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241화 (241/315)

241화

가장 뜨거운 여름

우진은 오랜만에 마포구로 향하고 있었다.

마포구 쪽에 개점한 카페 프레스코 매장공사가 한창일 때는 종종 방문하던 마포구.

하지만 올해가 되어서는 마포구에 올 일이 거의 없었는데, 오늘 이렇게 갑자기 오게 된 이유는 바로 수하 때문이었다.

오늘은 다름 아닌, 수하의 집들이 날이었다.

그녀가 2년 전에 분양받았던 마포 클리오 프레스티지 아파트.

수하가 드디어 그 아파트에 드디어 입주한 것이다.

[어디쯤이야, 서우진?]

“어, 거의 다 와 가 누나.”

[너 빼고 다 왔어. 빨리빨리 오라고.]

“일 늦게 끝난다고 미리 얘기했잖아. 최대한 빨리 가는구만.”

[아무튼!]

“잔소리 그만하고, 주차장에 차량번호 등록이나 해줘.”

[오……? 너 우리 집에 방문객 차량번호 등록기능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거기 모델하우스, 내가 디자인했었거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냥 클리오라는 브랜드 자체에 내가 빠삭하다는 얘기지.”

[잘난 척은…….]

“여튼, 내 차 번호는 00가 0000이야.”

[알겠어. 등록해 놓을게.]

신호등에 파란 불이 들어오는 것을 확인한 우진은, 수하와의 전화를 끊고 운전대를 다시 잡았다.

우진은 오늘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진행했던 업무들이 깔끔하고 만족스럽게 마무리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오늘 그의 기분이 좋은 이유는, 당연히 좋은 사람들을 오랜만에 만날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오늘 수하의 집에 오기로 한 사람들은, <우리 집에 왜 왔니> 원년 멤버인 재엽과 리아였다.

부우웅-

집들이 선물로 고급 와인까지 챙긴 우진은, 흥얼거리며 클리오 아파트의 주차장으로 진입하였다.

띠릭-

우진의 차량번호를 인식한 차단기가 자동으로 열렸고, 우진의 차가 미끄러지듯 주차장 안으로 들어섰다.

‘역시, 주차장부터 잘해놨네.’

<마포 클리오 프레스티지>는, 당연히 우진이 설계에 참여한 아파트는 아니었다.

이때 우진의 역할은, 아파트 모형을 제작하고 모델하우스 인테리어를 하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우진은 이 마포 클리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는데, 이 아파트는 우진의 전생에서도 똑같이 지어졌던 아파트였기 때문이다.

회귀한 우진이 개입하기 이전에 이미 설계가 다 끝나 분양계획까지 마무리돼있던 아파트였으니, 너무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전생에도 클리오는……. 3세대 신축 아파트의 새 지평을 열었던 브랜드였지.’

<마포 클리오 프레스티지>가 분양할 당시, 마포구 아현동은 부촌과는 거리가 좀 있는 지역이었다.

아현 뉴타운이라는 재개발 지역으로 묶여 있기는 해도, 아현동 자체가 그리 좋은 주거지역 느낌은 아니었으니까.

때문에 당시에는 분양가를 책정하는 데 한계가 있었고, 그래서 공사비는 무척이나 빠듯했었다.

천웅건설은 이 클리오라는 브랜드를, 전에 없던 프리미엄 아파트 라는 슬로건으로 홍보했으며, 때문에 최대한 고급스럽게 시공해야 했으니까.

‘어떻게 그 평단가로 이만한 수준의 프리미엄 아파트를 뽑아낼 수 있었는지 참…….’

전생에서도 감탄했었지만, 우진은 다시 한번 천웅의 시공능력에 감탄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최근 들어 회귀 이전과 너무도 바뀐 세상들을 봐왔던 탓인지, 이렇게 전생의 기억과 거의 같은 것을 마주하는 게 오히려 신기한 우진이었다.

띵-!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우진은 천천히 수하의 집으로 가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자 잠시 후.

철컥-

가벼운 쇳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서우진 왔어?”

“그래, 왔다.”

“빨리 들어와, 짜샤. 떡볶이 다 식었어.”

“떡볶이? 웬 떡볶이?”

“오랜만에 실력 발휘 좀 했지.”

“혹시 무조건 먹어야 한다거나 하는 규칙이 있는 건 아니지?”

“시끄러. 오늘은 진짜 맛있다고.”

우진은 이제 남매처럼 친해진 수하와 투닥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미리 와 있던 리아와 재엽이 우진을 반겨주었다.

“우진이 왔어?”

