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다시 봄
홍식의 스마트폰에 떠있는 이름은, 그의 꽤 오래된 친한 친구의 이름이었다.
과거 은행원으로 일하던 시절에 오래 함께 일했던, 직장동료이자 청담동의 동네 친구.
“여, 형택이. 어쩐 일이야?”
[허허. 내가 꼭 무슨 일이 있어야 자네한테 연락하는 사이던가?]
그리고 최근 청담 선영 비대위 청산 과정에서, 홍식이 큰돈을 벌었다는 소식을 듣고 진심으로 배 아파해 준(?) 진정한 친구.
“그래도 뭐 용건이 있으니까 전화했을 것 아냐, 인마.”
[여전히 까칠허기는…….]
“그래서. 무슨 일인데?”
홍식은 이 친구에게 갑자기 연락 온 이유가 꽤나 궁금했다.
벌써 알고 지낸 지가 삼십 년이 다 돼가는 친구였기 때문에, 목소리만 들어도 뭔가 신이 난 것을 느꼈던 것이다.
홍식이 기억하기로 친구의 이런 목소리는, 자랑거리가 있어 입이 근질거릴 때의 바로 그 목소리였다.
‘아들놈이 대기업에 취직이라도 했나?’
오늘은 이 실없는 친구가 또 어떤 자랑질을 할지 궁금해진 홍식은 가만히 전화 너머로 귀를 기울였고.
[험험.]
한 차례 헛기침을 한 홍식의 친구 형택이, 은근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홍식이 자네, 혹시 전에 내가 했던 이야기 기억하나?]
“음? 무슨 얘기?”
[왜, 있잖아. 지난번에 자네가 투자제안 했었을 때.]
“아, 선영아파트?”
[그래. 그때 내가 다른 투자처가 있다고 거절했었잖아?]
“그랬었지.”
홍식이 형택에게 했던 제안은, 비대위 청산과정에서 그들의 지분을 매수할 때 함께하자던 것이었다.
그때 홍식의 말을 듣지 않았던 형택이 배 아파했던 것이었고 말이다.
형택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그때 자네 제안을 듣지 않아서 엄청 후회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내 투자처도 꽤 괜찮은 곳이었거든.]
“그래?”
홍식은 흥미가 동했는지, 스마트폰을 귀에 더 바싹 가져다 대었다.
금융권에서 오래 일한 데다 홍식만큼이나 부동산에 빠삭한 친구인 형택이었기에, 그가 투자했다는 투자처가 꽤 궁금해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때 어디 산다는 건지 물어보질 않았었네. 워낙 정신이 없었으니…….’
물론 투자처 얘기를 한다고 해서, 지금 홍식에게 새로운 투자를 추가할 여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거의 대부분의 여유자금을, 성수 1지구에 몰빵해 둔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궁금한 것은 궁금한 것이었고, 그래서 홍식은 기대하였다.
그런데 친구의 다음 말을 기다리던 그는, 잠시 후 당황하여 마시던 커피를 입 밖으로 뿜을 뻔하였다.
[자네, 성수 전략정비구역 알지?]
“푸훕……!”
[응? 왜 그러나? 무슨 일 있어?]
“아, 아니야. 얘기해 봐.”
지금 홍식이 출근하여 앉아있는 곳이 성수 전략정비구역의 1지구 사무실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이 이름이 나오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형택의 이야기는, 점점 더 흥미진진(?)해지고 있었다.
[내가 그때 샀던 곳이, 성수 전략정비구역 내의 2지구거든.]
“그래?”
2지구는 전략정비구역 내에서, 가장 리스크가 적은 안정적인 구역이었다.
진행속도도 빠르고 조합 내 잡음도 가장 적고.
구역 내에 상업 시설이나 종교시설도 거의 없어서, 이주 리스크도 가장 적은 구역.
하지만 리스크가 적은 만큼 가장 투자금이 비싼 구역이 2지구였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거지?’
형택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건 아직 대외비인데, 이번에 이쪽에 진짜 호재가 크게 터졌어.]
