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Cameo
몇 번의 고비(?)가 있긴 했지만, 우진의 첫 연기 경험은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WJ 스튜디오에서 촬영하는 동안 긴장이 풀리고 어느 정도 적응이 된 것인지, 오히려 클라시아 포레스트로 촬영장을 옮기고 나서는 순조롭게 촬영이 이어졌던 것이다.
“컷! 여기까지!”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야,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물론 큰 탈 없이 촬영이 끝났다는 것이, 우진이 연기를 잘했다는 말은 아니었다.
당연히 연기 초짜인 우진은, 연기를 못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다만 조금의 민폐는 끼쳤을지언정 큰 흑역사 생성 없이 촬영이 마무리되었다는 데에, 우진은 감사할 따름이었다.
“서 대표님,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제가 무슨 수고는요. 저 때문에 다들 고생 많으셨죠. 특히 감독님께서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제는 우진과 꽤 친해진 감독이, 우진에게 농담을 건네었다.
“하하. 아닙니다. 너무 기대를 안 해서 그런지, 기대보단 잘 해주시던데요?”
“기대를 얼마나 안 하셨길래…….”
“소정 대표님이 그러셨거든요.”
“뭐라셨는데요?”
“서 대표님 연기에는 소질이 없는 것 같다고…….”
“후……. 이 싸람이…….”
말에 앞뒤를 잘라버린 임수호 감독의 날조에, 당황한 소정이 손사래를 치며 말을 끊었다.
“제가 언제요! 민우가 그랬다니까요, 민우가!”
이러자 불똥은 민우에게 튀어버렸고 말이다.
“와, 대표님! 그걸 그렇게……. 너무 하시네 진짜…….”
그 모습을 보던 임수호 감독의 입에서 호쾌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으하하핫.”
꽤 길게 이어진 촬영 탓에 날은 벌써 어둑어둑해졌지만, 촬영팀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밝았다.
이들이 촬영 중인 드라마 <천년의 그대>는 새로운 역사를 쓰는 수준으로 성적을 계속해서 갱신하고 있었으며.
그에 따라 촬영 스탭들에게도 인센티브가 두둑이 떨어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돈이 전부가 아니었다.
이 촬영장에서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스탭들은 큰 보람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자신들이 피땀 흘려 만들어 낸 드라마.
그것이 최고의 성적을 내고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뿌듯할 만한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감독님.”
“예?”
“오늘 맥주나 한잔하고 가시는 건 어때요?”
“강 대표님이 사시는 겁니까?”
소정이 우진을 힐끔 보며 말했다.
“우리 서 대표님 집 앞까지 찾아왔는데, 오늘은 서 대표님이 사시겠죠. 안 그래요?”
어느새 분장을 지우고 옆에 나타난 하영이 추임새(?)를 넣으며 동조하였고.
“역시, 우리 대표님!”
민우가 슬쩍 끼어들었다.
“대표님 누구요? 여기 대표님 두 분이신데.”
“당연히 중의적 표현이지. 서 대표님도, 강 대표님도. 다 우리 대표님 아니겠어?”
하영의 재치 있는 대답에 좌중에 다시 웃음이 번졌고.
다른 메인 스탭들, 배우들도,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우진을 응시하였다.
그에 우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였다.
“뭐, 좋습니다. 시간이 늦어서 그리 오래 있지는 못하겠지만……. 간단하게 맥주라도 한 잔씩 들고 가시죠!”
촬영장이 정리되자 촬영 팀 절반 정도는 귀가하였고, 나머지 절반은 성수동 포차에 다들 모였다.
이제 이 번외 편까지 포함하여 촬영 일정이 세 번밖에 남지 않았으니, 다들 긴장은 많이 풀어진 상태였다.
“오늘 촬영분 방영되는 날, 성수동으로 퇴근해야겠어요.”
“네? 굳이?”
“방영시간에 맞춰서 오빠네 집에 가 있을 테니까, 대표님도 올라오세요. 알겠죠?”
“……사양합니다.”
“아 왜요. 이런 게 다 추억인 건데. 흐흐흐.”
잔이 오가고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분위기는 더욱 무르익어갔다.
좋은 사람들과 긍정적인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적성에 맞지 않는 연기를 하느라 쌓였던 피로도 금세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기분 좋은 분위기 속에서, 우진의 다사다난했던 하루도 마무리되었다.
