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Cameo
금요일 아침.
우진은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대표님 표정이 좀 창백하신 것 같은데……. 착각인가?”
“착각이 아닐걸.”
“음?”
“아침부터 기분도 안 좋아 보이시고, 목소리도 착 잠기셨더라고.”
그리고 그 안 좋은 표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해지고 있었다.
정확히는, 점심시간이 다가올수록 말이다.
“대표님, 오늘 무슨 일 있으세요?”
“아, 네? 아뇨. 왜요?”
“기분이 좀 안 좋으신 것 같아서…….”
“아……. 그런 것 아닙니다. 속이 좀 더부룩한가 봐요. 걱정 마시고 일 보세요.”
“네, 대표님.”
직원들에게는 별일 없다 말했지만, 사실 우진은 오늘 별일이 있었다.
‘그 일’ 때문에 출근해서 지금까지도, 계속 극도의 긴장 상태였고 말이다.
‘아, 역시 괜히 한다고 했나? 아냐. 그래도 WJ 스튜디오 PPL을 공짜로 할 수 있는 기횐데…….’
수많은 서울시민들을 앞에 두고 디자인 피티를 할 때도 떨지 않았던 우진이었건만.
오늘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긴장한 상태였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오늘 하기로 약속되어있는 <천년의 그대> 번외편 촬영.
촬영 시간은 오후 2시부터였지만, 우진은 긴장 탓에 아침밥부터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대표님, 점심 먹으러 안 가?”
“먹고 와, 석구.”
“너 아침도 제대로 안 먹었다며. 다이어트라도 하냐?”
“진태 형이랑 먹고 와. 오늘 속이 좀 부대껴서 그래.”
“어쩔 수 없지 뭐.”
직원들은 오늘 우진에게 촬영 일정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것 때문에 우진의 상태가 이렇게 좋지 않다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디자인 피티는 물론 <우리 집에 왜 왔니> 예능에 출연할 때도, 우진이 긴장한 모습을 봤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우진의 입장에서 예능과 연기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우리 집에 왜 왔니> 촬영은 사실상 우진이 잘 알고 잘하는 것이 주제인 프로그램에서 그것을 하면 되는 상황이었지만.
연기는 머리털 나고 처음 접해보는 분야였으니까.
연기를 잘하기는커녕 대사나 까먹지 않을지, 그것부터가 걱정인 우진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직원들이 밖으로 나간 점심시간.
우진은 홀로 아주 심각한 표정이 되어 대표실에 앉아 있었다.
양손에는 대본을 꼭 쥔 채로 말이다.
‘하……. 오늘따라 연기하시는 배우님들이 존경스럽네.’
그리 길지도 않은 대본을 이미 수백 번도 넘게 읽었지만, 그래도 양손으로 꼭 붙들고 있어야 심신에 평화가 찾아오는 우진.
그런데 잠시 후.
그렇게 우진 홀로 앉아 있던 대표실에, 손님 한 명이 찾아왔다.
똑- 똑-
“들어오세요.”
“우와, 여기가 대표실이구나!”
“일찍 오셨네요.”
“오늘 같은 날 아니면 언제 이렇게 맘 놓고 구경하겠어요?”
“저희 사무실이요?”
“네. 정확히는 WJ 타워죠.”
그 손님의 정체는 다름 아닌, 오늘 우진과 호흡을 맞춰야 할 WJ 스튜디오의 신입사원(?) 성하영.
“커피라도 한 잔 타드릴까요?”
“오오! 대표님이 직접 타주시는 커피라니, 영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요.”
“그런데 대표님, 표정이 왜 이렇게 창백해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신입사원치고는 꽤나 고급스럽고 예쁜 오피스룩을 차려입고 온 하영은, 우진이 따라준 커피를 받아들고는 배시시 웃어 보였다.
* * *
시간이 지나 점심시간이 끝나고, 1시 반 정도가 되자, 촬영 인원들이 속속들이 WJ 타워로 모였다.
대표실이 있는 WJ 타워 최상층 로비는 제법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큰 공간이었고.
이곳에 <천년의 그대> 촬영 팀들이 모인 것이다.
오늘의 메인 촬영 장소는 ‘WJ 스튜디오 대표 서우진’과 ‘남자주인공 서후’가 사는 주상복합인 <서울숲 클라시아 포레스트>였지만.