“이야. 요즘 잘나가는 서 대표님 아니야?”

“누나 오랜만. 그리고 재엽이 형은 진짜 오랜만이네.”

“그러니까. 좀 얼굴 좀 비추고 해. 왜 이렇게 보기가 힘들어 요즘?”

“이 형이, 나만 바쁜 것처럼 몰아가네. 형도 바쁘면서.”

먼저 와 있던 두 사람과도 반갑게 인사(?)를 나눈 우진은, 자리에 앉아 수하가 만들었다는 떡볶이를 한 입 찍어 먹어보았다.

다행히 맛있는 척 연기는 가능한 맛이었다.

“이거 우리 서 대표님 모시기에 너무 누추한 집 아닌가 모르겠네.”

수하의 말에, 우진이 피식 웃으며 대꾸헀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긴.”

“히히. 맞아. 사실 이사해서 너무 좋아.”

“진짜. 그때 분양받길 정말 잘했지?”

“더 말하면 입 아프지!”

콜라를 한 모금 마신 수하가, 새삼스럽다는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잠깐. 그러고 보니……. 서우진 처음 만난 게, 클리오 모델하우스에서였네?”

“그랬었지.”

옆에 있던 리아가 맞장구치며 끼어들었다.

“맞아, 언니. 들은 적 있어. 대박.”

재엽도 기분 좋게 웃으며 한마디 거들었다.

“이 집이 참, 여러모로 의미 있는 집이네 임수하.”

“프히히. 인정, 인정.”

정말 오랜만에 네 사람이 전부 다 모였기 때문일까?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화기애애했고, 우진은 기분 좋게 웃고 떠들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렇게 7월의 어느 날.

기분 좋은 여름밤이 지나갔다.

* * *

스페인의 건축가 마테오는, 오늘 국제공항에 나와 있었다.

공항에 나와 있는 이유는, 당연히 출국 일정이 잡혀있었기 떄문.

그런데 출국 수속을 받는 마테오의 표정은 무척이나 밝아 보였다.

그 이유는, 오늘의 출국이 비즈니스와 전혀 연관이 없기 때문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일에서 벗어난 마테오는, 완전히 휴가만을 위해 비행기 티켓을 예매한 것이다.

‘이렇게 마음 편히 공항에 오는 것도 오랜만인 것 같군.’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인 마테오는 자주 비행기를 탄다.

그의 스튜디오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들은, 전 세계는 아닐지언정 적어도 유럽 전역에 퍼져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렇게 비즈니스와 전혀 관계없는 비행은 수년 만의 일이었고, 그래서 마테오는 설레는 표정이었다.

“한국이라……. 정확히 일 년 만인가?”

작년 이맘때쯤.

정확히 이 자리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탔었던 마테오는, 묘한 표정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는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상황이나 마음은 완전히 달랐으니 말이다.

작년 여름 한국행 비행기를 탈 때.

그날은 마테오의 인생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절박했던 날이었다.

‘브루노의 이야기를 듣고 한달음에 티켓을 예매하긴 했었지만……. 사실 100퍼센트 확신을 가지고 비행기를 탔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비정형 스타디움 설계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한국 비행기 티켓을 끊었었던 마테오.

지금이야 웃으며 회상할 수 있지만, 다시 생각해도 정말 아찔했던 순간이었다.

‘브루노와 우진은 잘 있는지 모르겠군.’

우진의 얼굴을 떠올린 마테오는, 빙긋 웃으며 가방 앞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얀 봉투 하나를 꺼내어 든 마테오는, 더욱 기분 좋은 표정이 되었다.

그것은 바로 우진에게서 온 초대장이었으니 말이다.

[서울에서 이번에 국제 리빙페어가 열립니다, 마테오.]

[한국 컨텐츠 문화 사업과 리빙 사업이 콜라보된 정말 특별한 전시지요.]

[제 작품이 메인 로비에 전시되어 있으니, 시간적 여유가 되신다면 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봉투 안에는 우진의 편지와 함께, 코엑스 국제 리빙페어의 티켓이 담겨 있었다.

마침 공사가 시작되면서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긴 마테오는, 오랜 친구인 브루노의 얼굴도 볼 겸 우진도 만날 겸.

한국행을 결정한 것이고 말이다.

‘한국의 문화 컨텐츠 사업과 공간디자인의 콜라보라……. 어떤 멋진 디자인들을 볼 수 있을지 벌써부터 기대되는군.’

수많은 리빙페어에 참여해 봤던 마테오는 리빙페어라는 단어 자체에 크게 설렘이 없다.

