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젓는 방법
‘관광특구’로 지정되기 위해서는, 총 세 가지 단계를 거쳐야 한다.
일단 첫 번째는, 이천시에서 제안한 부분인 ‘관광특구 후보지’ 선정.
이 단계까지는 사실, 실질적인 근거가 없어도 추진이 가능한 단계이다.
후보지라는 건 결국 이천시와 같은 지자체에서 해당 지역을 관광특구로 밀어보기 위한 후보로 채택한다는 것인데.
후보지로 선정된다고 해서 행정상으로 약속되는 혜택 같은 것은 없는 부분이었으니까.
그래서 정부 기관으로부터 정말 실질적인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두 번째 단계에 들어서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관광특구 예비지정’이었다.
예비지정 단계에 들어간 지역은 결정권이 있는 상위 행정기관에서도 이곳을 관광특구로 지정할 의향이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었고.
그때부터는 해당 지역을 제대로 된 관광특구로 만들어보기 위해, 도 차원에서 다양한 지원이 서류상으로 약속하게 된다.
이렇게 서류상으로 지원이 약속된 다음에는, 사실 마지막 단계인 구역지정이 기정사실화되는 것이고 말이다.
우진이 허울뿐인 후보지 지정을 걱정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예비지정이 아닌 후보지 지정 정도는 사실상 이천시에서 언제든 철회할 수 있는 행정절차였으니까.
그래서 오 사무관으로부터 이천시의 제안을 듣자마자, 우진은 곧바로 이천시청의 문화국과 약속을 잡았다.
이제 리빙페어도 코앞으로 다가왔으니, 시간 끌 것 없이 빠르게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 말이다.
강소정 대표로부터는, 금전적인 부분을 제외한 드라마와 관련된 협상의 전권을 위임받았다.
그녀가 우진을 얼마나 믿는지 잘 보여주는 방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자, 이제 거의 다 온 건가?”
“맞아. 저쪽 큰길로 우회전하면 될 거야.”
오늘 우진과 함께 이천시청에 온 사람은, 다름 아닌 진태였다.
원래는 오 사무관과 함께 오려 했었지만, 갑작스레 업무가 생겨 진태와 동행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딱히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오 사무관과는 사전에 이야기를 다 나눈 상황이었으니까.
끼이익-
이천시청의 주차장은 서울과 달리 무척이나 널널했고.
시청 입구에서 가까운 곳에 여유롭게 차를 댄 우진과 진태는 성큼성큼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계단을 올라 문화국을 찾아가자, 이천시 문화국장 조용현이 두 사람을 맞아주었다.
“오! 반갑습니다, 문화국장 조용현이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WJ 스튜디오 대표 서우진입니다.”
“이사 김진탭니다.”
“하하, TV에서나 뵙던 분을 이렇게 코앞에서 만나 뵙게 되다니, 이거 연예인이라도 만난 기분입니다. 허허.”
“연예인이라니요. 하하. 이거 부담스럽네요.”
“여튼 이쪽으로 오시지요. 회의실을 한 자리 비워두었습니다.”
문화국장 조용현은, 투실투실한 외모의 푸짐한 인상을 가진 호인이었다.
나이는 대략 40대 초반 정도로, 진태보다 조금 더 많아 보이는 느낌이었다.
작은 원탁이 놓여있는 회의실에는 얼음이 동동 떠 있는 냉커피가 준비되어 있었고.
세 사람은 거의 동시에 자리에 앉았다.
“오는 길에 차는 막히지 않으시던가요?”
“뭐, 언제나 그렇듯……. 서울만 빠져나오면 한산하지요.”
“허허. 다행입니다. 점심시간 잘못 걸리면, 요 앞에 로터리도 엄청 막힐 때가 있긴 하거든요.”
일단 우진과 조 국장은, 커피를 마시며 가벼운 이야기들을 나눴다.
중요한 미팅을 위해 오기는 했지만,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일 얘기부터 꺼내는 것도 이상했으니까.
그래서 한 십여 분 정도 잡담을 한 뒤에야, 본론이 슬슬 시작되었다.
