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젓는 방법
우진이 운을 떼자, 모두의 시선이 오 사무관의 입을 향해 모였다.
이어서 그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시작하였다.
“그렇습니다. 이천시 문화국장님께서 저희 이사장님께 다이렉트로 연락을 주셨고, 두 분이 함께 계실 때 얘기하는 게 맞는 것 같아서 오늘 이 자리가 만들어진 거지요.”
오 사무관의 이야기에, 우진과 소정의 눈이 동시에 반짝였다.
물론 우진은 이천시의 제안이라는 것을 얼추 예상하고 있었다.
차를 타고 이곳 KSJ엔터에 오는 동안, 오 사무관에게 개략적인 이야기 정도는 들었으니까.
하지만 오피셜한 내용을 정확히 듣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고.
그래서 우진은 기대에 찬 표정으로 오 사무관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이제, 그 제안이라는 걸 들어볼 수 있을까요?”
소정의 물음에 고개를 다시 한번 끄덕인 오 사무관이, 천천히 다시 입을 열기 시작하였다.
“물론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그리고 이어진 오 사무관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니까 시작은, 이번에 이슈가 된 서 대표님의 프레젠테이션이었던 거군요?”
강소정의 물음에, 오 사무관이 설명을 이었다.
“그렇지요. 정확히는 서울시 공식 SNS에 게재된 영상이 이슈화돼서, 다들 아시다시피 그것으로 인해 여러 기사들이 파생됐잖습니까?”
“그랬죠?”
“그때 그 기사들 중에, 이런 기사가 있었거든요. <경기도 이천시에, 건축가 서우진의 새 작품 들어선다.>”
오 사무관이 언급한 기사는 우진도 본 적이 있는 기사였고, 그래서 우진도 고개를 끄덕였고.
“아하.”
그와 별개로 오 사무관의 얘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 기사를 이천시 문화국 직원 하나가 봤고, 어리둥절해서 상부에 보고를 올렸답니다.”
소정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어리둥절해요?”
“이천시청 공무원인 본인들도 모르는 사실이 기사로 떴으니, 어리둥절할 만하죠.”
“오호, 재밌네요.”
여기까지 우진은 그 ‘제안’이라는 것이 뭔지도 듣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벌써부터 흥미진진했다.
‘일이 이렇게 굴러갈 수도 있네.’
물론 우진이라는 사람의 인지도가 갈수록 더 커지는 지금의 상황에서.
그가 이슈화될 때마다 어떤 방식으로든 파급력이 생기는 것은 너무 당연한 수순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게 이천시 공무원의 귀에까지 들어가 역제안을 받게 될 줄은, 우진조차 예상치 못했던 상황인 게 맞았다.
그리고 우진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드디어 오 사무관이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제안이라는 건 간단합니다.”
잠시 뜸을 들인 그가 말을 이었다.
“이번에 리빙페어에서 최초 공개되기로 한 <천년의 그대> 세트장을, 이천시와 동시 공개하는 방향으로 바꿔줄 수 없겠냐는 거지요.”
이 말이 나온 순간.
우진과 소정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소정이 먼저 말했다.
“가는 게 있다면, 오는 것도 있겠죠?”
“물론입니다.”
“들어볼 수 있을까요?”
“일단 여러 가지 제안들이 있는데, 가장 파격적인 것은 아무래도 ‘관광특구 후보지’ 지정이겠네요.”
“네……?”
“관광특구 지정은 도지사가 하지만, 후보지 선정은 이천시장의 권한으로도 할 수 있습니다. 만약 후보지 지정이 된 뒤 관광특구로 지정되기 위한 조건을 전부 충족시킨다면, 큰 변수가 생기지 않는 한 된다고 볼 수 있을 수준이죠.”
오 사무관의 이야기에 일단 소정은 잠시 얼어붙었다.
관광특구라는 단어만 들었을 때, 이게 뭔가 좋은 것이라는 정도는 알 수 있었지만, 업계 종사자가 아닌 그녀로서는 구체적인 내용까지 알 수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진은 달랐다.
처음 이곳에 세트장 소유권을 가져오던 시점부터, 관광특구에 대한 생각까지 하고 있었던 우진이었으니까.
“후보지 지정이라……. 확실히 괜찮은 제안이네요.”
“그렇죠.”
