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다시 봄
지금까지도 여러 번 그래왔지만, 이번에도 우진의 활약은 또 다른 변수를 만들어 내었다.
일 년 전쯤 혹시나 해서 던져뒀던 씨앗 하나가, 우진의 활약으로 인해 의도치 않게 발아하였으니 말이다.
‘해외 산학협력이 이렇게까지 빠른 시점에 시작될 수 있을 줄이야.’
그렇다고 이걸 나비효과라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란 나비의 날갯짓처럼 작은 작용이 폭풍우처럼 커다란 변화를 유발시킨다는 것인데.
EAC에서 우진의 활약은 결코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라고 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니까.
우진의 날갯짓은, 이제 더 이상 작은 나비의 그것이 아니었다.
우진의 행보 하나하나가, 건축이라는 업계 자체에 조금이라도 직접적인 파장을 줄 수 있는 수준으로 성장한 것이다.
그래서 우진은 뿌듯하면서도, 한편으론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더욱 꼼꼼히 듣기 시작하였다.
“브루노, 실례지만 혹시 어떤 대학들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조만간 협회에서 공문을 드리기는 할 테지만, 그래도 미리 말씀드리는 게 더 좋겠지요.”
“감사합니다.”
“일단 K대와의 협약 의사가 확실히 있는 대학이 총 세 곳입니다.”
“세 곳이나 됩니까?”
“네.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오……!”
“특히 스페인 건축학교의 양대 산맥 중 하나인 UPM(Universidad Politécnica de Madrid)에서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이 아주 고무적이지요.”
UPM은 스페인 마드리드에 위치한 국립 대학으로, 스페인의 명문 공과대학 중 하나이다.
카르타헤나 공과대학교(UPCT), 카탈루냐 공과대학교(UPC), 발렌시아 공과대학교(UPV)와 함께, 4대 명문 공과대학교 네트워크(UP4)를 결성하고 있는 국립 공과대학교인 것.
특히나 건축 쪽에서는 더 이름 있는 학교였기 때문에.
이 UPM에서 K대와의 협약에 관심을 보였다는 것은, 브루노의 말처럼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오오. 마드리드 공과대학이라니……!”
꽤 놀란 표정이 된 윤치형을 향해, 브루노가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현재 마드리드 공과대학의 건축학부(Arquitectura) 학과장이, 스페인 건축가협회 임원이면서 저와 마테오의 직속 후배이기도 합니다.”
“아, 그래서……!”
“그렇다고 해서 저희가 압력을 넣거나 한 것은 아닙니다. 하하. EAC가 끝난 직후에, 그 친구가 제일 먼저 저를 찾아왔었으니까요.”
브루노의 말이 이어질수록, 우진은 점점 더 놀랐다.
처음 이야기가 나왔을 때에는 단순히 몇몇 마이너한 대학들 위주로 협약 논의 정도를 진행하자는 것인 줄 알았는데.
이미 UPM같은 메이저급 대학들까지도 관심을 갖고 있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브루노가 들고 온 서류들을 보면, 실질적인 의사도 어느 정도 밝힌 것 같았으니.
어쩌면 12년 하반기부터는 실질적인 교류가 오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윤 교수님.”
“말씀하세요, 브루노.”
“어쩌면 다음 달쯤, 제가 영국의 건축가 한 분과 함께 교수님을 찾아뵐지도 모릅니다.”
브루노가 운을 떼자, 윤치형이 기대감 넘치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영국의 건축가시라면……?”
우진 또한 귀를 쫑긋 세우고 브루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고.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어쩐지 익숙한 이름이었다.
“혹시 아실는지 모르겠지만, 에단 클라크(Ethan Clark)라고, 건축으로 영국 왕실에서 귀족 작위까지 받으신……. 저명한 건축가가 한 분 계십니다.”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익숙한 이름에 우진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오래지 않아 그 이름을 어디서 들어봤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아, 그 꼰대 할배……!’
하이드파크에서 그를 만났던 기억은, 불쾌했던 것과 별개로 꽤 인상적이었던 경험이었으니까.
이어서 우진의 표정은 살짝 굳을 수밖에 없었다.
EAC 이후 그와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는 우진은, 아직도 그의 고집스런 면면만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다.
“아, 그분이라면 저도 이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브루노의 다음 말이 떨어졌을 때, 우진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 왕립 건축가 협회(RIBA)의 이사장님 아니십니까?”
“오오, 맞습니다, 교수님.”
