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240화 (240/315)

240화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젓는 방법

미디어의 파괴력은 상상 이상이다.

특히나 <우리 집에 왜 왔니>처럼, 예능 시청률 최상위 권을 장기간 유지해 온 메이저 예능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첫 방영이 시작한 지 2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에 <우리 집에 왜 왔니>라는 프로를 모르는 사람은 찾기 힘들 정도였고.

때문에 지금 <우리 집에 왜 왔니>는, 유명 연예인들도 게스트로 한 번쯤 출연하고 싶어 할 만큼 인지도 높은 프로그램이었다.

이런 이유로, 조용현 국장이 놀란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우진은 지금 이 정도 인지도 있는 프로그램에, 촬영장소와 컨텐츠를 제안해줄 수 있을 정도로 영향력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었으니까.

그래서 우진의 제안을 들은 조용현의 첫 마디는, 거의 정해져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 그런 게 정말 가능합니까?”

조용현이 물었고, 우진은 망설임 없이 대답하였다.

“가능합니다.”

“가능할 수도 있다는 게 아니고……. 확실히 가능하다는 이야기지요?”

“물론입니다.”

우진의 대답은 단호함이 느껴질 정도로 간결했고, 순간적으로 말을 잃은 조용현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이거…… 허세 아니야?’

초기 출연진인 만큼 우진이 <우리 집에 왜 왔니> PD와 친분이 있을 수 있다고는 충분히 생각하지만.

친분이 있다고 해서 프로그램의 향방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진의 장담이, 조용현의 입장에서는 허장성세로 느껴지는 게 당연했다.

물론 우진은 절대 허세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역시 쉽게 믿지는 못하려나?’

이것은 사실 이천시와의 딜이 아니었더라도, 이미 우진이 지난주부터 추진하고 있던 계획이었으니까.

[서 대표! 지난주 방송 봤죠?]

[봤습니다.]

[어때요. 내가 확실하게 밀어줬지?]

[그러게요. 지난주 방영분에는, 확실히 제 언급이 많더군요.]

어차피 이천시와의 거래를 배제하고라도, 우진의 입장에선 이 <천년의 그대>와 연관된 모든 프로젝트들이 최대한 잘 되어야만 한다.

리빙페어부터 시작해서 세트장 부지까지.

마치 복잡하게 뒤엉킨 실타래처럼, 우진은 이 프로젝트의 어디에도 연관되어 있지 않은 곳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얼마 전 공PD와의 통화에서, 이미 우진은 슬쩍 운을 떼어본 바 있었다.

[말했잖아요. 내가 신경 많이 썼다니까. 자료화면으로 그…… 그, 왕십리 파빌리온까지 띄운 거 봤죠?]

[봤습니다.]

[흐흐. 그럼 이제 나는 약속을 지켰으니까……. 서 대표가 약속을 지킬 차례네요.]

[흐음. 그렇겠네요.]

[아, 진짜. 서 대표. 이제 그만 빼고 한번 나와 줄 때도 됐잖아?]

우진은 <우리 집에 왜 왔니>에 오랜만에 출연하기로 한 공PD와의 약속을 지키면서, 바로 이 세트장에서의 촬영까지도 슬쩍 떡밥을 흘렸었다.

아주 먹음직스럽게 말이다.

[물론이죠, 피디님. 제가 언제 약속 안 지키는 것 봤습니까?]

[어. 음……. 그렇긴 하죠.]

[당연히 PD님께 약속드린 대로 조만간 출연하긴 할 건데…….]

[그런데요?]

[그 촬영 관련해서, 제가 제안 하나 드려도 돼요?]

[제안이라면…….]

[피디님 좋아하실만한 괜찮은 컨텐츠가 하나 있거든요.]

[오호라.]

[어때요. 한번 들어 보십니까?]

[좋아요.]

우진이 공PD에게 흘린 떡밥이 바로, <천년의 그대> 세트장을 <우리집에 왜 왔니> 촬영장으로 활용하는 것.

그리고 이것은, 모두의 이해관계를 최대한으로 활용한 짜임새 있는 제안이었다.

[그 이천에 있는 <천년의 그대> 세트장 말인데요. 거기가 제가 디자인하고 시공한 세트장인 것 아시죠?]

[알죠.]

[제가 오랜만에 출연하는 특집 방송에서, 거기를 촬영장으로 무상임대 해드릴까 하는데…….]