하지만 문화 컨텐츠와의 콜라보라는 부분은 그로서도 처음 들어볼 정도로 무척이나 신선했고.

무엇보다 ‘서우진’이라는 건축디자이너의 작품이 메인 부스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그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즐거운 휴가가 됐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출국 수속을 마친 마테오는 기분 좋게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마테오를 태운 비행기가, 한국을 향해 출발하였다.

* * *

<천년의 그대> 드라마 촬영은, 이천과 서울에서 반반씩 이뤄진다.

드라마의 내용 절반을 차지하는 천 년 전의 스토리들이 이천의 세트장에서 촬영되었으며.

나머지 절반을 차지하는 현대의 스토리들은 서울에서 촬영되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최근 이천에서의 촬영이 일단락된 뒤.

<천년의 그대> 드라마 촬영팀은, 지난주부터 서울에서 촬영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서울 안에서도 가장 많은 촬영이 잡혀있는 곳이 바로 성수동이었다.

천년을 살아온 남자주인공 서후는 현대의 배경에서 재벌이라는 설정을 가지고 있었고, 그가 사는 집으로 설정된 곳이 바로 성수동 최고의 프리미엄 아파트인 <서울숲 클라시아 포레스트>였으니까.

그래서 <천년의 그대>의 여주인공인 성하영은, 오늘도 성수동에서 촬영이 한창이었다.

오늘 촬영하는 씬은.

남자주인공인 서후와 여자주인공인 인서가 서로의 정체를 모른 채 서울 숲에서 데이트하는 씬이었다.

“컷! 여기까지!”

촬영의 끝을 알리는 감독의 목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기분 좋은 목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하셨어요!”

“감독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방금 마지막 컷을 촬영한 하영 또한, 함께 호흡을 맞춘 남자배우 민우에게 기분 좋은 표정으로 인사하였다.

“민우 씨 오늘도 고생 많으셨어요.”

“별 말씀을요. 선배님 덕에 촬영이 빨리 끝났죠.”

“겸손은……. 민우 씨 연기 진짜 잘하신다니까요?”

“감사합니다, 선배님. 더 열심히 해서, 이번 드라마 대박 내야죠!”

“그랬으면 좋겠네요, 정말.”

오늘 촬영에 특별한 분장이나 소품들이 없어서인지, 촬영장은 금세 정리되었다.

그리고 촬영장을 빠져나오기 전, 다시 민우를 마주친 하영이 문득 그를 향해 물어보았다.

“이제 내일이면 주말인데.”

“그렇죠, 선배님.”

“민우 씨는 주말에 뭐해요?”

민우에게 관심이 있다거나 한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하영은 민우와 나이 차이도 제법 났고, 무엇보다 민우는 그녀에게 실력 있고 싹싹한 후배일 뿐이었으니까.

그래서 하영은 그저 인사차 물어본 것이었고, 그에 민우는 웃으며 대답하였다.

“이번 주말에는 아마 전시? 보러 갈 것 같아요.”

“전시…… 요?”

의외의 대답에 하영이 고개를 갸웃하자, 민우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아, 생각해보니 선배님께도 말씀드릴 걸 그랬네요.”

“뭐를요?”

“내일부터 코엑스에서, 저희 드라마 세트장이 일부 전시되는 리빙페어가 열리거든요.”

그 이야기를 듣고서야, 하영은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 리빙페어가 내일부터였구나!”

“네. 제가 서 대표님이랑 조금 친분이 있어서, 내일 놀러 가기로 했거든요.”

“오, 그래요?”

하영이 눈을 반짝이자, 민우가 신나서 말을 이었다.

“네네. 선배님도 시간 되시면 들리세요. 선배님 집도 가깝지 않으세요?”

“네, 맞아요. 코엑스면 차로 20분 거리도 안 되죠.”

민우의 이야기를 들은 하영의 표정에 호기심이 어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천의 세트장에서 촬영했던 그녀는 그 세트장의 퀄리티가 얼마나 뛰어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는데.

이 세트장의 일부가 코엑스에 전시된다면,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 궁금해진 것이다.

‘그 커다란 세트장 어디를 코엑스에 재현한 거지? 그게 실내에 재현이 가능한 스케일인가?’

민우와 몇 마디를 더 나눈 하영은,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매니저가 기다리고 있던 벤에 올라탔다.

그리고 의자에 푹 기대 누운 그녀는 문득 생각했다.

이번 주 주말에는 딱히 일정이 없었으니, 코엑스 리빙페어에 슬쩍 들러보는 것도 재밌겠다는 생각 말이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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