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Noblesse
일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었지만, 우진은 전생에 천종걸을 본 적이 있었다.
준공행사에 나왔던 천종걸의 모습을 꽤 먼발치에서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우진의 시간으로 따지자면 10년도 더 된 오래전에 기억이었지만, 그것은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였다.
천종걸의 인상은 그만큼 강렬했었으니까.
‘진짜 대기업 총수는 그런 느낌이구나 했었지.’
그래서 우진은 그때의 선명한 기억과 지금 눈앞에 천종걸을 자연스레 대조해 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
우진은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오늘 만난 천종걸의 이미지는, 우진이 전생에 봤던 그 사람과 또 다른 것이었으니까.
‘나이 차이 때문에 그런 건가…….’
전생의 우진이 종걸을 봤던 것은, 30대 중반이 넘어서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나이로 따지자면, 지금보다 십 년도 더 뒤의 종걸을 봤던 것.
예순이 다 된 나이에서 십 년의 차이는 결코 적지 않은 것이었고, 그것은 외모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우진의 기억 속에 있던 종걸이 좀 더 근엄하고 태산 같은 제왕의 이미지였다면.
지금 우진의 앞에 앉아있는 종걸은 사나운 호랑이 같은 느낌이었던 것이다.
그 어떤 범접하기 힘든 분위기는 확실히 전생의 기억이 더 강렬했다.
우진이 전생에서 느꼈던 천종걸이라는 인물은, 그와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귀족같았으니까.
하지만 그때보다 확실히 강렬한 부분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에너지였다.
검은 머리카락이 한 올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하얀 백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종걸에게서는 여느 젊은이 못지않은 에너지가 느껴진 것이다.
끼익-
그리고 한 가지 더.
우진은 본인이 이번 생에서 얼마나 크게 성장했는지를, 종걸을 통해서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우진은, 그와 같은 세계에 살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서우진이라고 합니다.”
공손히 고개를 숙여 보이며 인사하는 우진을 향해, 종걸이 껄껄 웃으며 대답하였다.
“반갑습니다, 서우진 대표. 난 천종걸이라고 합니다.”
“하하. 잘 알고 있습니다. 천웅의 대표님을 제가 모를 리가요.”
“나 또한 서 대표님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차 한잔하시면서 편히 앉으시지요.”
“감사합니다.”
아들뻘을 넘어 거의 손자뻘의 후배인 우진이었지만, 종걸의 말투에서는 우진에 대한 존중이 느껴졌다.
다만 그의 화법에는 묘한 구석이 있었는데, 우진에게 존칭을 하면서도 절대로 본인을 낮춰 부르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본인을 칭할 때 ‘전’이나 ‘제가’라는 말 대신, ‘나’ 혹은 ‘내가’라는 말을 자연스레 사용한다는 것.
이것은 상황이나 관계, 경우에 따라 어쩌면 무례해 보일 수도 있는 화법이었지만, 종걸에게서는 전혀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그의 화법이, 천종걸이라는 사람에게 너무 잘 맞는 옷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만남을 먼저 청해놓고, 이렇게 오라 해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그리 멀지도 않은데요.”
“그래도 여기까지 오셨으니, 식사는 근사한 것으로 대접하겠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두 사람이 대화를 시작하자, 경완은 가만히 앉아 그것을 듣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따로 축객령(逐客令)이 없더라도 두 사람이 대화하는 동안 나가 있으려 했는데, 막상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을 보니 호기심이 생긴 것이다.
경완이 아는 사람들 중 업계에서 가장 뛰어난 두 오너가, 무슨 대화를 나눌지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딱히 경완을 신경 쓰지 않았고, 계속해서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대화의 시작은 훈훈할 수밖에 없었다.
“대표님께서 이렇게 연락을 주셔서,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래요?”
“인정받은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그 솔직한 대답에 종걸은 나지막이 웃었고, 우진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그리고 사실 대표님께선, 제가 꼭 한 번 만나 뵙고 싶었던 분들 중 한 분이셨습니다.”
종걸이 재밌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래요?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제가 WJ 스튜디오를 처음 시작할 때, 가장 많은 도움을 받았던 곳이 천웅이지 않습니까.”
