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226화 (226/315)

226화

새 술은 새 부대에

초여름 저녁.

석중의 집에서 잠시 있었던 석중, 석호와의 만남은, 우진의 열정에 또 한 번 좋은 연료가 되어 주었다.

이제 우진과 세 번째 만나게 된 석호는 이전보다 좀 더 깊고 진지한 이야기들도 많이 해주었고.

우진이 전생에서조차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분야에서 최고의 반열에 오른 석호의 이야기들은.

건축과 디자인에 집중되어있던 우진의 시야를 한층 넓혀 준 것이다.

그리고 우진은 석호에게 약속하였다.

조만간 그가 갤러리를 오픈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다면, 설계와 건축은 꼭 WJ 스튜디오에서 맡아 해주겠다고 말이다.

“이건 제가 부탁드려야 할 일 같은데요?”

“하하.”

“구체적으로 계획이 서면, 그때 꼭 제게 연락 주셔야 합니다, 형님.”

“물론이야. 하지만 각오해야 할 거야.”

“뭐를요?”

“난, 꽤나 까다로운 클라이언트니까. 흐흐.”

석호에게 들은 이야기들을 종합해 봤을 때.

언제가 될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그의 갤러리를 디자인하게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우진은 이 약속이 무척이나 기꺼웠다.

‘갤러리’라는 건축 카테고리는 우진이 아직 경험해보지 못했던 분야였고.

새로운 건축에 대한 욕망은 건축디자이너 우진에게 항상 내재 되어 있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석호가 이야기한 것처럼.

우진은 그 갤러리가 한국을 넘어 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갤러리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볼 생각이었다.

“일단 지금은……. 벌려 놓은 것들부터 매듭짓고…….”

출근해 자리에 앉은 우진은, 컴퓨터 바탕화면에 주르륵 깔려 있는 도면 파일들을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석호와의 만남과는 별개로 요즘 그가 가장 많은 공을 들이며 신경 쓰고 있는 프로젝트인 성수동 전략정비구역 설계 공모.

이 프로젝트의 마감일이 코앞으로 다가왔고, 그래서 오늘도 우진은 야근이 예정되어 있었다.

‘내일까지 설계는 전부 픽스 하고. 남은 3일 동안에는 제안서 완성도 올리는 작업만 해야 해.’

곧바로 자세를 고쳐 앉은 우진은, 설계팀에서 보내온 도면 파일을 꼼꼼히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우진이 오늘 내로 모든 컨펌을 끝내주어야, 내일 완성된 최종 설계안이 만들어질 수 있을 테니까.

이제 세부적인 설계 작업은 손을 뗀 우진이었지만, 그래도 최종단계에서의 컨펌은 결코 남에게 맡기지 않는 그였다.

‘다들 실력이 점점 더 좋아지시네. 크게 아쉬운 부분은 보이지 않는군.’

오전 내내 대표실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작업만 하던 우진은, 점심 식사마저 거르고 한시가 될 때까지 모니터 앞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우진이 작업에 집중해 있던 그때.

똑똑-

누군가 우진의 대표실 문을 두들겼다.

“대표님, 이제 준비하셔야 합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사업부의 프로젝트 관리팀장이었고.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우진이 시계를 확인하고는 놀란 표정이 되었다.

“아,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군요.”

파일들을 그대로 띄워 둔 채 모니터 전원만 눌러서 끈 우진은, 곧바로 가방을 챙기고 대표실을 나섰다.

오늘 우진이 해야 할 일은, 도면 검토뿐만이 아니었다.

* * *

오늘 우진의 오후 일정은, 조금 특별한 클라이언트를 만나러 가는 일이었다.

‘특별한’ 클라이언트라고 표현한 이유는 간단했다.

오늘 만날 사람은, 지금까지 우진과 WJ 스튜디오가 상대해왔던 클라이언트와 조금 종류가 다른 케이스였으니까.

게다가 그 클라이언트는, 과거 우진과 약간의 인연이 있었던 사람으로부터 소개받은 사람이었다.

우진이 오늘 향한 곳은, 청담동의 청담부동산이었고.

약속이 있는 사람은 청담부동산의 사장 김 씨였다.

‘조금 서둘러야겠네.’

시계를 확인한 우진은 서둘러 시동을 걸고 차를 운전했다.

약속 시간까지 20분밖에 남아 있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진의 사무실에서 조금 나와 영동대교만 건너가면 바로 도착할 수 있는 곳이 청담부동산이었기에.