[오……?!]

[흐흐. 구미가 좀 당기시죠?]

사람의 말이라는 것은 본래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다.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우진은 ‘세트장을 무상으로 빌려주겠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함으로써 오히려 공PD와 <우리집에 왜 왔니> 촬영팀이 이득을 보는 것처럼 느끼도록 만들었고.

때문에 공PD는 우진이 어떤 요구를 한다는 생각보다는, 호의를 보여준다는 생각이 먼저 들게 된 것이다.

[대박. 당연하죠! 잘됐다! 컨텐츠 떨어져서 뭐 해야 되나 고민이었는데.]

물론 우진이 아무리 말을 잘해도 공PD의 입장에서 없던 이득이 생기지는 않는다.

다만 우진의 이 제안은 지금 <우리집에 왜 왔니>와 공PD에게 분명히 도움이 될 만한 제안이었는데, 그것이 더욱 부각 되어 보이도록 이야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컨텐츠 재밌게 잘 짜주시면, 제가 강 대표님께도 한번 연결해 드릴게요.]

[강 대표님이요? 아! 강소정 대표님?!]

[네. 기왕에 <천년의 그대> 세트장에서 촬영하는 거, 드라마 출연 배우들까지 같이 섭외해 주면 그림이 더 나오잖아요?]

[오오……! 그 생각까지는 못 했는데.]

[그럼, 이렇게 한번 진행해 보십니까?]

[저는 당연히 좋아요. 크으……! 역시 서 대표님 붙들고 늘어지면 뭐라도 하나씩 건진다니까!]

그리고 이렇게 Deal이 성립되고 나면, 우진은 이렇게 얘기한다.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더 고맙죠, PD님.]

[옙?]

[덕분에 제 세트장 홍보도 되고……. 아마 강 대표님도 고마워하실 거예요. 소속사 배우들이 <우리 집에 왜 왔니>에 출연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거잖아요?]

이렇게 되면 상대의 입장에서는, 우진과의 대화 안에서 기분이 나빠지려야 나빠질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이래서 우리 서 대표님 좋아한다니까.]

[감사합니다.]

[여튼, 그럼 조만간 봐요.]

[네, PD님. 제가 강소정 대표님께는 지금 바로 전화 넣어놓을게요.]

[굿! 좋아요!]

어찌 됐든 이미 공PD와 우진의 사이에서는 이러한 대화가 오간 상황이었고.

때문에 이천시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든, 다음 주 정도면 세트장에서 <우리 집에 왜 왔니>의 촬영 일정이 잡힐 것이다.

하지만 조용현 국장은 이런 사실을 알 턱이 없었고, 그래서 우진이 던진 이 제안을 거부할 수 없을 터였다.

방송을 한 번 타는 것만큼, 지역의 인지도를 확 끌어올릴 수 있는 방법은 없었으니 말이다.

“만약 대표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되기만 한다면……. 그것만큼 좋은 것은 없겠지만…….”

말꼬리를 살짝 흐리는 조용현을 향해, 우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서 조 국장에게 확신을 심어주고 필요한 것을 얻어내야, 모든 계획이 완벽해진다.

“그럼 이건 어떻겠습니까, 국장님?”

“네?”

우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힘주어 말했다.

“제가 먼저 <우리 집에 왜 왔니>촬영 일정을 픽스하고, 관련 서류를 첨부하여 메일로 드리겠습니다.”

“……!”

“그럼 그 날짜를 기점으로, 국장님께서도 움직여 주시지요.”

이런 경우, 설득은 무의미하다고 우진은 생각했다.

행동으로 최대한 빠르게 보여주는 게, 이런 타입의 인물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인 것.

그래서 우진은 승부수를 던진 것이었고, 그것은 아주 확실한 한 수였다.

“그게, 정말입니까?”

“물론입니다.”

우진의 확언을 들은 뒤, 조용현의 두 눈이 비로소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 정도 파급력을 가진 플랜이 확정적으로 가시화된다면.

그 또한 우진을 지원할 명분이 충분히 생기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마음을 정한 조용현이, 우진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서 대표님을 믿고, 일단 서류작업부터 전부 해 놓겠습니다. 액션이야 서 대표님 서류 받아보고 진행하겠지만, 준비는 먼저 할 수 있는 거니까요.”