“허허. 도움이라면…….”
“여기 박경완 상무의 도움이 컸지요. 처음 천웅건설의 건축모형을 발주 받을 수 있었기에, 사업을 키울 시드머니를 빠르게 마련할 수 있었던 거니까요. 해서 감사 인사도 꼭 드리고 싶었고, 일에 대한 이야기도 나눠보고 싶었습니다.”
회귀 이후.
우진이 사업을 시작한 그 시작점에는, 바로 천웅건설이 있었다.
물론 우진이 전생의 기억과 능력을 통해 천웅건설의 시공현장에 도움을 준 것이 시작이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경완의 호의와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WJ 스튜디오가 이렇게 빨리 성장하는 것도 불가능했을 테니 말이다.
경완이 보여준 신뢰와 도움이 아니었다면, 우진의 성장은 몇 년 이상 늦어졌을 터였다.
“하하, 우리 박 상무가 큰일 했군요. 그런 일이 있는 줄은 또 몰랐네.”
“아, 모르셨군요.”
“내가 서 대표님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건, 청담 클리오 수주전 때였습니다.”
“아…….”
천종걸 대표는 천웅건설이라는 커다란 회사의 수장이었고, 우진이 당시 맡았던 건축모형 제작 외주는 완전한 현장실무나 다름없는 일이다.
이런 일까지 종걸의 귀에 들어갈 일 없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조금 멋쩍은 표정이 된 우진을 향해, 종걸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그래서 나 또한 사실 우리 천웅을 도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 한번 뵙자 했던 건데……. 이거, 천웅에서 서 대표께 도움을 드렸던 적도 있었군요?”
“그때뿐이었겠습니까? 사실 수주전 때도 제가 도움을 드렸다기보단, 서로 도움을 받았던 것이지요.”
“허허.”
“천웅에서 저와 제 회사를 믿어줬기 때문에, 저희도 그런 멋진 기회를 잡을 수 있었으니까요.”
훈훈하게 이야기가 시작된 덕분인지, 조금은 딱딱했던 분위기가 금세 자연스러워졌다.
물론 편한 자리가 되었다는 건 아니다.
애초에 그럴 수는 없는 자리였으니까.
천종걸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다른 부분은 다 차치하고라도, 서 대표님이 20대라는 사실은 지금도 믿어 지지가 않는군요.”
살짝 뜨끔한 우진이 되물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모름지기 20대라 함은, 패기도 넘치고 자만도 좀 하고 그럴 때가 아닙니까.”
“저도 나름대로 패기는 있다고 자부합니다만…….”
“으하하핫.”
뭐가 그리 재밌는지 돌연 웃음을 터뜨린 종걸이, 눈을 반짝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십 대에 그 정도 이루었으면, 보통은 세상 모든 것이 발아래로 보이기 마련입니다.”
“…….”
우진은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들었고, 종걸은 계속해서 얘기했다.
“그 나이에 이 정도를 이뤄냈다는 말은, 반대로 실패를 경험해보지 못했다는 이야기니 말이지요.”
종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물론 사람의 그릇이나 역량에 따라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실패를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이 자만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야깁니다.”
“그런……가요?”
“한데, 지금 내 앞에 계신 서 대표께는, 전혀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는군요.”
저도 모르게 살짝 긴장한 우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칭찬으로 이해하겠습니다.”
“물론 칭찬입니다.”
우진의 실제 나이는 이제 마흔이 넘었다.
그러니까, 살아온 세월 말이다.
하지만 전생까지 포함해 모든 세월을 더해도 눈앞의 천종걸과 비교하면 짧은 인생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우진은 꽤 오랜만에, ‘어른’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자만이라…….’
반면에 지금 우진과 마주한 종걸은, 육십 년에 가까운 인생을 살아오면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신선한 경험을 하는 중이었다.
대화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우진은 계속해서 놀라운 모습을 보여줬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종걸이 가장 놀란 것은, 우진에게서 느껴진 ‘건축’에 대한 진실된 열정이었다.