“일단 오 사무관님 통해서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오오. 사무관님께서 말씀하시기로는, 서 대표님께서 꽤 긍정적으로 제안을 수용해 주셨다고 들었는데요.”
“물론입니다. 관광특구로 지정된다면, 세트장은 물론 드라마에도 큰 도움이 될 테니까요.”
이야기가 시작되자, 우진과 조 국장의 표정은 확실히 달라졌다.
웃음기 어린 밝은 표정인 것은 같았지만, 확실히 진지한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조 국장의 입장에서도, 우진의 입장에서도.
이번 딜은 무척이나 중요했으니, 당연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조 국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미 사무관님께 들으셨겠지만, 관광특구를 만들어내는 것은 저희 이천시의 숙원사업입니다.”
“예,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시에 지어진 드라마 세트장이 서 대표님의 작품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 이거다 싶었지요.”
일단 협상의 시작점에서.
먼저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한 것은 조 국장이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꽤나 진솔한 것들이었다.
“사실 저는 건축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서대 표님의 건축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당연히 그렇겠지요.”
조 국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제가 본 것은, 서 대표님의 인지돕니다. <우리 집에 왜 왔니>는 저도 딸아이와 함께 무척 재밌게 봤던 프로그램이었고……. 서 대표님께서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건축가라는 것까지도 사실이니까요. 제 주관이나 어떤 판단이 필요 없는 사실 말입니다.”
우진은 무척이나 흥미로운 표정이 되었다.
조 국장이라는 사람은, 첫인상과 달리 또 새로운 캐릭터였으니 말이다.
많은 협상테이블에 앉아 본 우진은 그만큼 많은 유형의 실무자를 겪어보았는데.
이렇게 조 국장처럼 자신이 가진 패를 전부 꺼내놓으며 협상을 시작하는 유형은 처음이었다.
“최근에 이슈 됐던 서 대표님의 프레젠테이션 영상도 봤습니다. 직원 한 분이 알려주시더군요.”
“이거 부끄럽네요.”
조 국장은 우진이라는 인물의 인지도와, <천년의 그대>라는 드라마에 투입된 제작비에 대한 이야기들. 그리고 곧 서울시에서 진행될 국제 리빙페어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였다.
그것들이 지금 우진이 디자인한 세트장이 훌륭한 관광지로 성장하기 위한 가능성이자 근거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진은 이러한 조 국장의 화법을 들으면서, 나쁘지 않은 전략이라고 생각했다.
조 국장은 시에서 느끼고 있는 <천년의 그대 세트장>에 대한 매력을 솔직하게 이야기하여 먼저 우진의 호감을 산 셈이었으니까.
이렇게 먼저 호감을 사놓는다면, 이후에 아쉬운 소리를 하기도 좀 더 쉬워지는 법이다.
어느 정도 조 국장의 이야기가 일단락된 뒤, 우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이천시에서 가장 원하는 것은, 결국 관광특구 지정을 통한 지역경제의 활성화겠네요?”
조 국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바로 그렇습니다.”
이야기를 하느라 목이 탔는지,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인 조 국장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저희는 서 대표님과 최대한 협력해보고 싶습니다. ‘후보지 지정’이라는 말씀을 드린 것도, 그런 의지의 표현이라고 생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지원을 약속드리겠다는 의지 말입니다.”
우진은 속으로 슬쩍 웃었다.
조 국장의 말에서, 약간의 ‘뼈’를 느낀 것이다.
‘가능한 범위 내라…….’
우진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지금부터가 협상의 시작이었다.
“국장님.”
“네, 말씀하시지요.”
“그럼 혹시, 그 ‘지원’이라는 게 어떤 부분들이 될 수 있을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
“저희도 좀 더 적극적으로 협력 드릴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해왔습니다만……. 이천시에서 어느 정도로 지원이 가능한지를 알아야 말씀드릴 수 있는 부분이라서요.”
“허헛.”
조금 멋쩍은 표정이 된 조국장을 힐끔 살핀 우진이, 떡밥을 하나씩 꺼내어 던졌다.
“이를테면 <국제 리빙페어>의 마케팅 전단에 이천시 관광지역 개발계획에 대한 홍보를 해드릴 수도 있고…….”