“이천시에 이미 지정되어 있는 다른 후보지는 없는 건가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사실 쌀 문화 축제가 열리는 이천시 설봉공원 정도가 후보지로 지정됐던 적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조건 충족이 힘들어서 해제된 것으로 들었거든요.”
“사무관님께선 자세히 알고 계시네요?”
“아, 저도 당연히 그쪽에 물어본 겁니다.”
“그렇다면 꼼꼼하시군요.”
“하하, 감사합니다.”
관광특구에 지정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들을 만족시켜야만 한다.
첫째.
외국인 관광객 수가 10만 명 이상일 것.
둘째.
문화체육관광부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관광 안내시설, 공공편익시설 및 숙박 시설 등이 갖추어져 외국인 관광객의 관광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지역일 것.
셋째.
임야·농지·공업용지 또는 택지 등 관광 활동과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는 토지의 비율이 10%를 초과하지 않을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위 조건을 갖춘 지역들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을 것.
당연히 우진이 매입한 세트장의 부지는, 위 조건들을 단 하나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상태다.
관광수요를 충족할 수 있는 시설들이 있기는커녕, 외국인 관광객 숫자가 백 명도 되지 않을만한 지역인 것이다.
이천시에서 그나마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쌀 문화 축제>도, 관광객이 만 명 단위를 넘었던 적이 없었으니, 지금의 시점에서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
그러나 이것은 지금의 이야기일 뿐.
<천년의 그대> 세트장에는 강력한 세 가지의 무기가 있었다.
첫째로 최근 이슈화된 우진이 세트장을 설계‧디자인한 디자이너라는 점.
둘째로 곧 이 세트장을 모듈화시켜 설치한 코엑스의 국제 리빙페어가 성황리에 개막될 예정이라는 점.
마지막으로 <천년의 그대>라는 드라마 자체가, 거액의 자본이 투입된 블록버스터급 드라마라는 점까지 말이다.
이것을 감안했을 때 외국인 관광객 10만 명이라는 수치는 결코 허황된 숫자가 아니었고.
그만한 유입력이 보장된다면, 관광시설이 갖춰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심지어 마지막 조건인 토지계획과 관련된 부분도 무척이나 쉽게 충족할 수 있다.
애초에 이 세트장의 위치는, 처음부터 새로 개발해야 하는 수준의 허허벌판이었으니까.
도시에 비유하자면 계획도시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인 것이다.
‘물론 이천시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해 줘야 가능한 얘기겠지만…….’
그래서 우진은 물어보았다.
“그럼 사무관님.”
“말씀하세요, 대표님.”
“이천시 쪽에서 얘기하는 그 ‘후보지 지정’이라는 게……. 단순히 생색에서 끝나는 수준은 아니겠지요?”
우진의 질문이 예리했는지, 오 사무관이 살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오……. 중요한 부분을 잘 말해주셨군요.”
“그렇죠. 아무래도 이천시 입장에서 후보지로 지정만 해주고 아무런 지원을 해주지 않는다면, 사실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서 대표님은 이런 부분까지 어떻게 빠삭하신 겁니까?”
“뭐……. 사업 머리가 조금 잘 돌아가는 정도라고 해두죠.”
오 사무관은 우진이 새삼 다르게 보였다.
뛰어난 역량을 가진 사업가이자 디자이너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결국 실제로 겪어보진 못했던 부분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핵심을 찌르는 예리한 질문을 들으니, 우진의 사업적인 역량이 한층 피부에 와 닿은 것이다.
오 사무관의 설명이 다시 시작되었다.
“일단 이천시의 현재 상황을 생각했을 때, 그렇게 공수표만 던질 이유가 없긴 합니다.”
“어째서 그렇죠?”
“이번 프로젝트 이전에도, 현 이천시장님께서는 시 차원에서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시도를 수차례 해 오던 상황이었으니까요.”
“아하.”
“솔직히 이건 이천시 입장에서도 기횝니다. 숙원사업 중 하나였던 관광객 유치를 달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죠.”
“그렇게 볼 수 있겠군요.”
“다만 시에서는 연간 예산이 정해져 있으니……. 최소한의 지원으로 최대한의 결과물을 뽑아내려고 할 텐데, 서 대표님 입장에서는 최대한 많은 지원을 받아내야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우진의 머리가 다시 팽팽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런 종류의 딜Deal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꺼내놓을 수 있는 패 중에서 상대가 가장 매력적으로 생각할 부분이 뭔지 정확히 판단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진은 그것을, 바로 ‘실적’이라고 생각하였다.
