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Give & Take
우진은 오늘, 오랜만에 석중의 집에 방문했다.
바로 윗집이었지만 워낙 서로 바쁘다 보니, 이렇게 서로의 집에 놀러 갈 일은 생각보다 잘 없었던 것이다.
오늘도 원래 미리 약속된 일정은 아니었다.
다만 갑작스럽게 연락이 닿은 상황에서 서로 시간이 맞아떨어졌고, 그래서 맥주나 한 캔 마시기로 한 것이었으니까.
[우진이, 퇴근 했냐?]
[네, 형님. 지금 귀가중입니다.]
[저녁에 별일 없으면, 맥주나 한잔할래?]
[형 집이세요?]
[오늘 석호가 우리 집에 놀러 와서. 너도 시간 되면 같이 보면 좋을 것 같아서 전화해 봤어.]
[오, 그래요? 저야 좋습니다. 30분 내로 올라갈게요.]
패러필드의 준공식 날 석호를 처음 봤던 우진은, 그 후로도 한 번 정도 석중과 함께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큐레이터로서 자수성가한 석호라는 사람의 이력은 우진에게도 흥미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으며.
또한 석호가 워낙 우진을 관심 있어 했으니.
5월 말 즈음, 자연스레 자리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이 세 번째 만남인 우진은, 어색하지 않게 석호와 인사할 수 있었다.
“오, 형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하하, 오랜만은 무슨. 대충 한 달만인가?”
“한 달은 좀 더 지났죠.”
“일단 앉자. 석중이네 테라스는 진짜 올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전망 장난 아니네.”
“야경은 처음이지?”
“그러니까.”
굽이치는 한강을 따라 여의도까지 쭉 보이는 서울 밤 풍경을, 우진도 잠시 감상하였다.
우진의 집 거실에서 보이는 풍경과 크게 다를 것 없는 그림이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펜트하우스의 뻥 뚫린 테라스에서 경치를 보고 있으면, 개방감 때문인지 훨씬 더 풍경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끼익-
우진이 자리를 잡고 앉자 석중이 캔 맥주를 한 캔 건네었으며, 우진은 망설임 없이 그것을 따서 한 손에 들었다.
톡-
이어서 가벼운 건배와 함께, 세 사람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오늘은 어쩐 일로 오셨어요?”
“성수동 갤러리 쪽에 일 있어서 왔다가, 그냥 겸사겸사 들른 거지 뭐. 가까우니까.”
“갤러리요?”
“이번에 괜찮아 보이는 신인 작가 한 사람이 단독전시를 열었거든. 구경하러 다녀왔어.”
석호의 이야기를 듣는 우진의 눈이 반짝였다.
미술품 투자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우진도 전혀 경험한 적 없는 완전한 신세계였고.
때문에 실제로 투자할 생각이 있는 것과 별개로, 석호의 이야기들이 흥미롭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였다.
예술이라는 측면에서 놓고 보자면, 우진이 추구하는 건축디자인과 통하는 부분도 분명히 있는 분야였으니까.
“형님은 미국에서 일하실 때도, 주로 괜찮아 보이는 신인 작가를 선점하는 방식으로 투자하셨다고 했죠?”
우진의 질문에, 석호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뭐, 비슷해. 하지만 단순 선점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해. 뛰어난 큐레이터는, 가능성 있는 작가를 발굴해서 빨리 성장할 수 있도록 키우는 역할도 하니까.”
“오…… 키운다고요?”
우진이 흥미를 보이자, 석호 또한 기분 좋게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아직 대중에 알려지지 않은 신인일수록, 처음에 어떤 사람에게 투자받았느냐가 중요하거든.”
“아……?”
“쉽게 설명하자면 A라는 신인 작가와 B라는 신인 작가가 있어.”
맥주를 한 모금 마신 석호가, 천천히 다시 말을 이었다.
“이 둘이 비슷한 시점에 데뷔해서 비슷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치자.”
우진은 점점 더 흥미를 느끼고 있었고, 석호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그런데 A라는 작가의 작품은 평범한 갤러리에서 첫 전시를 했고, 작품이 몇 점 팔리지 못했어. 팔려나간 작품도, 신인 작가 본인이 책정했던 낮은 가격의 작품이었던 거지.”