* * *
다음 날 아침.
우진은 새벽같이 출근하여 사무실에 나왔다.
전날 술을 마시기는 했지만, 기분 좋을 정도로 가볍게 마신 것이었기 때문에, 컨디션은 오히려 더 가뿐했다.
약간의 알콜 덕에 숙면을 취한 것.
물론 단순히 몸이 가뿐하다는 이유로 일찍 출근한 것은 아니었다.
우진이 대표실에 도착한 것은 정확히 새벽 6시 30분이었고, 아무리 몸이 가뿐해도 이렇게까지 서둘러 나올 이유가 되진 않으니까.
다만 우진은 오늘 오전 안으로 해야 할 일이 무척이나 많을 뿐이었다.
‘오전 내로 검토해야 할 설계만 산더미네.’
모니터를 켠 우진은, 사내 메일로 도착한 PDF 파일 무더기를 오픈했다.
캐드에서 작업 된 도면을, 보기 편하게 PDF 파일로 Export한 것.
파일의 제목들은 다음과 같았다.
[CheongdamArco 247Type Floor Plan.pdf]
[CheongdamArco 198Type Detail Plan.pdf]
……후략……
“흠. 뭐부터 봐야 하나. 74평이 더 변경 점이 많으니까……. 이것부터 볼까.”
우진이 오늘 검토해야 할 도면들은, 다름 아닌 우진의 새 사업장 ‘청담 아르코’의 도면들이었다.
지난 몇 달 동안 Arco(아르코)라는 브랜드의 디자인 R&D와 함께, 이 아르코가 데뷔하게 될 첫 작품인 Cheongdam Arco(청담 아르코)의 디자인 설계가 계속해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 내로 우진은, 다진건설 측에 최종 설계를 공유하기로 했다.
물론 실시설계는 빠진 기본설계였다.
아직 시공 가능한 설계작업까지는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흠…….”
247타입.
그러니까 청담 아르코에 구성되어있는 평형 중 ‘74평형’의 도면을 먼저 펼쳐 든 우진이, 평면도부터 꼼꼼히 살피기 시작하였다.
완전히 처음 보는 도면은 당연히 아니었다.
컨셉 설계부터 모든 부분에 있어서 우진이 직접 참여한 도면이니까.
다만 도면을 완성하기까지 몇 가지 솔루션이 추가로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오늘은 그에 대한 검토를 해야 했다.
도면을 꼼꼼히 살피던 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예 247타입 전체를 복층구조로 빼버렸네. 확실히 이렇게 해버리면 프라이버시 측면에서는 강화할 수 있지.’
복층의 가장 큰 단점은, 당연히 집 안에 계단을 둬야 한다는 점이다.
젊은 사람들이야 주거공간 내에 계단이 있어도 크게 불편치 않지만, 40대만 넘어가도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은 꽤 부담인 것이다.
다른 종류의 공간들보다도 이용자의 편안함에 훨씬 더 민감할 수밖에 없는 주거공간에서 복층이 드문 이유가 바로 이것.
그런데 WJ 스튜디오의 설계팀은 전체 세대의 30퍼센트나 차지하는 74평형이라는 타입 전체를 복층구조로 변경하였고, 그것을 보며 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테라스동 층수를 3층으로 낮추고 이렇게 열 세대를 나란히 배치해 버리니까, 진짜 휴양지에 있는 테라스 하우스 느낌 나네.’
주거의 프라이버시 침해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층간소음이다.
윗집, 아랫집에서 들려오는 소음들도 스트레스지만, 반대로 이웃에게 소음을 줄까 봐 노심초사하는 것도 스트레스인 법.
그래서 설계팀은 74평형을 아예 따로 분리해서, 한 라인에 한 세대만이 들어가도록 설계해 버렸다.
1층은 개인 주차공간이 들어가는 필로티에 할애하고 2층, 3층을 복층구조로 한 세대가 다 사용하게 만듦으로써.
74평형 전 세대를, 이 층간소음 스트레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세대들로 만들어준 것이다.
게다가 옥상층 전체를 서비스 면적으로 구성하여 루프탑 테라스로 만들어버렸으니.