‘뒷돈이라도 해 먹으려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공무원에게 실적만큼 매력적인 떡밥도 없지.’
두루뭉술한 약속이어서는 안 된다.
정확히 언제까지, 어떤 결과를 보여주겠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패를 꺼내 든다면…….
이천시에서는 전폭적인 지원을 해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우진은 생각하였다.
“그럼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천시 문화국 실무자분이랑 자리를 한 번 만들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직접 이야기를 나눠보실 생각이군요.”
“물론입니다. 아무래도 민감하고 중요한 부분이니까요.”
“좋습니다. 그럼 제가 내일 국장님께 전화 드려서, 날짜 한 번 잡아보는 걸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야, 정말 감사하지요.”
오 사무관은 무척이나 적극적으로 우진을 도왔다.
이번 프로젝트의 흥행은 결국 같은 맥락에서 서울시 디자인 재단의 ‘실적’에 큰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오늘의 회의는, 아주 순조롭게 흘러갔다.
우진과 소정, 그리고 오 사무관은 모두 <천년의 그대>와 연계된 프로젝트의 흥행이라는 같은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으니.
소정과 오 사무관이 이야기를 꺼내면 우진이 교통정리를 하는 방식으로 착착 정리가 된 것이다.
하여 그렇게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세 사람의 표정은 무척이나 밝아져 있었다.
소정은 <천년의 그대>에 도움 될만한 소스들을 풍족하게 얻은 것에 만족하였으며.
오 사무관은 실무자로서 프로젝트를 앞으로 어떻게 풀어 가야 할지 시야가 밝아진 느낌이었고.
마지막으로 우진은, 계획했던 것보다 더 빠르게 원했던 부분들을 취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일단 오늘은 이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좋아요.”
“저도 좋습니다.”
“그럼 차후에 진행 사항은, 메일로 지속적으로 공유해드리도록 하지요.”
“수고 많으십니다, 오 사무관님.”
“하하, 별말씀을요. 여기 두 분 대표님께서 가장 고생이 많으시지요. 아, 이 자리에 계시지 않은, 민주영 대표님까지 포함입니다.”
세 사람은 기분 좋게 웃으며 커피를 홀짝였다.
중요한 이야기가 어느 정도 정리되고 난 뒤, 세 사람의 다음 일정은 소정이 준비한 트레일러 영상을 보는 것이었다.
“와……. CG가 진짜 장난 아닌데요? 이거 어색함도 없고, 진짜 실사 같아요.”
“여기 이 부분은 CG 아니에요, 사무관님.”
“예?”
“실제로 세트장 가보시면, 건물이 이렇게 생겼어요.”
“아니, 이렇게 생긴 건물이 어떻게 안 쓰러지죠? 허공에 떠있는 수준인데?”
“구조적으로 트릭을 좀 썼죠. 사실 별 건 아닌데, 착시현상 같은 겁니다.”
영상을 보는 오 사무관의 입에서는, 연신 감탄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놀란 사람은 오히려 우진이었다.
‘이거……. 내가 알던 천년의 그대가 맞아?’
우진이 놀란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드라마 팀에서 찍어낸 트레일러 영상의 퀄리티는, 우진이 전생에 봤던 그 드라마와 완전 다른 차원의 것이었으니까.
세트장이야 우진이 직접 설계 디자인해서 퀄리티가 올라갔다곤 쳐도, CG나 연출까지 이렇게 좋아질 줄은 우진으로서도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우진의 전생보다 KSJ엔터의 예산이 더 넉넉해졌으며, 우진 덕에 아끼게 된 세트장 제작비용이 완성도를 높이는데 쓰이게 됐기 때문이었는데, 아무리 우진이라 해도 여기까지 생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거, 진짜 재밌겠는데?’
3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영상을 본 것만으로, 이미 스토리를 다 아는 우진조차 흥미가 동할 정도의 수준 높은 트레일러 영상.
우진은 그것을 다시 돌려보면서 생각했다.
어쩌면 이번 프로젝트에 배팅한 판돈을, 더 키워 봐도 괜찮겠다는 생각 말이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