첫 장면은 WJ 스튜디오 사옥에서 찍고 넘어가야 했다.
작중에서 ‘인서’는 WJ 스튜디오의 인턴이었고, 장면의 시작은 정직원이 되기 위해 대표자 면접을 보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오늘의 첫 번째 촬영장은, 다름 아닌 우진의 집무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로비에 모인 사람들 중에는, 촬영과는 별로 상관없어 보이는 인물들도 몇몇 있었다.
“헤이, 우진!”
“뭐야. 네가 왜 여기 있어?”
“우진이 <천년의 그대>에 출연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이 제이든 님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가만히 있었으면 좋겠는데.”
어디서 오늘 우진이 촬영한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잔뜩 흥분한 표정의 제이든이 로비에 와 있었던 것이다.
창백한 우진과 완전히 상반된 표정을 한 제이든은, 우진의 핀잔에도 전혀 기죽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렇지 않아 우진.”
“어째서?”
“우진은 드라마 촬영이 처음이잖아?”
“그런데?”
“이 제이든 님이 연기 코치를 해줄 수 있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우진의 대사는 항상 너무 dry하거든.”
“……?”
“우진은 제이든에게 reaction을 좀 배울 필요가 있어.”
“리액숀은 무슨. 시끄러워.”
오늘도 제이든의 이야기에 영양가는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의 호들갑은, 우진이 긴장을 푸는데 꽤 도움을 주었다.
‘후우. 제이든이 도움 될 때가 다 있네.’
우진이 잠시 제이든과 떠드는 사이, 촬영 장비는 전부 다 세팅이 되었다.
그래서 우진은 슬슬 촬영 준비를 위해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러 갔고.
그사이 도착한 민우가 제이든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인사했다.
“오, 제이든!”
“민우!”
“진짜 오랜만이야. 별일 없지?”
“제이든이야 항상 바쁘지. 하지만 오늘 우진의 연기를 코치하기 위해 시간을 좀 냈을 뿐이야.”
재작년 크리스마스에 처음 알게 됐던 두 사람은, 그때 함께 만났던 석현까지 셋이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래서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꽤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WJ 스튜디오에서 찍을 짧은 장면에 민우가 출연하는 컷은 없었기 때문에, 분주하게 움직이는 관계자들 중 민우는 여유가 좀 있었다.
“음, 이제 슬슬 촬영 시작인가.”
“Holy! 인서다!”
“제이든. 목소리를 조금만 낮춰주면 안 될까.”
“내가 인서를 눈앞에서 보다니! Bloody Hell!”
“…….”
“걱정 마 민우. 촬영을 시작하면 제이든은 조용할 거야. 제이든은 눈치가 제법 빠른 편이거든.”
“촬영 방금 시작했는데?”
“OK. I got it.”
촬영 스탭들의 눈초리를 한번 받은 제이든은, 입을 딱 다물고 촬영장 구석에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었다.
* * *
천년의 시간이 지난 뒤.
‘서후’는 또다시 같은 선택을 했다.
또 다를 것 없는 천년을 다시 보내게 되더라도.
한 치 망설임 없이 다시 인서를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천년 전과 같은 선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완전히 달랐다.
이것이 허락되지 않은 금단의 사랑인 것은 다를 바 없었지만, 서후와 인서 모두 기억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서후는 천년 전과 다를 바 없이 천신의 핏줄을 가지고 있었지만.
환생한 인서에게는 더 이상 신녀의 피가 흐르고 있지 않았으니까.
천년 전의 사랑이 천신궁의 순혈과 신녀의 사랑이었다면.
이제는 신녀가 아닌 인간과의 사랑이 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더 이상 죄가 없는 인서는 형벌을 받을 필요가 없었고.
오히려 인서의 업보까지 떠안게 된 서후는 과거보다 더 큰 형벌을 받게 되었다.
신격을 가진 자가 인간과의 사랑을 선택함으로서 받게 되는 형벌.
그것은 바로 신격의 박탈이었던 것이다.
서후의 몸에는 더 이상 신의 피가 아닌 인간의 피가 흐르게 되었던 것.
그래서 인간이 된 서후 또한, 더 이상 기억을 잃을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다름 아닌 서후가 가장 원하던 결말이었다.
