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Noblesse
1월 말의 한파는 꽤나 매서웠다.
두꺼운 코트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옷 사이를 비집고 한기가 새어 들어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말이다.
텅-
주차장에 내린 우진은 흐트러진 옷깃을 여민 뒤,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오늘 우진의 약속장소는 종각에 있는 천웅건설의 본사.
건물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가는 우진의 표정에는, 약간의 긴장감이 어려 있었다.
‘그 양반이 날 보자고 한 이유가……. 대체 뭘까?’
띵-!
엘리베이터를 탄 우진은, 약속장소인 3층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잠시 후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렸을 때.
“여, 서 대표. 왔어?”
우진의 귓전에 가장 먼저 들린 것은 반가운 목소리였다.
“상무님 잘 지내셨죠?”
“나야 뭐, 언제나 비슷하지.”
우진을 발견한 경완은 환하게 웃으며 그를 맞아주었다.
거의 몇 개월 만에 봤기 때문인지, 두 사람 모두 적잖이 반가운 표정이었다.
“요즘 일은 좀 어때요?”
“우리? 연말에 수주를 좀 못 따긴 했는데……. 실적 자체는 그렇게 나쁘지 않아.”
“사실 못 딴 게 아니라 안 딴 거 아니에요?”
“왜 그렇게 생각해?”
“이미 한도액 꽉 찼을 것 같아서요.”
“크, 너는 우리 재무제표라도 들여다 봤냐? 귀신이 따로 없네 이거.”
꽤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조금의 어색함도 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걸음을 옮겼다.
나이 차이를 넘어, 둘은 막역하다는 단어가 어색하지 않은 친구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답시고, 밑도 끝도 없이 수주 따다가 흑자도산 하는 건설사 많잖아요.”
“그치.”
“천웅이 큰 회사긴 하지만……. 작년 초까지 입찰한 사업장이 좀 많아야죠. 그 정도 입찰했으면, 제운건설이라도 부담될 것 같은데요?”
“그건 아니고. 제운 너무 무시하지 마라. 거기가 그래 봬도, 자금력 하나는 빵빵한 회사야. 돈만 놓고 보면 아직 SH물산도 한 수 접어줘야 할걸?”
“흠. 그런가…….”
두 사람은 계속해서 걸었다.
오늘 천웅건설 사옥에 와서 가장 처음 만난 인물은 박경완이었지만, 사실 우진과 약속을 잡은 사람은 따로 있었으니까.
그래서 지금 둘은,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 걷는 중이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거예요?”
“엘리베이터 타러.”
“음? 그럼 왜 3층에서 내리라고 했어요?”
“그 엘리베이터는 최상층까지 안 가거든.”
“아……!”
“임원들 쓰는 엘베 따로 있어. 따라와.”
오늘 우진과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는 사람.
그 사람은 바로, 이 천웅건설 사옥에서 가장 높은 곳에 앉아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저벅- 저벅-
걸음을 옮겨 3층 로비를 가로지르자, 한눈에 봐도 고급스런 마감으로 디자인되어있는 엘리베이터가 우진의 눈에 들어왔다.
임원들만 주차가 가능한 지하 1층 주차장과 사옥 꼭대기의 세 개 층만 운영한다는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
경완이 다가서자 그 앞을 지키던 보안요원이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인 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주었고, 잠시 후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였다.
그 일련의 과정들을 잠시 지켜본 우진이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감탄하였다.
“와, 그래도 제가 천웅 사옥 꽤 많이 와봤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엘리베이터가 있는 줄도 몰랐네요.”
경완이 웃으며 대답했다.
“직원 중에도 모르는 애들 꽤 될걸?”
“하긴. 동선상 이쪽으로 올 일이 잘 없을 테니까……. 관심 없으면 모를 수도 있겠네요.”
이어서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경완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우진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서 대표.”
“네?”
“넌 안 떨리냐?”
