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227화 (227/315)

227화

새 술은 새 부대에

전생의 어린 시절.

우진은, ‘포장지’가 그리 중요하다고 생각지 않았었다.

포장지는 결국 상품을 감싸고 있는 껍데기일 뿐, 진정한 가치는 그 안에 들어있는 알맹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나이를 먹어가고 여러 사업장을 돌며 수많은 경험들을 하면서.

그 생각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리 알맹이가 알차고 튼실하더라도.

포장지가 너무 후줄근하면, 그 안에 담긴 훌륭한 가치까지도 빛이 바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물론 포장지만 번지르르하고 알맹이가 비어있는 것은, 당연히 최악의 상품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진이 깨달은 것은, 포장지 또한 상품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개념이었고.

그것이 곧 브랜딩이었다.

그리고 지금 우진의 앞에 앉은 노신사 임중우는, ‘브랜딩’이라는 단어를 얘기하고 있지 않을 뿐 정확히 그 개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다진건축. 처음 들어보셨지요?”

임중우의 이야기에, 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죄송하게도 그렇습니다.”

미안하다는 듯 말하는 우진을 향해, 중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허허. 미안할 것 없습니다. 애초에 저희는 회사 이름을 걸고 사업을 잘 벌이지 않으니까요.”

“그렇군요.”

중우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이 회사 자체가 부동산 투자의 일환으로 설립한 회사여서 그런지, 제가 처음부터 회사를 키울 생각보다는 자산을 키울 생각이 강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회사를 키우는 것과 자산을 키우는 것은 다르다.

본질적으로 ‘가치’를 키우는 방향성이라는 측면에서는 같은 맥락이기도 했지만.

회사에 돈이 많은 것과 인지도가 높은 것은 엄연히 다를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자산가치로 따지면 임중우 사장의 다진건설이 우진의 WJ 스튜디오보다 훨씬 더 큰 매출 규모와 자본을 가지고 있었지만.

대중적인 인지도 측면에서는 반대로 WJ 스튜디오의 인지도가 훨씬 더 컸으니.

이것은 두 회사 대표가 각각 가지고 있는 성향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던 임중우 대표가, 커피를 홀짝이며 조금 더 진지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다진건축과 WJ 스튜디오는, 서로 훌륭한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너지라면…….”

“저희 다진건축은 돈과 땅을 가지고 있고, 서 대표님께서는 인지도와 설계역량을 가지고 계시고.”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우진이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며 대답하자, 임중우는 기분 좋게 웃었다.

“그리 겸손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도 건축업계에 벌써 30년을 넘게 있었고, 최근 서 대표님께서 해내신 일들이 얼마나 대단한 것들인지 알고 있으니까요.”

처음 우진은 임중우의 이 칭찬이, 최근 이슈화되고 있는 패러필드의 파빌리온을 이야기하는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알고 보니 임중우는 우진이 EAC에서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무척이나 높게 평가하고 있었고, 이것은 우진에게 의외였다.

우진의 눈에 임중우는 디자이너라기보다 사업가에 가까웠는데, EAC는 건축학도가 아니라면 그 가치를 잘 알기 힘든 것이었으니까.

우진의 이런 이야기에, 임중우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지만, 저도 건축이 전공이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돈 버는 일이 재미있어서 직접 설계하는 데에는 손을 뗀 지 오래지만, 업계 사정이야 누구보다 잘 알지요.”

대화할수록 임중우라는 인물은 배울 점이 많은 호감형의 인물이었고, 그래서 대화는 아주 훈훈하게 물 흐르듯 흘러갔다.

처음부터 임중우가 우진이라는 사람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몰랐다.

부동산 김 씨는 두 사람이 편히 대화할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해 주었고.

그 가운데 두 사람의 사업 이야기는 천천히 진전되기 시작하였다.

임중우가 오픈한 필지의 지번을 확인한 우진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 진짜 금싸라기 땅을 잘 잡으셨군요.”

“허허. 서 대표님이 그리 말씀해주시니 기분이 좋습니다. 그려.”