“감사합니다, 국장님. 그래주시면 정말 좋죠.”

“그리고 말씀드렸던 대로, 저희 문화국의 첫 번째 스텝은 인근 임야의 용도변경이 될 겁니다.”

“그 또한 좋습니다.”

조국장의 이야기에 우진은 만족스런 표정이 되었다.

실무자가 우진이 기대했던 이상으로 일처리가 명석하다고 느껴졌으니 말이다.

그런데 조용현의 이야기가 여기서 끝은 아니었다.

그는 공과 사를 확실하게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알아주셔야 할 부분이, 이 용도변경이라는 행정절차가 생각보다 많이 까다롭다는 점입니다.”

“그 말씀은…….”

“공시가 나기까지 꽤 긴 시간이 걸린 이야기지요.”

“아하, 그야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택지조성에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닌 대지는, 용도변경 대상에서 제외될 겁니다.”

조 국장이 말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한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고…….

“용변 대상에서, 이미 세트장이 지어져 있는 해당 부지는 제외된다는 말씀이지요?”

이렇게 정확히 짚어낼 줄 몰랐는지, 조 국장은 다시 한번 놀랐다.

“헛……! 바로 그렇습니다.”

이 택지조성이라는 것은 결국 세트장이 들어선 부지 주변에 관광시설을 유치하기 위한 개발사업이다.

때문에 이미 세트장이 지어져 있는 땅은 용도변경을 할 이유가 전혀 없다.

건축된 세트장 자체가, 이미 본래 토지 용도에 맞는 건축법에 의거하여 합법적으로 지어진 건물일 테니까.

하지만 용도변경 자체가 지가 상승을 불러오는 트리거였기 때문에, 조 국장은 우진이 세트장 부지의 용도변경을 기대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던 것이었는데.

우진은 여기까지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트장까지 용도 변경해서 상업지로 만들어주면 좋겠지만, 그건 너무 도둑놈 심보지.’

어차피 주변 지가가 오른다면, 용적률 낮은 세트장 부지도 어느 정도 땅값이 따라서 오르게 되어 있다.

게다가 우진은 이미 세트장 주변의 대지를 광범위하게 매입해 두었으니, 그 부지 일부도 분명 용도변경 대상에 포함될 것이다.

이 정도의 이득이면, 우진은 충분히 만족했다.

“그럼 어느 정도 얘기가 정리된 것 같군요, 국장님.”

“그렇습니다. 서 대표님께서 워낙 파격적인 제안을 해 주신 덕에…….”

“아닙니다. 솔직히 이천시에서 제시해주신 계획들이 훨씬 더 파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일 얘기가 얼추 마무리됐지만, 우진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조용현이라는 사람이 꽤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었기에, 잡담을 조금 더 나눈 것이다.

우진은 꽤나 큰 커피잔이 바닥을 보일 즈음에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국장님, 촬영 일정 잡혔을 때 연락 드리겠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서 대표님. 그날 꼭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따님도 함께 오시는 거죠?”

“물론입니다. 우리 집에 왜 왔니 출연진분들 싸인 받으러라도 꼭 가야지요.”

진태와 함께 회의실에서 나온 우진은, 천천히 주차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휘적휘적 걷는 우진을 따라 걷던 진태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야, 우진아.”

“응?”

“난 오늘 대체 왜 데려온 거냐?”

사실상 진태는 오늘 자리에서, 거의 한마디도 한 바가 없었다.

그저 웃고 떠들 때에나 맞장구를 치고 추임새를 넣으며, 조금씩 거들었을 뿐.

하지만 당연히 우진은, 진태를 운전기사로 부려먹으려 데려온 것이 아니었다.

“형도 자꾸 봐야하니까.”

“응?”

“앞으로 이런 미팅이 계속 더 많아질 텐데……. 내가 계속 갈 순 없잖아?”

“아……!”

우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가장 믿을만한 사람이 형이랑 석현인데, 걘 좀 그래.”

“왜?”

“맨날 같이 있으면서 몰라? 쑥맥이잖아.”

“그건 그렇지.”

“아마 미팅 보내 놓으면, 어버버하다가 그냥 돌아올걸?”

진태와 떠들며 주차장에 도착한 우진은, 조수석에 앉아 창밖을 응시하였다.

오늘의 미팅이 생각보다 더욱 깔끔하게 잘 풀려서인지, 우진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밝아 보였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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