“오…… 그래?”
[서울시청 쪽에서 근무하는 후배 놈이 하나 있는데, 어제 저녁에 술 한잔했거든.]
이야기를 듣던 홍식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시청 쪽에 형택의 인맥이 있다는 것은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고.
성수동과 관련된 호재가 그쪽에서 나왔다는 것은, 우진이 말했던 바로 그 ‘강변북로 지하화 사업’의 일환일 확률이 높았으니 말이다.
‘역시……!’
하지만 홍식은 내색하지 않으며, 다시 전화기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 크게 터졌다는 호재가 대체 뭔데?”
[흐흐, 궁금하지?]
“그래. 궁금하니까 빨리 얘기 좀 해봐.”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형택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홍식의 에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강 르네상스> 사업의 일환으로 강변북로 지하화 사업이 추진되기 시작했으며.
그 강변북로 지하화의 첫 번째 대상 구간으로 성수지구 쪽이 선정되었다는 것이다.
[일단 여기까지만 해도 엄청난 호재 아니냐?]
홍식은 히죽히죽 웃으면서도, 모른 척 계속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렇지. 전략정비구역이 한강이랑 바로 붙어있으니, 한강공원도 좋아지고 소음 분진도 사라지고. 큰 호재가 맞지.”
홍식의 맞장구에 더욱 기분이 좋아진 형택이, 킬킬거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래?”
[이 강변북로 지하화 사업이, 아예 전략정비구역 개발계획이랑 묶여서 추진된다더라고.]
친구의 목소리를 듣던 홍식이,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왔다……!’
1지구 지분을 매입한 뒤 우진에게 다시 자세히 들었던 개발계획 중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바로 이 포인트였는데.
형택의 입에서 지금 그 이야기가 나오려고 하는 것 같았으니 말이다.
‘역시 서 대표가 허튼소리를 했을 리 없지……!’
그리고 형택은, 홍식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이게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 거냐면…….]
그의 입에서 이어진 이야기들은, 우진에게 들었던 것과 거의 틀리지 않고 그대로였으니 말이다.
물론 우진이 말해준 것처럼 완전히 구체적이고 명확한 것은 아니었지만, 전반적인 얼개는 정확히 일치하였다.
[흐흐, 대박이지?]
홍식이 웃었다.
“그러게, 대박이네.”
[내부적으로 확정이 났다니까, 이번 주 내로 투자자들 사이에도 소문이 퍼지기 시작할 거야.]
“아무래도 그렇겠지. 시청에 지인이 있는 투자자가, 한둘은 아닐 테니까.”
[개발계획안이 정확히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용적률 제한 완화하는 것만 해도 일단 먹고 들어간다 이거야.]
홍식은 지금 상황이 너무 재밌었다.
보아하니 이 귀여운 친구는, 자신의 투자실적을 자랑하기 위해 우쭐거리며 전화한 듯싶었는데.
모르긴 몰라도, 홍식이 사둔 지분이 훨씬 더 클 것 같았으니 말이다.
홍식은 선영아파트로 남긴 차익 전부를, 여기에 몰빵 한 상황이었으니까.
“네가 산 건 지분 얼마짜린데?”
[흐흐. 뚜껑*[조합원 입주권을 받을 수 있으면서도, 지분이 가장 작은 물건을 칭하는 은어.] 하나랑 9평쯤 되는 거 하나?]
“9평은 좀 애매하지 않냐? 30평대 못 받을 것 같은데.”
[그거 공주가*[공동주택가격 : 건설교통부 장관이 아파트·연립·다세대 주택 등의 공동주택에 대하여 매년 공시기준일(1월1일) 현재 적정가격을 조사·산정하여 공시한 공동주택의 가격] 높은 물건이라, 30평대 아마 나올 거야. 내가 물건 보는 눈은 귀신이잖냐. 흐흐.]
형택의 말을 듣고 대충 견적이 나온 홍식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지분으로만 따지자면 홍식의 지분이, 거의 스무 배는 더 컸으니 말이다.