부동산 김 사장에게서 받은 지도를 펼치고 사업지에 동그라미를 친 우진은, 잠시 지도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확실히 타운하우스 느낌의 초호화 빌라 단지를 조성하기에 최적화된 입지입니다.”

“그렇습니까?”

“입지의 유일한 단점이 역에서 꽤나 멀다는 부분인데……. 사실 초호화 주거에 역세권은 의미가 없는 입지조건이지요.”

“후후. 역시 핵심을 바로 보시는군요.”

“게다가 설계만 잘하면 강변북로 진 출입까지 편리하게 만들 수 있을 만한 위치이니……. 어중간하게 역에 가까운 것보다 이편이 훨씬 더 매력적이네요.”

임중우가 청담동에 짓고 싶어 하는 고급 빌라는, 한 세대 당 최소 분양가 30억부터 시작하는 초호화 주택이었다.

그리고 이런 집에 사는 사람에게, 대중교통이 얼마나 가까운 지 여부는 그리 중요치 않은 게 당연하였다.

그리고 우진과 대화가 이어질수록, 임중우는 점점 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세대 수는 일부러 30세대에 맞추시려는 거죠?”

“예리하시군요. 맞습니다. 분양가로 태클 걸리고 싶지는 않거든요.”

“좋은 판단이신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호화주택 컨셉이라면 이 부지에 아무리 세대수를 구겨 넣어도 35~40세대 정도가 한계거든요.”

“허허, 설계안도 안 짜보시고 바로 견적이 나오십니까?”

“제가 사실 주거설계는 좀 도가 텄거든요. 하하.”

솔직히 처음 김 사장의 주선으로 이 자리에 나올 때만 해도, 임중우는 우진이라는 인물에 대해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우진의 커리어나 브랜드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것과 별개로, 손발을 맞출 수 있는 사람인지는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기 전까지 알 수 없는 부분이었으니까.

중우는 우진의 나이가 20대라는 사실도 미리 알고 있었고, 그 나이대에 이런 커다란 성공을 거두면 사람이 거만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우진은 중우가 생각했던 느낌과 너무 다른 사람이었다.

거만하기는커녕 과할 정도로 겸손한 사람이었던 데다.

건축이라는 업계 전반에 대한 지식과 노련함이 도저히 20대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뛰어났으니 말이다.

땅을 보는 눈도 뛰어났고, 부동산의 흐름을 읽을 줄도 알았으며.

대화 속에서 자신의 가려운 부분을 살살 긁어줄 줄도 아는 친구였다.

십 년 이상 현장 바닥에서 구른 업자 같기도 하였으며, 중우 자신과 동류인 닳고 닳은 투자자 같기도 하였다.

오히려 우진을 만나보기 전에 막연히 생각하고 있던 외국물 먹은 디자이너의 이미지가, 가장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대체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20대에 이런 수준이 될 수 있는 거지?’

그래서 사업장에 대한 이야기들이 얼추 다 끝나갈 무렵.

중우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처음 중우의 목적이 ‘서우진’이라는 브랜드 가치를 빌리는 정도였다면.

지금 중우의 머릿속에 우진은, 어디서도 찾기 힘든 완벽한 사업 파트너였다.

“사장님께서 원하시는 건, 라는 타이틀이시겠지요?”

우진의 물음에, 중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저희 다진건축은 대형 건설사들과 달리 브랜드가 없으니. 서 대표님의 인지도를 빌려 부족한 부분을 메워보려는 것이었지요.”

솔직하고 담백한 중우의 이야기에, 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제 타이틀이라서 그런 건 아니고, 확실히 효과가 있을 전략입니다.”

“허허. 그러니 이렇게 김 사장님께 부탁드려, 서 대표님을 만나 뵙고자 한 것이지요.”

“하지만 한계점도 분명히 존재하긴 합니다.”

“한계점이라면…….”

“반대로 사장님께서 짓고자 하시는 프리미엄 주거의 네임밸류가, 제가 가진 인지도라는 천장을 넘기 힘들다는 부분이지요.”

“……!”

우진의 말을 들은 순간 중우는 잠시 생각에 잠겨야 했다.