“……!!”
“드라마 방영기간동안, 한시적으로 세트장을 무료 개방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방영 이후에는, 팬 사인회 장소를 이곳 세트장으로 잡을 수도 있겠고요.”
“확…… 실히 매력적인 이야기들이로군요.”
“그렇지요?”
우진의 반문에 조국장이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우진이 꺼낸 이런 이야기들은, 자신으로서는 제안해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우진의 얘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하지만 전 아직 가장 중요한 제안들은 꺼내지도 않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제안들이라니요?”
“국장님께서 가장 탐내실 만한, 실질적이고 확실한 제안들 말입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조 국장은 놀람을 숨기지 않았고, 우진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국장님께 여쭙는 겁니다.”
“‘지원’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들 말이지요?”
“예, 국장님.”
회의실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그것이 부정적인 분위기의 침묵은 아니었다.
다만 조 국장이 머릿속에 가지고 있던 제안들을 다시 한번 정리하고 있었으며, 우진이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여 잠시 동안의 침묵이 지나간 뒤.
조 국장의 입이 다시 열렸다.
“우선, 가장 먼저 지원 드리려 했던 부분은, 세트장이 지어진 인근 임야의 용도변경 건입니다.”
“오호.”
“일단 주변 지역에 관광시설이 들어올 수 있도록, 용도변경을 통해서 숨통을 트여놓는 것이지요.”
이번에는 우진이 놀란 표정이 되었다.
이 첫 번째 이야기만 들어봐도, 조 국장이 간만 보려 한 것이 아님은 알 수 있었으니 말이다.
가장 먼저 꺼내놓은 제안부터, 우진이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파격적이었던 것.
용도변경이라는 것은, 결코 간단한 행정절차가 아니었다.
‘확실히 주변 임야 일부의 용도변경만 진행된다하더라도……. 관광시설 유치가 편해지는 게 사실이지.’
지금 우진이 세트장을 지은 부지의 가장 큰 단점은, 주변이 임야로 둘러싸여 있어 상업 시설이 들어서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점이었다.
이천 도심과 가깝고 교통이 좋음에도 불구하고, 땅값이 쌌던 것이 바로 그런 이유 때문.
그래서 이 하나의 제안만으로도, 충분히 파격적인 딜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조 국장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 첫 번째 스텝이 진행되고 나면, 그 뒤에는 택지개발계획을 띄워 볼 생각입니다.”
택지개발이란.
대규모의 토지를 대상으로 도로 건설 등의 공공시설 정비를 시작으로, 건물이 지어질 수 있는 택지를 조성하는 개발 행위를 의미한다.
물론 관광특구로 지정되기 위해서는 무조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택지개발이었지만.
드라마든 리빙페어든 어떤 결과가 가시화되기도 전에 이런 이야기를 실무자가 먼저 꺼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
조용현 국장은 그 이후에도 여러 가지 구체적인 계획들을 이야기해주었고, 그것들은 하나하나 우진이 기대했던 수준을 충분히 충족시킬만한 것들이었다.
때문에 우진은 본인도 가지고 온 패를 전부 꺼내어 보이기로 결정하였다.
지금 조용현이 제시한 제안들 역시 당장 해주겠다는 것이 아니었고.
서로의 제안이 하나씩 진행되면서 순차적으로 이행될 부분들이었으니까.
그래서 우진은, 오늘 이 자리에 들고 온 가장 매력적인 카드 하나를 조용현 국장의 앞에 꺼내 들었다.
“좋습니다. 그럼 이천시에서 저희에게 보여주실 수 있는 원 스텝은, 인근 임야의 용도변경 건인 거죠?”
“그렇습니다.”
“정말 시에서 그 정도로 사전지원이 가능하다면…….”
잠시 뜸을 들인 우진이, 은근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월말에 방영 예정인 <우리 집에 왜 왔니> 특집을, 이천시 세트장에서 촬영하도록 한번 추진해 보겠습니다.”
정말 상상조차 못 한 이야기를 들은 조용현 국장의 두 눈이, 왕방울만 하게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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