우진이 하는 이야기의 대부분은, 돈이나 성공이 아닌 건축이 가진 본질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으니까.
“이렇게 재밌는 이야기들을 듣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하는 일들이 좀 다이나믹하긴 하죠. 하하.”
“같은 업계지만, 우리 천웅과는 다른 뷰를 가지고 계시는군요.”
“그래도 건축이라는 공통분모 하나만큼은 확실하지요.”
어쩌면 이것은 종걸에게 있어서, 경험이라기보단 신선한 충격인지도 몰랐다.
‘자만이란 본디 숨기려 해도 숨기기 힘든 법이거늘.’
20대의 성공한 사업가라 하여,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당돌한 젊은이를 상상했었다.
그것이 나쁘다 생각지도 않았다.
실제로 우진의 나이에 그만한 자수성가를 이뤄낸 케이스는 전대미문이라 할 만한 것이었으며.
그에 대한 자신감 또한 이뤄낸 결과물의 일부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사실 종걸은 오늘, 그 이십 대의 패기를 한번 쿡쿡 찔러볼 생각이었다.
아직 다 여물지 못한 열매가 완전히 영글었을 때.
얼마나 아름다운 과실이 열릴지, 그것을 나름대로 판단해 보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지금 종걸의 눈앞에 앉아있는 이십 대의 청년은, 그런 종걸의 예상과 계획을 완전히 깨 부숴버렸다.
종걸의 눈에 비친 그는, 이미 전부 여물은 사업가이자 건축가였던 것이다.
“서 대표의 이야기들은 정말 재미있군요. 옛 생각도 나고…….”
“하하, 그렇습니까?”
그래서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웃으며 대화를 나누던 종걸의 눈빛이 살짝 달라졌다.
“그래, 이번 성수지구의 설계 건이 끝나고 나면……. 다음 방향성은 정해두신 게 있습니까?”
“뭐, 진행 중인 프로젝트야 많습니다. 클라우드 파트너스에서 시행하는 지식산업센터도 곧 착공이고……. 아시다시피 천웅에서 주신 일도 몇 가지 남아 있고요.”
종걸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미시적인 관점에서의 프로젝트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제야 종걸의 질문 의도를 이해한 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저희 WJ 스튜디오의 사업 방향성이 궁금하신 거로군요.”
종걸의 눈이 다시 빛났다.
“바로 그렇습니다. 사실 업계에 WJ 스튜디오만큼, 특별한 회사는 드무니 말입니다.”
종걸이 웃으며 한 마디 덧붙였다.
“왠지 평범한 건설사의 길을 걸으려는 것 같지는 않아서 말이지요.”
종걸의 이 질문에, 우진은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무슨 속내일까.’
WJ 스튜디오의 사업 방향성이 궁금하다는 이 질문.
여기에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서, 어쩌면 천종걸이라는 사람과 우진의 관계의 방향성이 꽤 달라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진은 짧은 순간 수많은 생각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 결과.
결국 우진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있는 그대로의 본질이었다.
“건축을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합니다. 꽤 많이 필요하죠.”
예상치 못한 우진의 첫마디에, 종걸은 더욱 재미있다는 표정이 되었다.
“허허. 그렇지요.”
지금까지 건축과 열정에 대해 이야기한 우진이, 돈 얘기를 가장 먼저 할 줄은 몰랐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진의 이야기는 반전에 반전을 담고 있었다.
“제가 사업을 키우고 돈을 버는 이유는, 단지 그 때문일 뿐입니다.”
“그 때문일 뿐이라…….”
우진의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종걸이 짧게 되뇌었고, 우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WJ 스튜디오가, 지금보다 더 멋진 건축을 하고 더 아름다운 건물을 지을 수 있는 회사가 되길 바랍니다.”
종걸이 진심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멋지군요.”
어쩌면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우진은 지금 현실과 이상에 대한 이야기를 동시에 하고 있었다.
우진의 마지막 말이 다시 이어졌다.
“제 능력이 닿는다면……. WJ 스튜디오를 세계에서 가장 멋진 건축을 하는 회사로 만들어 보려 합니다.”
종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으로 그의 질문에 대한 답은 충분했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