이런 이야기는 석중도 들어본 적 없었기 때문에, 그 또한 흥미롭게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반대로 B라는 작가의 작품은, 능력 있는 큐레이터의 눈에 들어서 그가 일하는 이름 있는 갤러리에서 첫 전시를 했어. 작품의 가격 또한 큐레이터가 신경 써서 책정해 줬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콜렉터에게 작품을 한 점 판매하는 데까지 성공하게 돼.”
“큐레이터가 투자자에게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는 거군요?”
“맞아.”
씨익 웃은 석호가 우진을 향해 다시 물었다.
“이러면 비슷한 수준이었던 두 작가의 격차는 얼마나 벌어질까?”
“그야……. 엄청나게 벌어지겠죠.”
석호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가 신인 작가를 ‘키운다’라고 한 말이 어떤 의미인지, 확 와 닿았으니 말이다.
“사람들의 심리가 재밌어서, 같은 수준의 작품이라도 그것을 포장하는 포장지가 어떤지에 따라 평가가 천차만별로 갈리게 돼.”
“그럴 것 같아요.”
“유명해지면 똥을 싸도 박수를 쳐준다고 하잖아?”
“그렇죠.”
“비슷한 맥락에서 유명한 투자자, 갤러리. 콜렉터가 투자한 작품이라면, 대중의 눈에는 그 작품이 더 좋아 보이게 되는 거지. 업계에서 탑 클래스에 있는 사람들이 투자하고 지원한다면, 거기에는 분명 어떤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야.”
석호가 말하는 이 비슷한 맥락의 일들은, 분명히 건축업계에도 존재하는 일이다.
물론 해석하기에 따라 가치가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미술품에 비교할 바는 아니겠지만.
건축에 대한 평가에도 건축가의 네임밸류는 분명히 작용할 수밖에 없으니까.
“물론 내가 이렇게 쉽게 말했다고 해서, 이 작업들이 그렇게 쉬운 작업들은 아니야.”
“당연히 그렇겠죠.”
“기본적으로 키우려는 신인 작가의 실력이 ‘진짜’여야 하니까, 그 본질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그리고요?”
“그 작가의 성향. 작품에 담긴 감성과 느낌. 이 모든 요소들을 분석해서 그에 가장 최적화된 브랜딩을 해 주는 게, 큐레이터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지.”
“어떤 느낌인지, 맥락은 알 것 같아요.”
“흐흐. 이십 대 중반에 기업가치 수백억 대 회사를 키워낸 CEO라면, 이 정도는 바로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톡-
어느새 맥주 한 캔을 다 마신 석호가, 새 캔을 하나 따서 손에 쥐었다.
말을 많이 했더니, 목이 타는 모양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 우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번에 성수동에서 찾은 작가는 어때요? 가능성 있어요?”
석호가 고개를 으쓱하였다.
“글쎄. 괜찮은 것 같긴 한데, 아직 애매해. 작품은 느낌 있는데, 스타성을 아직 못 찾았다고 해야 하나.”
“그렇군요.”
“한국에 들어온 이후로 첫 투자를 하는 거라, 내가 좀 더 신중하기도 하고.”
탁-
가볍게 맥주 캔을 부딪친 세 사람은, 미술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다양한 대화를 계속해서 나누었다.
석호의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나서는 석중의 사업 이야기가 이어졌으며.
그 뒤에는 석중과 우진의 연결고리 중 하나인 소정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그나저나 소정이는, 요즘 드라마 만든다며?”
“맞아. <천년의 그대>라고 꽤 크게 준비하는 것 같던데. 나도 투자금 좀 태웠어.”
“재밌네. 소정이 걔가, 어릴 때부터 똘똘하기는 했지.”
소정은 석중과 나이 차이가 꽤 많이 나는 동생이었기에 두 사람이 미국으로 유학 갈 즈음 고등학생이었고.
석호는 마지막으로 봤던 그녀의 모습이 고등학생에 머물러 있었으니, 그녀가 기획사를 차려서 드라마까지 제작한다는 사실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이야기는 돌고 돌아 다시 우진의 이야기까지 이어졌다.
소정이 제작하는 드라마에 우진도 관계되어 있었으니, 자연스레 이야기가 우진의 사업 얘기까지 흘러온 것이다.
그런데 한참을 이야기하던 우진은, 파빌리온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도중 석호와 눈이 마주치자 문득 궁금했던 게 하나 떠올랐다.