조금 늦게 출발했음에도 약속 시간에 늦지 않고 도착할 수 있었다.

인근 주차장에 차를 댄 우진은, 낯익은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딸랑-

이어서 우진의 얼굴을 발견한 것인지, 안쪽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대표님!”

“하하, 사장님, 잘 지내셨어요?”

“저야 뭐, 잘 지내지 못할 게 뭐 있겠습니까.”

“그나저나 이제 물건만 소개해주시는 게 아니라 제게 일거리까지 소개해주시는군요.”

“하하핫.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이런 일로 대표님께 연락드릴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요.”

“여튼 감사드립니다. 꽤 연락드린 지 오래됐는데, 절 기억해 주셔서요.”

“대표님을 기억하지 못하기도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런가요?”

“그때 일 자체가 워낙 임팩트 있기도 했었고……. 최근에는 기사에도 자주 등장하시던걸요?”

“아, 최근에 패러필드 관련 기사를 보셨나 보네요.”

“그냥 인터넷 검색하다 보면, 심심찮게 보이더군요.”

반갑게 인사를 나눈 우진은, 부동산 사무실의 소파에 걸터앉았다.

그러자 김 씨가 인스턴트 커피를 타서 우진의 앞에 올려 두었고, 잠시 후 부동산 사무실 문이 다시 열렸다.

딸랑-

이어서 우진은 직감할 수 있었다.

지금 들어온 저 사람이, 오늘 우진과 약속이 잡힌 바로 그 클라이언트라는 사실을 말이다.

‘역시 나이는 좀 있으시네.’

오늘 우진이 만나게 된 클라이언트는, 우진처럼 건축사무소를 운영하는 동종 업계 회사의 사장이었다.

우진이 ‘조금 특별한’ 클라이언트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사장님, 오셨어요?”

“허허. 제가 조금 늦었나 봅니다.”

“아닙니다. 시간 딱 맞춰서 오셨는걸요. 이쪽으로 오시지요.”

남자와 눈이 마주친 우진은, 자연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김 씨와 우진을 한 번씩 번갈아 본 남자가, 김 씨를 향해 물었다.

“여기 이분이……?”

“맞습니다. 여기는 WJ 스튜디오의 서우진 대표님. 이쪽은 다진건축의 임중우 사장님이십니다.”

남자는 기분 좋게 웃으며 우진이 내민 손을 맞잡았고, 두 사람은 인사를 나누었다.

“허헛. 반갑습니다, 서 대표님.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임중우라고 합니다.”

“저도 반갑습니다, 사장님. WJ 스튜디오의 서우진이라고 합니다.”

악수를 나눈 두 사람은, 테이블을 가운데 놓고 소파에 마주 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한 청담부동산의 김 씨가 입을 여는 것으로 대화가 시작되었다.

* * *

다진건축은 WJ 스튜디오와 달리, 설계나 디자인보다는 건설 쪽에 가까운 시공 전문 업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천웅건설처럼 커다란 규모를 가진 건설사냐고 묻는다면 그 또한 아니었다.

물론 이제 처음 시공 쪽에 입문한 WJ 스튜디오보다야 훨씬 더 큰 매출 규모를 가진 회사였지만, 일반적인 건설사처럼 건축 수주를 받아 시공을 하는 타입의 건설사는 아니었던 것이다.

다진건축의 대표 임중우는, 일반적인 건설사의 대표라기보단 부동산계의 큰손이었다.

원래 건축 쪽에서 일하던 그가 부동산‧토지 투자로 번 돈을 가지고 차린 회사가 다진건축이었고.

땅을 매입하고 그곳에 건축을 해서 분양을 하거나 통 건물로 매도하는 것이, 다진건축의 수익모델이었다.

처음에는 작은 부지에 빌라를 지어 분양하거나 다가구 주택을 지어 팔아넘기는 것으로 매출을 올리기 시작한 다진건축의 사장 임중우는, 점점 더 사업을 크게 확장하고 있었다.

다진건축은 기본 베이스가 부동산 재벌이다 보니 부채가 거의 없는 알짜배기 회사였고.

대부분의 사업장에서 시행자이자 시공사의 역할을 동시에 하는 회사이기도 하였다.

다진건축은 WJ 스튜디오와 마찬가지로 법인이긴 하지만 임중우의 개인회사와 다름없는 곳이었으며.