그런 방향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서우진 대표의 인지도가 대단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것만으로 대형 건설사의 프리미엄 브랜드를 넘어서긴 쉽지 않겠지.’

물론 꼭 대형 건설사를 넘어서야 한다는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업력은 물론 자본 규모부터가 압도적으로 차이 나는데, 그것을 뛰어넘겠다는 생각으로 우진을 찾아온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우진이 말한 그 ‘한계점’이라는 것에 대해 괜찮다고 말하려는 순간, 우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차라리 이건 어떻습니까, 사장님.”

우진의 반짝이는 눈을 발견한 임중우가 기대 어린 표정이 되었다.

“어떤 다른 괜찮은 제안이 있습니까?”

임중우와 눈이 마주친 우진이, 잠시 뜸을 들인 뒤 은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기회에 한번, 도심의 타운하우스라는 컨셉을 가진 프리미엄 주거 브랜드를 제대로 런칭해 보시는 겁니다.”

“……!”

“저희 WJ 스튜디오에 단순히 디자인‧설계를 의뢰하시는 걸 넘어서, 협업으로 신규 브랜드를 런칭해 보자는 것이지요.”

“오호…….”

관심을 보이는 중우의 표정을 확인한 우진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야기를 덧붙였다.

“말씀하셨던 것처럼 다진건설은 자본과 인프라를 가지고 있고, 저희 WJ 스튜디오는 글로벌에서 인정받은 디자인 역량과 인지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진과 중우의 눈이, 허공에서 다시 한번 마주쳤다.

“아직 한국 주택시장에 개척되지 않은, 새로운 분야의 브랜딩에 한 번 도전해보자는 겁니다.”

* * *

임중우와 우진의 이야기는, 꽤 오래도록 이어졌다.

우진이 워낙 큰 건에 대한 떡밥을 던져 놓은 탓에, 나눠야 할 이야기들이 훨씬 더 많아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눴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표정에는 활기가 넘쳤다.

대화를 하는 데 에너지가 소모되기는 하지만, 한 마디 한 마디가 생산적이지 않은 내용이 없었으니 말이다.

하여 그렇게 거의 저녁 시간까지 대화를 나눈 뒤에야,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

“이거……. 김 사장님께 미안합니다 그려. 저 때문에 오늘 장사도 제대로 못 하시고…….”

“하하. 아닙니다. 저도 좋은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저도 감사드립니다, 김 사장님. 덕분에 이런 좋은 기회도 얻게 되네요.”

기분좋게 김 씨와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부동산 밖으로 나섰다.

김 씨의 부동산 앞에는, 우진의 차와 임중우의 차 한 대가 나란히 주차되어 있었다.

임중우가 나오는 것을 발견한 개인 기사가, 차 문을 열고 나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오늘 정말 즐거웠습니다, 서 대표님.”

“저도 마찬가집니다, 사장님. 제게 이런 좋은 제안을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하, 제안이야 저도 서 대표님께 받았지요.”

우진과 악수를 한 번 더 나눈 임중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오늘은 퇴근 하십니까?”

우진이 대답했다.

“아, 이 뒤에 또 미팅이 있어서. 아쉽게도 퇴근은 못 합니다.”

“일이 바쁘시군요. 하하. 어떤 미팅입니까?”

중우의 물음에, 우진이 가볍게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 성수동 전략정비구역 쪽에 설계공고가 떴는데, 그 건 관련해서 미팅 잡혀있는 게 있어서 말입니다.”

우진은 진짜 별생각 없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임중우는 우진 이상으로 부동산 투자에 빠삭한 사람이었고, 때문에 성수 전략정비구역도 바싹 꿰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우진의 그 말을 들은 임중우가, 왠지 묘한 표정이 되었다.

“흠. 혹시 서 대표님……. 이번에 전략정비구역 통합 설계 공모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만……?”

이어서 임중우의 입에서,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허허. 이거 일이 뭔가 재밌게 굴러가는데…….”

“뭐가 말입니까?”

임중우가 우진을 향해 다시 물었다.

“조금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혹시 서 대표님. 건축가 협회 쪽에 연줄이 좀 있으신지요?”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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