“그런데 형님.”
“응?”
“혹시 이번 파빌리온 대금 책정에……. 형님께서 개입되어 계신 건 아니죠?”
그리고 우진의 그 질문을 들은 석호는, 기분 좋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아 맞다. 그 얘길 까먹고 있었네.”
“네?”
“우진이 너. 그때 우리 회사 기획실장한테 백지수표를 제안했었다며?”
우진이 멋쩍은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 들으셨어요?”
“그 얘기 듣고 진짜 내가 감탄했다니까.”
“감탄이요?”
“네 수완에 감탄한 거지. 거기서 어떻게 우리 기획실에 그런 딜을 칠 생각을 했는지. 물론 결과론적인 얘기긴 하지만, 그건 네 입장에서든 우리 패러마운트 사 입장에서든, 정말 최고의 선택이었거든.”
석호의 이야기를 듣던 우진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그 딜이 우진의 입장에서야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치더라도, 패러마운트의 입장에서는 왜 최고의 선택인지 이해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석호의 다음 말이 이어지자, 우진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오늘 내가 여기 앉자마자 했던 얘기 기억하지?”
“음……. 신인 작가 키우는 이야기요?”
“맞아.”
잠시 뜸을 들인 석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건 서우진이라는 건축가의 네임밸류가 이미 커졌으니 경우가 좀 다르긴 한데, 어쨌든 패러필드의 파빌리온은 소장 가능한 네 첫 작품이나 다름없는 상황이거든.”
“그렇……죠?”
“아마 이 파빌리온의 가치는, 앞으로 네가 성장함에 따라 더 크게 증폭될 거야. 한 십 년 정도 지나면, 열 배. 아니 그 이상도 가치가 증가하겠지.”
석호가 우진을 마주 보며,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네가 백지수표를 던졌다고 해서, 우리가 이 작품의 디자인 Fee를 헐값에 지불한다? 그건 아주 바보 같은 짓인 거야. 패러마운트쯤 되는 대기업의 입장에선 당장 일억이나 이십억이나 별 부담 없긴 마찬가지인데……. 처음에 우리가 책정한 가격이 너무 헐값이 돼버리면, 나중에 재평가될 수 있는 가치에도 그에 따른 한계가 생겨버리거든.”
그리고 이 말을 듣는 우진은, 동시에 두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석호의 말처럼, 패러마운트가 결코 손해 보는 액수를 지불한 게 아니라는 점.
두 번째는 우진의 파빌리온에 책정된 가격에, 석호의 입김이 확실히 들어갔다는 점.
“그러니까 그때 네 제안은, 결과적으로 우리 회사든 너든 윈-윈 할 수 있었던 최고의 제안이었어.”
“이게 그렇게 되는 거군요. 하하. 솔직히 거기까지 생각하진 못했었는데…….”
“거기까지 생각했으면 네가 사람이냐. 크크.”
때문에 우진은 석호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제안이 결국 패러마운트 사에도 이득이 되는 제안이기는 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우진이 도움받은 것 또한 사실이니까.
“감사합니다, 형님.”
“뭐가?”
“형님께서 제 작품 키워주신 거잖아요?”
“하하. 키워 줬다라……. 그게 그렇게 되나?”
우진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 셈이죠. 형님 말씀처럼 제 첫 작품이 어떤 평가를 받느냐에 따라, 미래가치의 가능성이 훨씬 더 커질 테니까요.”
우진의 이야기를 듣던 석호는 말없이 웃었다.
그것은 무언의 긍정이었다.
딱히 우진에게 생색낼 생각을 한 것은 아니지만, 도움 준 것을 부정할 필요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조용히 우진의 말을 들으며 맥주를 마시던 석호가, 잠시 후 장난스런 어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우진이 너, 기브 앤 테이크 알지?”
우진이 웃으며 대답했다.
“알죠. 당연히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죠.”
석호도 마주 웃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내가 조만간 서울에 갤러리 하나 지어 볼 생각이야.”
“갤러리요?”
“슬슬 완전히 독립해 볼 생각이거든.”
그리고 석호의 말을 듣던 우진은,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네가 지어줬으면 좋겠어.”
“……!”
“그리고 그 갤러리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갤러리였으면 좋겠어.”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