자본이 넉넉하다 보니 미리 건축 가능한 부지를 여기저기 사둘 정도로 돈이 많은 알부자가 바로 임중우였다.

우진은 사실 임중우에 관한 이야기를, 예전에 청담 선영 거래를 할 때 김 씨로부터 들은 적이 있었다.

김 씨는 그때, 우진에게 이런 말을 했던 적이 있었으니까.

[제 고객분들 중에 임중우 사장님이라고 대단하신 분이 한 분 계신 데, 서 대표님도 그분만큼이나 부동산에 빠삭하신 것 같습니다. 하하.]

[임중우…… 사장님이요?]

[저와 거래하시는 분 중에 제일 큰손이시죠. 청담동에 토지만 천 평 이상 갖고 계신 분입니다.]

청담동에 천 평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우진은 사실 어느 정도 허풍이 섞인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다.

서울 강남에서도 핵심지역인 청담동에 개인이 토지를 천 평이나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 자체가, 너무 허황되게 들렸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진은 임중우라는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게다가 이렇게, 일적으로 만나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고 말이다.

‘청담동 토지 천 평이 사실이었다니……. 세상은 넓고 돈 많은 사람은 정말 많다니까.’

그리고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것은, 임중우가 이번에 벌이는 새로운 사업 때문이었다.

임중우가 가지고 있다던 그 천 평이 넘는 청담동의 토지.

다진건축이 드디어, 그 부지에 사업을 하기로 한 것이다.

“여기 김 사장님이, 서 대표님 이야기를 정말 많이 하시더군요.”

“제 이야기를요?”

“이십 대에 벌써 부동산 투자에 도가 트신 분이라면서……. 허허. 그래서 한번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사실 가지고 있던 정보를 잘 활용한 수준이었는데 말입니다.”

“정보를 활용해 돈을 굴리는 게 곧 투자 아니겠습니까?”

임중우 사장이 십 년째 묵혀두고 있던 토지에 드디어 사업을 시작하려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의 토지 바로 옆에, 벌써 몇 년 동안 매수하기 위해 작업하던 필지를 드디어 매입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

그래서 이번에 임중우가 청담동에 신축하려는 사업지는 2천 평이 훌쩍 넘는 규모였고.

이곳에 그는 지금껏 벌어들인 돈을 크게 투자해서 역대급으로 큰 사업을 할 생각이었다.

잠시 이런저런 주제로 대화를 나눈 뒤, 일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은 우진이었다.

“이번에 빌라를 지으신다고 하셨죠?”

우진의 물음에, 임중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들으셨겠지만 평범한 빌라는 아닙니다.”

“부지 크기로 따지자면 한두 동짜리 아파트도 지을 수 있을 만한 규모인데……. 당연히 평범한 빌라를 짓지는 않으시겠지요. 그것도 청담동에요.”

“아파트를 지으면 좋겠지만, 용적률 때문에라도 그건 좀 힘들 것 같군요, 허허.”

임중우가 2천 평의 부지에 지으려고 하는 것은, 최상류층을 위한 럭셔리 빌라였다.

파노라마처럼 한강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대형 평형으로만 구성된 도심 속 타운 하우스 느낌의 럭셔리 빌라.

이것은 임중우의 오랜 꿈이기도 하였다.

서울 도심. 강남의 한복판에, 빼곡한 아파트가 아닌 전원주택 같은 느낌의 타운 하우스를 지어보는 것.

하지만 이 꿈에는 당연히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으니, 비싼 부지에 이렇게 세대수 적은 주거를 짓는다는 것 자체가 사업성이 떨어진다는 점이었다.

땅값이 비싸고 사업성이 좋을수록 건축비에 대한 부담은 적어지게 되고.

때문에 청담동같은 금싸라기 땅에 타운 하우스 느낌의 주거를 짓는 것은, 수지가 맞기 힘든 일이었던 것이다.

물론 용적률이야 최대한 꽉 채워서 지을 테지만.

그렇다고 해도 최대한 효율적으로 공간을 활용하는 아파트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임중우는 고민하였다.

어떻게 하면 이 꿈과 현실의 간극을 메울 수 있을까.

그리고 중우는 그에 대한 해답을, 우진에게서 찾았다.

비교적 적은 세대수로 호화롭게 지은 타운 하우스에 상품성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서우진’이라는 브랜드를 찾아낸 것이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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