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258화 (258/315)

258화

방해꾼

같은 설계의 영역이라 하더라도, 건축설계와 도시계획 설계는 완전히 다른 영역이다.

그러니까 카테고리가 어느 정도 겹칠 수는 있을지언정, 건축을 잘한다고 도시계획을 잘할 수 있다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우진은 처음부터, 이번 설계에 대한 미련이 전혀 없던 상태였다.

제대로 해 보지 않은 분야까지 욕심내기에는 이미 지금도 할 일이 산더미같이 많았으니까.

‘세트장이 관광 상품으로 더욱 성공하기 위해서라도……. 도시계획은 최대한 전문성 있는 업체에서 해줘야지.’

하지만 건축가협회는 다르다.

협회에 소속된 설계사무소들 중 덩치가 있는 대부분의 사무소들은 도시계획설계까지도 취급하는 곳들이 많았고.

그래서 우진은 곧바로 이 모든 상황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끝내 맞추지 못했던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을, 오늘 조용현 국장의 전화로 찾아낸 것이다.

‘그래, 역시 단순히 나에 대한 보복의 일환으로 감사를 진행했을 리는 없어. 감사 한 번 진행하는 데 저쪽에서도 적잖은 인력 소모를 해야 하니까.’

그러니까 우진이 여기서 찾아낸 마지막 퍼즐 조각이라는 것은, 바로 건축가협회가 연관되어있다는 사실이었다.

우진이 연관되어있는 사업장이라는 사실을 모를 리 없는데, 이런 식으로 작년 성수지구 설계 공모 때와 똑같은 패턴을 그대로 반복했다는 말은.

이번에는 확실한 승산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일 터.

우진은 감사를 통해 자신을 밀어내고 택지조성부터 시작해서 모든 설계권을 싹 빼앗아가는 것이 저들의 계획임을 비로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노골적으로 이렇게 나온다는 건, 날 이길 확실한 패를 가지고 있다는 얘길 거고……. 그 ’패‘ 라는 건 아무래도…….’

우진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내가 비리를 저질렀다는 확신이겠지.’

만약 우진이 협회장 권주열의 성향을 더 확실하게 알고 있었더라면.

국토부 운영과의 압력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여기까지 떠올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진은 권주열이라는 사람에 대해 그렇게 잘 알지 못했고, 그래서 우진 자신의 비리를 확인조차 하지 않은 상황에서 움직일 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우진이 원래 예상했던 수준은, 감사 이후 우진의 비리가 밝혀지면 그때 추가적인 액션을 취하지 않을까 하는 정도.

‘이것 참……. 뭐 눈엔 뭐만 보인다더니…….’

저들의 계획을 알았음에도, 우진은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분은 좋아졌다.

기존에는 타격유무를 떠나 대응할 방법이 없는 속수무책의 상황이었다면, 이제는 저들이 반대로 사업권을 따내려는 상황이었으니 제대로 물을 먹여줄 수 있게 된 것이다.

물을 먹여 줄 방법은 간단하다.

‘당황한 척 연기 좀 해주다가……. 미끼를 물면 그대로 싹 낚아 올리면 되겠지.’

[저기…… 대표님? 들리세요? 갑자기 전화가 왜 이러지.]

뚜- 뚜-

우진이 갑작스레 말을 멈추자 전화가 먹통이 됐다고 생각했는지, 조용현 국장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에 우진은 곧바로 다시 전화를 걸어, 하려던 이야기를 마무리하였다.

“아, 제가 잠깐 생각 좀 하느라 대화가 끊겼네요. 죄송합니다.”

[아, 그랬구나. 저는 제 전화가 가끔 이래서, 또 먹통 된 줄 알고…….]

“일단 말씀하신 대로, 공모 참가 사가 한 곳뿐이니 거기로 진행해야죠 뭐.”

[네. 저도 이미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알고는 계셔야 할 듯하여 확인 차 전화 드렸던 겁니다.]

“네, 국장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부분이 일단락되자, 조용현 국장이 다음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런데 참가사가 한곳 뿐이니 좋은 점도 있네요.]

“어떤 점이요?”

[심사 과정이 간소화될 수 있잖습니까.]

“아하.”