“제가요? 왜요?”
“난 이 엘리베이터 처음 탈 때, 진짜 식은땀이 줄줄 흘렀었거든.”
“아하.”
“설마 우리 대표님을……. 무슨 동네 아저씨 정도로 생각하고 만나러 가는 건 아니지?”
“에이, 설마요. 그럴 리가.”
경완에게는 담담한 듯 얘기했지만, 사실 우진도 긴장하고 있었다.
천웅건설에서 가장 높은 사람 천종걸.
그를 만나러 가는 상황에서 우진이라고 긴장이 안 될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단순히 천종걸이 커다란 건설사의 대표라서가 아니었다.
그는 한국 건설업계에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고, 전생에서부터 우진이 꽤 존경하던 인물이었으니까.
그런 사람과 이렇게 대면하게 된다는 것 자체가, 긴장될 만 한 일인 것이다.
게다가 왜 만나자고 한 것인지 용건을 모른다는 점도 우진을 긴장시키는 데 한몫하였다.
‘그냥 얼굴 한번 보고 싶다는 얘길,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띵-
우진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도착하였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두 사람은 곧 대표실 앞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문 앞에 선 경완이 한 차례 헛기침을 한 뒤 입을 열었으며.
“대표님, 저 왔습니다.”
잠시 후, 대답 대신 커다란 문이 천천히 열렸다.
끼이익-
* * *
천종걸은 천웅건설을 세운 창업자가 아니다.
천웅건설이라는 회사를 처음 세운 것은, 종걸의 아버지였으니까.
하지만 작은 중소건설사에 불과했던 천웅건설을 이렇게 대기업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천종걸이었으며.
그래서 천종걸은 우진의 전생에서도, 한국의 뛰어난 기업인들을 논할 때 항상 거론되던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때문에 이 건설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천종걸이라는 인물의 사업적 감각은, 객관적인 사실들만 놓고 보아도 그 누구보다 뛰어난 것일 수밖에 없었다.
젊은 시절 유학을 다녀온 탓일까?
그는 거의 삼십 년 전부터 건설사의 ‘브랜드’에 대해 이야기하던 사람이었다.
[소비자는 그 어떤 상품을 고를 때보다도, ‘집’이라는 상품을 선택할 때 가장 많은 고민을 하지.]
[그 수많은 고민 속에서도 선택받을 수 있는 집을 짓기 위해서, 우리는 천웅이라는 브랜드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발전시킬 필요가 있는 거다.]
심지어 클리오라는 프리미엄 브랜드의 런칭을 처음 제안했던 것도, 대표이사인 천종걸이라고 했었다.
물론 브랜드의 구체적인 디자인 방향성이나 디테일은 실무진들이 전부 했겠지만, 이 혁신적인 방향성을 떠올렸다는 사실만으로도 천종걸은 높은 평가를 받을만한 사람인 것이다.
때문에 종걸은 그 자신의 사업적 역량에 대해서, 커다란 자부심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동안.
그런 종걸의 눈에, 계속 밟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흠. 박경완이. 그 친구가……. WJ 스튜디오에 설계를 한번 맡겨보자고 했다고?]
[네. 실력은 어느 정도 있는 업체 같은데, 업력이 너무 짧고, 무엇보다 대표자 나이가 너무 어린 게 마음에 걸립니다.]
[박경완이가 안목은 괜찮은 녀석인데……. 흠. 도면 한 번 올려보내 봐.]
[공모 도면을 직접 보시게요?]
[재밌잖아. 도면을 보기도 전에, 색안경부터 낄 필요는 없지.]
처음 ‘그’가 종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청담 선영아파트의 수주 때였다.
고작 2년 전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그때만 해도 아직 제운건설이나 SH물산에 비해서는 인지도가 많이 부족했던 천웅건설.
솔직히 박경완이 한번 수주전을 해보겠다고 했을 때만 하더라도, 종걸은 반신반의했었다.
