때.”
“…….”
“어차피 신입생들, 나 같은 노땅이 판에 박힌 소리 하는 것 보다, 네가 단상 위에 올라오는 걸 몇 배는 더 좋아할걸?”
“그래도…….”
“네가 올라가면 진짜 아무 소리나 해도 좋아할 거다.”
“진짜 제가 합니까?”
“그래. 그냥 한 20분 정도, 신입생들 놀아준다고 생각해.”
치형의 말에 우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무 갑작스럽기도 했지만, 이렇게 즉흥적으로 이래도 되나 싶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치형은 장난이 아닌 진심이었고, 우진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이만한 프로젝트도 물어다 줬는데, 대타 한 번 못 뛰어 주냐?”
그래서 우진은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뭐……. 알겠습니다. 할게요.”
“크크. 좋아, 좋아.”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런데 교수님.”
“왜?”
“입학식……. 저 때문에 망쳐도 모릅니다?”
우진의 그 이야기에, 윤치형은 그저 웃어 보일 뿐이었다.
* * *
K대 디자인학부의 2013년도 입학식은, 학부 건물의 학술회의장에서 정오에 시작되었다.
거의 오백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커다란 학술회의장은 11시 30분부터 신입생들로 빼곡하게 들어찼고.
다들 바라 마지않던, 꿈꾸던 학교에 입학해서인지.
모두가 들뜬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있었다.
올해로 스물한 살.
재수 끝에 K대 공간디자인과에 입학한 수영 또한, 그러한 신입생들 중 한 사람이었다.
작년에 제법 괜찮은 서울 상위권 디자인 대학에 붙었음에도 불구하고, K대 디자인학부에 입학하겠다는 일념으로 피나는 노력 끝에 재수에 성공한 수영.
그녀에게 오늘 이 입학식 자리는 그야말로 꿈에 그리던 자리였고.
그래서 자리에 앉아 입학식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도, 수영의 가슴은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
그녀는 입학식 팸플릿을 손에 꼭 쥔 채 내용을 정독하고 있었다.
‘학회장 선배님 질문 시간도 있네. 이때 궁금한 것들 여쭤도 되겠지?’
이미 오리엔테이션에서 학교 생활에 대한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지만, 그래도 아직 궁금한 것 투성이인 새내기 수영.
그녀에겐 오늘 이 자리의 모든 것들이 설레었다.
입학식 팸플릿에 연사로 이름을 올린 사람들이 평소에 존경하던 유명한 디자이너들이라는 사실도 설레는 이유 중 하나였다.
‘우와, 오늘 입학식 축사는 윤치형 교수님이시네? 존경하던 분인데…….’
팸플릿까지 다 읽은 그녀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제 곧 입학식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단상에 닿았을 때, 마침 한 사람이 단상 위로 올라와서 마이크를 잡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신입생 여러분. 시각디자인과 학생회장 오영선입니다.”
K대의 입학식은 학과 단위가 아닌 학부 단위로 진행된다.
그렇기에 오늘 이 자리에는 공간 디자인과 뿐 아니라 모든 디자인학부의 신입생들이 전부 모여 있었고, 그래서 입학식을 진행하는 스탭들도 디자인학부 내 모든 학과의 선배들이 섞여 있었다.
그래서 수영은 내심 그녀의 학과인 공간디자인과의 선배가 단상 위에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오리엔테이션에서 봤던 과 선배의 얼굴이 보이면 반가울 것 같은, 일종의 소속감 비슷한 것이었다.
‘2학년 과대 선배 오신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런데 그녀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수영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동기 하나가, 문득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수영 언니.”
“응?”
“오늘 우진 선배 학교 오셨다던데, 혹시 본 적 있어요?”
낯익은 이름을 들은 수영은, 화들짝 놀라며 반문하였다.
“우진 선배라면……. 그, 서우진 선배?”
“당연히 그 우진 선배죠.”
“2학년에 김우진 선배도 있잖아.”