[물론 <금성설계사무소>라는 곳의 역량검증은 필요하겠지만, 기존에 잡아뒀던 일정보다 일주일 이상은 단축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건 좋네요.”

조용현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대표님.]

“네, 말씀하세요.”

[이제 사실상 기본설계 업체까지 선정된 거나 다름이 없으니, 곧바로 다음 공모 진행해보는 건 어떨까 해서요.]

“다음 공모라면…….”

[아직 사업계획안이 다 나온 건 아닌데, 아마 공공시설 부지만 2천 평 정도는 지정될 테니까요.]

관광특구로 지정되기 위해서는 관광객의 유치가 기본이지만, 그렇게 유입된 관광객들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들과 문화공간이 필수적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숙박 시설.

대부분의 콘도나 호텔부지가 민간사업으로 진행되긴 하겠지만, 이천시 예산으로 진행될 공공시설들이 분명히 있는 것이다.

그런 공공시설들에 대한 설계 공모도 당연히 이뤄져야 했으니, 조용현 국장은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우진은 그의 의도를 알아챘지만, 짐짓 모른 척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그야, 국장님 재량이죠. 공모야 언제든 진행해 주시면…….”

[하하. 건축설계 공모 쪽으로는, WJ 스튜디오도 참여하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를 해드리는 거죠.]

“아하.”

[뭐, 원래도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감사까지 들어오는 마당에 특혜를 드리는 건 당연히 아닙니다.]

“그야 당연하죠.”

[하지만 공모 일정 정도야, 미리 귀띔 드릴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하하.]

“감사합니다, 국장님. 그럼 조만간 진행하시는 거로 알고, 저희도 준비 좀 해두겠습니다.”

[아마 대부분 민자사업으로 빠질 거라 큰 건이 많지는 않을 텐데, 그래도 굵직한 거 한두 개는 있을 겁니다.]

조용현 국장과 대화를 좀 더 나눈 우진은, 전화를 끊은 뒤 곧바로 회의를 소집하였다.

원래도 프로젝트를 허투루 준비하던 상황은 아니었지만, 더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났다.

* * *

새해의 첫 달도 순식간에 전부 지나갔다.

그리고 시간이 이만큼 지났다는 것은, <천년의 그대> 방영도 반환점을 지났다는 이야기였다.

12월 초에 첫 방영을 시작했던 천년의 그대는.

1월의 셋째 주 목요일이 지난 지금, 어느새 14화까지 방영이 끝난 상태였다.

그리고 우진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예상했듯, <천년의 그대>의 주가는 날이 갈수록 가파르게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천년의 그대>, 성하영. 애틋한 로맨스 연기로 ‘시선집중’.]

[<천년의 그대>. 이번 주도 자체 최고 시청률 0.2% 경신!]

[수목드라마 <천년의 그대>. 시청률 고공행진은 어디까지?]

[돌아온 아역배우 민우! 이제는 아역배우 아닌, ‘국민배우’ 등극!]

[<천년의 그대> 민우(작중 서후)에게 다시 찾아온 선택. 천년 전의 사랑은 다시 이뤄질 수 있을까?]

……후략……

<천년의 그대>가 휩쓸고 다니는 폭풍적인 인기 때문에, 동시간대 방영한 타 방송국 드라마들이 전부 조기종영을 이야기할 정도.

그래서 소정은, 오늘도 함박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강 대표님, 이거 너무하시는 것 아닙니까?]

“뭐가요?”

[아니, 혼자 다 해 먹으시면 어떡합니까. 최고시청률 47퍼센트라니……. 2013년에 이게 말이 되는 얘깁니까.]

“프하하. 그러니까 권 대표님도, 제가 투자하랄 때 하셨어야죠.”

[딱 한 번 권유하고 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삼고초려까진 아니더라도 두 번은 물어봐 주셨어야죠.]

“어머, 분명히 두 번은 물어봤던 것 같은데……. 왜 기억을 왜곡하실까.”

[……. 멱살을 잡아서라도 제 돈을 뺐어가셨어야죠…….]

“푸훗. 아무튼 조만간 제가 한턱 낼 테니까, 시간이나 잡아 봐요.”

[후우. 배 아파서 밥이 목구멍에 잘 넘어갈진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얻어먹긴 해야겠으니. 알겠습니다. 곧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소정 씨.]