천년 전 처음 인서를 선택했던 그 순간부터, 서후는 이미 신격 대신 그녀와의 사랑을 택했던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천년의 그대> 외전은, 이 모든 사건들이 지나간 뒤 행복하게 사랑하는 두 주인공의 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또각- 또각-
그래서 오늘도 인서는, 오전부터 기분이 들떠있었다.
오늘도 면접을 본 뒤 퇴근하면, 서후와 데이트를 할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면접을 잘 봐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떨리는 것은 별개였다.
그래서 대표실에 들어가는 인서의 표정은, 살짝 얼어있었다.
똑- 똑-
인서가 대표실 문을 두들기자, 안에서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로봇이 국어책을 읽는 것 마냥 어색함이 흘러넘치는 목소리.
그리고 다음 순간…….
“컷-!”
촬영이 시작된 지 정확히 10초 만에, 감독의 ‘컷’ 소리가 촬영장에 울려 퍼졌다.
아마도 우진이, 첫 대사부터 틀렸기 때문일 것이었다.
* * *
“아니, 서 대표님. 그냥 평소에 하시던 것처럼 하면 된다니까요?”
“펴, 평소에 하던 대로 한 겁니다만…….”
“하……. 그래도 처음보단 확실히 나아졌으니까, 이번에 딱 끝내보죠. 알겠죠?”
“최선을 다해볼게요.”
“그럼 다시, 레디……!”
역시나 촬영은 쉽지 않았다.
드라마 본방에서는 고작 3분도 차지하지 않는 짧은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NG 컷이 벌써 열 번 이상 반복된 것이다.
그래도 촬영장 분위기가 나쁘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스탭들과 배우들이, 이렇게 고생하게 될 거라고 처음부터 예상하고 왔으니까.
우진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은, 우진의 발 연기에 킬킬거리는 재미도 있었다.
“Holy! 제이든이 지금 들어가서 해도 우진보단 잘하겠어.”
제이든의 말에 옆에 있던 민우가 조심스레 동의했고.
“흠. 어쩌면 그럴지도…….”
그 옆에 있던 석현이 꺽꺽거리며 웃었다.
“그래도 뭔가 진도가 조금씩은 나가고 있잖아?”
“한번 NG가 날 때마다, 5초씩은 더 찍고 있는 것 같아, 민우.”
“발전이 있다는 건, 아주 긍정적인 일이지.”
“맞아. 우진에게 학습능력이 있다는 얘기니까.”
“크흠.”
세 사람이 작은 목소리로 떠드는 사이 어느새 촬영은 다시 속행되었고.
그래도 이제 꽤 익숙해졌는지, 처음 1분 정도는 NG 컷 없이 촬영이 속행되었다.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조 팀장님 추천을 받은 유인서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인서 씨. 일단 앉으세요.”
미리 세팅되어 있던 커피를 한 모금씩 마시며, 가볍게 대화를 시작하는 두 사람.
“인서 씨가 설계팀에서 인턴 했죠?”
“네, 대표님!”
“어떻던가요. 일은 할만 했어요?”
“다들 잘 가르쳐 주셔서……. 어려운 건 없었습니다!”
“하하,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사실 조 팀장님이 추천하셨으면, 반 이상은 이미 결정됐다고 봐도 되는 거니까요.”
“감사합니다!”
아직까지 많이 딱딱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큰 실수 없이 꽤 긴 대사들을 성공적으로 넘어간 우진.
하지만 다음 순간…….
“그래도 업계에서 저희 회사만큼 야근이 없는 회사도 없어요. 그렇죠?”
“네! 물론이죠. 설계팀에 야근이 이렇게 적은 회사는 처음 봐요.”
“하, 하하. 제가 야근 같은 건 정말 싫어하거든요. 업무라는 게 원래 정해진 시간에 효율적으로 해야…….”
감독의 NG컷이 떨어지기 전에, 우진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대사에 몰입하여 말하다 양심에 찔린(?) 탓에,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혀버린 것이다.
‘설계팀 어제도 야근했는데…….’
“컷-!”
NG 컷을 외친 감독도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었지만, 촬영장에 있던 몇몇은 우진의 말문이 막힌 이유를 알고 있었다.
“Bloody Hell! 우진은 거짓말쟁이야.”
“맞아. 아무래도 대본을 바꿔야 할 것 같아.”
그 사람들은 바로, 우진이라는 악덕 업주 밑에서 일해 본 경험이 있는 한 사람과.
바로 어제까지도 우진과 함께 야근했던 다른 한 사람이었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