“그 선배 이름 때문에 항상 고통받는다던데…….”
서우진이라는 이름을 들은 수영은, 그렇지 않아도 설레던 마음이 더욱 두근대기 시작하였다.
우진은 그녀뿐 아니라, 올해 공간디자인과에 입학한 신입생들 대부분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으니 말이다.
저도 모르게 말이 빨라진 수영이, 동기를 향해 다시 물어보았다.
“무튼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서우진 선배 오늘 오셨다고?”
“그렇다니까요, 언니? 아까 임시 과대 오빠가 봤다던데.”
“대박.”
“입학식에 오시려나요?”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우진은 이제 일반인에게도 연예인이나 다름없을 정도의 유명인이었지만, 건축이나 디자인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인물이었다.
과장 없이 우진 때문에 공간디자인과에 지원하는 학생들이 작년부터 과반수가 넘을 정도였는데, 그 증거로 K대 디자인학부 안에서도 공간디자인과의 경쟁률이 타과의 5배가 넘었다.
우진이 입학하던 해만 하더라도 시각디자인과의 경쟁률이 가장 높았던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누가 봐도 우진의 영향이라 할 수 있었다.
“사인 한 장만 받고 싶다. 친구들한테 자랑해야 하는데…….”
“제 친구는 오늘 인문대 입학식 갔는데, 우진 선배 보러 뛰어오는 중이래요.”
“으, 지금 입학식에 앉아있을 때가 아닌가? 우진 선배 과실에 계시는 거 아니야?”
“헉. 언니, 나 화장실 좀…….”
“어딜 혼자 가려고……!”
“헤헤, 언니도 같이 가볼래요? 과실에 진짜 우진 선배 있을 것 같아.”
“그, 그러다가 입학식에 오시면?”
“으……. 으으……. 어떡하지.”
두 신입생은 작은 목소리로 연신 촐싹대었다.
우진의 실물을 영접(?)할 수만 있다면, 입학식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진지하게 고민 중이던 바로 그때.
단상 위에서 입학식을 진행하던 사회자의 목소리가, 그녀들의 귓전으로 흘러들어왔다.
“자, 의상디자인과 김진철 교수님의 말씀 지금까지 잘 들었습니다. 디자이너로서의 첫 발자국에 대한 이야기, 정말 인상 깊었는데요…….”
오늘 입학식의 사회를 맡은, 시각디자인과의 3학년 학생회장 오영선의 목소리.
“그럼 다음 순서는 공간디자인과의 학과장이신 윤치형 교수님!”
그런데 그녀의 말이 끝난 순간, 그녀의 뒤편에 있던 다른 학생 하나가 양손으로 엑스를 그리며 단상 위로 뛰어올랐다.
그는 사회자의 귀에 빠르게 한 마디를 속삭이고 내려갔고, 놀란 표정이 된 그녀가 방금의 말을 정정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 혼란을 드려 죄송합니다, 신입생 여러분. 윤치형 교수님의 일정으로 인해, 순서가 조금 바뀌었네요.”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학술회의장은 조금씩 웅성이기 시작하였다.
“해서 이번 순서는……!”
어느새 단상 반대편에서, 무척이나 낯익은 남자 한 명이 천천히 걸어 올라오고 있었으니 말이다.
“저희 K대 디자인과의 자랑! 여러분 모두 아주 잘 알고 계실, 공간디자인과 서우진 선배님의 입학식 축사가 있겠습니다!”
영선의 말이 끝난 순간, 장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동시에 단상 위로 고정되었다.
오늘 입학식에 참석한 신입생은 물론, 스탭으로 와서 회의장 뒤편에서 잡담을 떨고 있던 2, 3학년 학생들까지.
“……!”
그리고 그와 동시에.
“와아아아!”
“서우진! 우진 선배다!”
장내가 떠나갈 듯 어마어마한 함성이, 학술회의장에 울려 퍼지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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