“그래요. 유인건 PD님도 대표님 오랜만에 뵙고 싶다니까, 같이 뵙죠.”

[하, 유PD 그 인간……. 보나 마나 깐족거릴 텐데…….]

“흐흐흐. 이게 다 업보 아니겠어요?”

점심 식사를 마친 직후.

친한 기획사 대표와 통화를 마친 소정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짐을 챙기기 시작하였다.

물론 퇴근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대낮에 퇴근할 수 있을 정도로, 소정이 할 일 없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다만 오늘은 꽤 중요한 일이 오후에 있었기 때문에, 외근을 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감독님, 준비 다 되셨죠?”

“저야 아까 준비 끝났습니다만……. 같이 가자 셔서 일부러 일찍 나왔더니, 무슨 통화를 그리 오래 하세요?”

“호호 누구한테 자랑 좀 하느라고요.”

“드라마요?”

“당연하죠.”

“그런 거라면 인정합니다.”

사옥 로비에 있던 임수호 감독과 만난 소정은, 곧바로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에 함께 탔다.

두 사람의 목적지는 성수동.

오늘 소정의 오후 일정은, 다름 아닌 <서울숲 클라시아 포레스트>에 있었다.

운전석에 앉은 소정이 시동을 걸자, 옆에 앉아있던 임수호가 문득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대표님.”

“네?”

“서 대표님은 진짜 어떻게 꼬신 겁니까?”

“프흐흐.”

“제가 아무리 뽐뿌 넣어도 꼼짝도 않으시던데.”

“다 방법이 있죠.”

“혹시 미인계라던가.”

“물론 제가 한 미모 하긴 하지만, 아쉽게도 그건 아니네요.”

오늘 오후 두 사람의 일정은, 다름 아닌 <천년의 그대> 촬영 일정이었다.

이미 사전제작이 끝나 방영 중인 드라마에 촬영 일정이 잡힌 이유는, 당연히 번외편이 확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임수호 감독이 계산에 넣어두고 있었던, 종방 이후 들어갈 번외편 스토리.

그러나 조금 달라진 점은, 수많은 사람들의 요청으로 번외편이 생각보다 길어졌다는 점이었다.

원래 1화나 2화 정도로 끝내려고 했던 번외편을, 무려 여섯편이나 촬영하게 된 것.

심지어 이미 여섯 편으로 계획된 번외편들 중, 네 화 분량은 전부 촬영이 끝난 상태였다.

그래서 오늘 촬영하기로 계획된 부분은 우진이 까메오로 등장하기로 약속한 촬영 분량이었다.

“서 대표님 연기 연습도 엄청 열심히 하셨다던데.”

소정의 이야기에, 감독이 반색하며 반문하였다.

“오, 그래요?”

우진이 그렇게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스토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중요한 장면들에서 까메오로 활약하기로 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의 기대감은 그대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민우가 그랬어요. 소질은 없는데, 열심히 하긴 하더라고.”

“…….”

“그래도 로봇을 사람 만들어 놨다고, 편집만 잘하면 최악은 면할 수 있을 거래요.”

“거, 너무 냉정한 평가 아닙니까.”

“감독님이 잘 커버해 주세요. 우리 서 대표님, 흑역사는 면해야죠.”

“노력이야…… 해 보겠습니다.”

오늘 촬영될 번외편의 스토리는, 작중에 여주인공 인서가 주소를 잘못 찾아 엉뚱한 집을 찾아가는 에피소드였다.

<천년의 그대>에서 현대에 환생한 인서는 WJ 스튜디오의 신입사원으로 설정되어 있었는데, ‘서후’의 집을 찾아간다는 것이 WJ 스튜디오 대표인 우진의 집을 잘못 찾아가는 것으로 오해가 시작되는 스토리였던 것이다.

다행히(?) 실제 우진의 집에서 촬영될 예정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우진의 집과 같은 아파트인 <서울 숲 클라시아 포레스트>에서 촬영될 예정인 번외편.

소정은 우진의 발연기가 기대되는지 운전하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피식 피식 실소를 터뜨렸고.

오늘 촬영에 고민이 가득해진 임수호 감독은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었다.

하여 그렇게 30분 정도가 지났을까?

두 사람은 성수동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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