일단 그 할배(?)가 이렇게까지 대단한 배경을 가진 건축가인 줄도 몰랐으며…….
“에단은 RIBA의 이사장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 AA스쿨의 원로 교수님 이십니다.”
“그, 그렇다면 설마……!”
지금 브루노의 이야기 흐름 대로라면, K대에 관심이 있는 듯 보였으니 말이다.
‘나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을 텐데, 대체 왜……?’
윤치형의 입이 쩍 벌어졌고, 우진도 그와 다르지 않은 표정이 되었다.
이어서 브루노는 기분 좋게 웃는 얼굴로, 충격적인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윤 교수께서 생각하시는 그 설마가 맞습니다.”
“……!”
“AA스쿨에서도 K대와의 협업에 관심이 있는 모양입니다.”
물론 브루노가 처음 얘기를 꺼낸 UPM을 비롯한 스페인의 건축대학들도, 충분히 이름 있고 뛰어난 인프라를 가진 학교들이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건축디자인’이라는 카테고리에 한정한다면, 그들 대학을 AA스쿨과 동일 선상에 놓기는 조금 무리가 있었다.
AA스쿨은 영국뿐 아니라 유럽 전체로 놓고 봐도, 항상 첫 손가락에 꼽힐 만한 곳이었으니까.
우진과 윤치형이 놀라는 사이, 브루노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물론 AA스쿨에서, UPM처럼 실질적인 협약 의사까지 보인 것은 아닙니다. 다만 에단이 그런 방향으로 제게 운을 떼었던 것은 사실이며, 윤 교수님을 한번 뵙고 싶어 하시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 그렇군요.”
떨떠름한 표정의 윤치형을 향해, 브루노가 빙긋 웃었다.
“아마 내달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면, 좋은 결과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만약 AA스쿨과 어떤 협약이 맺어진다면, 그것만으로도 K대 공간디자인과의 위상은 엄청나게 높아질 것이었다.
어쩌면 라이벌이자 아직까지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S대 건축과의 인지도를, 단번에 넘어설 수 있을지도 모를 정도의 파급력.
물론 협약을 맺는다고 해서, 교환학생 같은 직접적인 교류는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었다.
AA스쿨은 일반적인 학부과정과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대학이었고.
그런 이유 때문에 한국에서 건축 학부를 졸업한 졸업생이라 하더라도, AA스쿨에 들어갈 시 1학년이나 2학년으로 입학해야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우진 입장에서 상관이 없다.
산학협력 측면에서 AA스쿨의 뛰어난 학생들을 WJ 스튜디오에 데려올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그림이었으니까.
그래서 기분이 좋아짐과 동시에, 조급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아직 WJ 스튜디오는 좀 더 준비가 돼야 하는데…….’
만약 AA스쿨과의 산학협력이 체결된다고 해도, 아직 그곳의 학생들이 매력을 느낄 만큼 WJ 스튜디오의 인지도가 있는 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일단 해외에 내 이름을 알리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니, 이번에 패러필드의 파빌리온이 완성되면 적극적으로 해외 매거진에 푸쉬해야겠어. 연말에 사옥이 완공되면, 그것도 훌륭한 포트폴리오가 되어 주겠지.’
생각지도 못했던 시점에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들을 들은 탓에, 우진의 머릿속은 점점 더 복잡해지기 시작하였다.
* * *
청담 선영아파트의 조합장 곽홍식은, 작년 연말까지만 해도 아주 여유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모든 개발 일정이 걸릴 것 하나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으며, 일반분양까지도 무척이나 순조로웠으니 말이다.
물론 평당 3천만 원 중반대의 분양가는, 한동안 고분양가라는 기사를 양산해 내었지만.
그런 기사들에도 불구하고 깔끔하게 완판하는 쾌거를 만들어 내었다.
일반분양까지 완벽히 해결되었고 비대위로부터 손해배상까지 깔끔하게 받았으니.
이제 느긋하게 완공만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사실 시공 과정에서 건설사가 허튼 짓을 하지 않는지 감시하지 않는 것 또한 조합의 일이었지만, 그런 부분에서도 꽤나 수월하였다.
처음부터 선영아파트 사업장을 담당했던 박경완은 홍식이 따로 요청하지 않아도 꼬박꼬박 공사현황을 문서화하여 보내주었으니까.
정신없이 바쁘던 11년 초와 달리, 조합 사무실에 앉아서 커피나 홀짝이는 것이 대부분의 일과가 됐던 것이다.