복층의 단점을 가지고 있다곤 하지만, 그 이상의 충분한 매력을 만들어준 것.
우진은 이 과감한 선택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247타입 평면 진짜 괜찮게 뽑혔네. 그런데 이렇게 저층 동이 따로 분리되면……. 뒷동 저층에 조망권을 가려버리진 않을까?’
74평형 평면구성을 만족스럽게 검토한 우진은, 이번엔 건축 입면도를 꺼내어 모니터에 띄웠다.
최초설계에서 청담 아르코는 8층짜리 한 개 동으로 설계됐었는데.
이렇게 저층 동을 따로 분리해서 전면에 배치하면, 뒷동의 시야를 가려버릴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각 세대에 수십억 단위 분양가가 책정되어있는 프리미엄 주거의 특성상, 조망권이 보장되지 않는 세대가 일부 생기게 되면 메리트가 많이 떨어질 수밖에 없을 터.
하지만 우진은 뒷동의 입면 배치에서, 흥미로운 부분을 발견하게 되었다.
‘오호. 뒷동 저층부를 아예 커뮤니티 센터로 채워버렸네?’
거의 호텔처럼 고급스럽게 꾸며진 로비와 입주민 헬스장이 대부분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1층.
수영장과 사우나, 스크린골프 등으로 채워져 있는 2층.
여기에 소규모 스크린 영화관과 라운지 카페, 게스트 하우스 등으로 채워져 있는 3층까지.
안 그래도 고지대에 고층 동을 배치한 데다 3층까지 전부 커뮤니티 시설로 제외해 버리니, 거주 세대 중에서는 조망권을 침해받는 세대가 단 한 세대도 생기질 않는 것이다.
전 세대 한강 조망이라는 처음 목표까지 지켜내면서, 훌륭한 솔루션을 만들어낸 것.
‘앞 저층 동 2층까지는 조망이 애매할지 몰라도, 결국 복층구조라 3층부터는 한강이 훤히 보일 테니……. 이 정도면 충분히 전 세대 한강 조망이라고 할 수 있겠네.’
물론 모든 부분이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몇 가지 아쉬운 점들도 우진의 눈에 띄었으니까.
하지만 전반적으로 수정된 설계가 상당히 만족스러웠던 우진은, 일부 도면에 코멘트를 달기 시작했다.
└ 공사비가 더 들더라도 일부 필로티 주차공간으로 빠져있는 1층 부는 전부 커뮤니티 시설로 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어차피 거창한 커뮤니티가 들어갈 만큼 면적이 나오지는 않지만, 컨시어지 서비스의 일환으로 조식을 제공할 수 있는 공간이 들어가면 좋을 것 같군요.
└ 북측 한강뷰도 물론 중요하지만, 반대편 시티뷰도 최대한 살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현재 배치대로라면 뒷동 3호 라인과 1호 라인이 조망 간섭이 일어날 것 같은데……. 조금 설계 수정이 필요해 보입니다.
……후략……
주거설계는 항상 시행착오와 문제점 개선의 연속이다.
게다가 이번 청담 아르코는 우진의 첫 브랜드라고 할 수 있는 아르코의 첫 번째 작품.
건축주나 다름없는 다진건설에서도 설계를 재촉하지 않았으니, 우진은 최대한 다듬고 다듬어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주거를 디자인해 내고 싶었다.
누구라도 브로셔를 한 번 읽어본다면, 분양계약을 하지 않고 배길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물론 청담 아르코의 브로셔는, 그것을 분양받을 만한 고객들에게만 제공될 예정이었다.
‘오늘 오후에 최종 수정 끝나면, 이제 기본설계는 마무리 지어도 되겠어.’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우진은, 오전 내내 검토한 설계들을 다시 압축하여 설계팀 메일로 보내 두었다.
정신없이 집중해서 일에 몰입해 있다 보니, 대표실에 걸려있는 시계는 벌써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다행히 시간은 좀 남았는데……. 그래도 여유롭게 출발하는 게 맞겠지?”
책상 구석에 놓아두었던 차 키를 꺼내 든 우진은, 외투를 걸쳐 입고 대표실을 빠져나갔다.
오늘 우진은 꽤 중요한 사람과의 점심 약속이 있었다.
부릉-
운전대를 잡은 우진이 향한 곳은 바로 종각역이었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