20대 젊은 대표의 설계에, 이제 처음 런칭한 클리오라는 새내기 브랜드를 들고.
청담 선영아파트의 수주전을 정말 따낼 수 있을 거라고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20대의 청년은 거짓말처럼 그 일을 해냈고.
덕분에 천웅건설은 청담 최고의 입지에 클리오의 이름을 꽂아 넣을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 종걸이라고 한들, 그 청년에게 관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던 것이다.
그래서 이미 그때부터.
종걸은 우진이라는 사람을,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언제 한 번 감사 인사라도 해야겠군. 가능하면 우리 천웅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도 괜찮겠어.’
하지만 종걸도 워낙 바쁜 사람이다 보니, 그 생각은 쉽게 실현되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진에 대한 관심은 흥미 이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우선순위가 밀렸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시간이 지나는 사이, 그 작은 신생 설계사무소의 대표는 어느새 거인이 되어 있었다.
물론 WJ 스튜디오가 천웅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큰 회사가 되려면 아직 멀었지만.
회사의 크기를 떠나 이 건설이라는 분야에서 쌓은 인지도만큼은 종걸도 인정할 만한 수준까지 성장해버린 것이다.
[이번 성수지구 사업장도, 그 서우진이 작품이라는 거지?]
[그렇습니다, 대표님. 정황을 보니……. 판을 깐 것도 서우진 대표인 것 같습니다.]
[놀랍군. 이 정도의 판을 움직일 능력이라…….]
이것은 천웅건설을 직접 키워 낸 종걸이 보기에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성장이었다.
그래서 종걸은 더 늦기 전에, 우진이 가진 그릇의 크기를 한번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우진의 그릇이 여기까지라면 상관없겠지만, 이 속도대로 계속해서 성장한다면 근시일 내에 천웅과 비슷한 위치에 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건설이라는 카테고리에서만 놓고 본다면 쉽지 않겠지만……. 건축디자인의 영역까지 끌고 온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
누군가 종걸의 이러한 생각을 들었더라면 지나친 비약이라며 웃어넘겼을 테지만, 적어도 종걸은 그렇게 생각하였다.
‘확실한 우군으로 만들어둬야 할 인물인지. 그걸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어.’
만약 오늘 이 자리에서 확인한 우진의 그릇과 역량이, 종걸이 생각했던 수준보다 훨씬 크고 뛰어나다면.
종걸은 자신이 가진 인프라를 아낌없이 투자해볼 생각이었다.
그의 생각에 이제 천웅건설이라는 회사는 고이기 시작한 커다란 웅덩이였고.
WJ 스튜디오가 가진 젊은 에너지는, 천웅건설에 새로운 변화를 줄 수 있는 훌륭한 촉진제 역할을 해 줄 터였다.
‘반대로 WJ 스튜디오는 더욱 빠르게 성장할 수 있겠지. 회사가 커지면 커질수록, 자본과 인프라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지는 법이니까.’
그래서 종걸은 오늘의 만남이 무척이나 기대되었다.
이 젊은 사업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그로부터 또 어떤 신선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
그래서 자신에게 얼마나 새로운 자극을 줄 수 있을지.
이 모든 것이 기대된 것이다.
약속시간이 되기 삼십 분 정도 전부터 대표실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종걸은, 따뜻한 차를 한 모금 홀짝이며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해가 지나면서 계속 바뀌어 가는 서울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천종걸의 대표실.
이곳에 앉아 상념에 잠기는 것은, 종걸이 가장 좋아하는 여가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렇게 눈을 감고 있던 종걸의 귓전으로, 작은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그에 종걸은 눈을 떴고, 의자를 돌려 책상 앞에 앉았다.
끼익-
그리고 다음 순간.
“대표님, 저 왔습니다.”
대표실 안으로, 그가 아끼는 부하직원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흘러들어왔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