‘월급도 따박따박 나오고……. 여기가 바로 천국이군, 천국이야.’
하지만 그런 그의 여유롭고 행복한 나날은, 새해가 밝자 끝나버리고 말았다.
오랜만에 뜬금없이 나타난 우진이, 그의 마음의 평화를 깨버렸으니 말이다.
[혹시, 이번에 조합장 한 번 더 해보실 생각 없으십니까?]
[통합 재정비 안이 나오는 시점에 1지구의 리스크만 해소되면……. 어떤 결과가 만들어질지는 조합장님도 머릿속에 그려지시지 않습니까?]
[청담 때는 거의 혼자셨지만, 이번에는 제가 있고 여기 박 상무님이 있습니다.]
[조합장님 그 추진력 발휘하셔서 조합만 잘 이끌어 주시면, 제가 길은 고속도로처럼 닦아드리도록 하지요.]
[앞길에 조약돌 하나 남기지 않고 싹 다 깔끔하게 밀어드리겠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간사해서, 한번 달콤한 맛을 보고 나면 그 맛을 잊는 것은 쉽지 않다.
우진 덕에 선영아파트 조합일이 얼마나 잘 풀리는지 이미 경험한 곽홍식이었고.
그 덕에 단기간에 십억 단위 차익까지 남길 수 있었던 그였으니.
우진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귓가에 찰싹 휘감길 수밖에 없던 것이다.
‘제기랄. 이 짓……. 죽을 때까지 절대로 다시 할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홍식은 결국 우진의 마수(?)를 피하는 데 실패했고, 비대위 청산 과정에서 얻은 십수 억의 차익을 고스란히 성수동에 집어넣게 되었다.
일단 조합이 설립되기 전까지는 크게 바쁘실 일 없을 거라는, 우진의 마지막 말에 넘어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우진의 그 말은 조삼모사에 불과할 뿐이었다.
일단 홍식 자신의 돈이 십억 이상 들어가 버리자, 우진이 따로 뭔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자진해서 발 벗고 뛰게 된 것이다.
우진은 거짓말하지 않았지만, 결국 구르고 있는 홍식이었다.
“아, 어르신! 하하, 제 말 믿으시라니까요.”
“우리 동네가 저 청담동처럼 될 수 있다는 말이…… 참말로 사실인가?”
“그렇다니까요. 최근에 뉴스에 났던 청담 클리오 써밋 보셨죠?”
“그, 그랬지.”
“성수동도 강만 건너면 청담입니다. 못할 게 어디 있겠습니까.”
“험험.”
“이번에 서울숲 옆에 지어진 번쩍거리는 주상복합도 보셨지요?”
“봤지.”
“아직 시세는 크게 오르지 않았지만, 조합원들은 엄청 벌었습니다. 그 분양가에도 결국 다 완판됐잖습니까.”
“우리도 가능할까……?”
“그럼요. 물론이지요.”
낡고 오래된 성수동의 단독주택에는, 60대인 홍식보다도 훨씬 나이가 많은 어르신들이 많았다.
그리고 조합설립에 찬성표를 던지지 않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변화를 싫어하는 나이 많은 사람들.
홍식은 우진이 별달리 언질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알아서 어르신들을 찾아다니며 조합설립 동의율을 올리고 있었다.
청담 선영아파트의 조합이 처음 세워졌던, 바로 그때처럼 말이다.
‘하이고, 내 팔자야…….’
처음에는 우진이 움직일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려 했지만, 몸이 근질거리는 데다 똥줄이 타기 시작하자 그럴 수가 없었다.
우진이 말했던 서울시의 개발계획발표가 봄이 왔음에도 아직 나오지 않았으니까.
‘설마 내가 서 대표한테 낚인 건 아니겠지…….’
바쁘다며 임시 조합 사무실에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 우진이 슬슬 얄미워지기 시작할 정도.
물론 겉으로 별달리 관심 없어 보이는 것과 다르게, 우진은 이 순간에도 홍식의 일 거수 일투족까지 다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런 이유로, 오늘도 청담 선영의 조합 사무실이 아닌 성수동으로 자진 출근 중인 홍식.
“크흐음.”
성수 1지구 내에 있는 쓰러지기 직전의 임시사무실에 도착한 그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인스턴트 커피를 종이컵에 휘휘 저어 타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위이이잉-!
탁자 위에 놓아두었던 홍식의 전화기가, 요란스레 진동하기 시작하였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