형택이 산 2지구는 그가 매수할 때 이미 프리미엄도 꽤 붙어있는 상황이었던데 반해 홍식이 매수한 1지구는 저평가였고.
그런 상황에서 투자금액이 10배는 차이나니, 지분 차이는 20배 이상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충 상황파악이 끝난 홍식이, 실실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흐흐, 형택아.”
[역시 이 형님밖에 없지? 이런 정보도 다 알려주고.]
“그래, 고맙다. 이런 기분 좋은 정보를 다 전화로 알려주고.”
[그야 당연히…….]
홍식의 말을 듣던 형택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는 다시 물었다.
[잠깐. 기분 좋은 정보라고? 성수에 지분이 있어야 기분 좋은 정보지 인마. 무슨 벌써 산 것처럼 미리 기분부터 내고 있어?]
그리고 홍식의 다음 말을 들은 순간.
“당연히 지분이 있으니까 기분이 좋지, 짜샤.”
형택은 그대로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뭐……?]
“사실 그때 선영아파트 가지고 있던 거 다 매도한 다음에, 차익 전부 성수동에 집어넣었거든.”
[뭐라고?!]
“뭔가 촉이 오더라고. 청담동에서 한번 벌고 나니까, 이번엔 영동대교 한번 건너보고 싶더라니까? 하하.”
[…….]
신이 난 홍식은, 전화통에 대고 자랑을 하기 시작하였다.
1지구에 홍식이 가진 지분만 200평이 넘었으니, 형택은 명함도 내밀지 못할 수준이었던 것이다.
물론 전략정비구역 내에서 가장 리스크가 큰 사업지가 1지구라고는 하지만, 어차피 개발계획이 뜨는 순간 시세차익이 생기는 것은 같았다.
1지구는 리스크가 큰 만큼, 매수가격이 훨씬 더 쌌으니까.
[와, 홍식이 이놈. 진짜 돈 귀신이라도 붙었나…….]
게다가 우진과 합작하여 1지구의 반대지분을 확보하여 진행속도를 높이고, 그것으로 2년 안에 관리처분까지 낼 계획이라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면.
아마 이 친구는 배가 아파 바닥을 구를지도 모를 것이었다.
‘이건 전화로 할 얘긴 아닌 것 같고…….’
홍식은 한껏 상기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조만간 성수동에서 쐬주나 한잔해. 덕분에 기분 좋은 소식 들었으니까, 술은 내가 산다.”
[지랄.]
“만나서 내가 괜찮은 정보 좀 나눠주려 했는데……. 싫으면 마시던가.”
[형님……!]
형택과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좀 더 나눈 홍식은, 곧 전화를 끊고는 사무실 소파에 몸을 푹 뉘였다.
통화하는 동안 타 놨던 인스턴트 커피는 전부 식어버렸지만, 어쩐지 맛은 더 달콤하게 느껴지는 홍식이었다.
“흐흐흐. 크흐흐흐.”
마치 실성하기라도 한 양, 실없는 웃음을 멈추지 못하는 홍식.
오늘 아침 출근길을 걸을 때만 해도 신세 한탄을 하던 홍식은, 어느새 다시 우진을 찬양하기 시작하였다.
“역시 우리 서 대표님……!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얼른 전화해봐야겠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스마트폰을 다시 집어 든 홍식은, 서둘러 우진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3월이 지나기 전에 조합설립을 성공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든 홍식이었다.
* * *
봄은 시작의 계절이다.
새 학기가 시작되며, 꽃과 나무가 자라나기 시작하는 계절.
그런 의미에서 12년의 봄은, 우진에게도 새로운 계획들이 시작되는 달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우진에게 가장 새로운 도전은, 바로 <천년의 그대> 드라마의 세트장을 시공하는 것이었다.
전생을 포함하여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세트장 디자인이라는 새로운 분야.
오늘 우진은 완성되어가는 세트장을 점검하기 위해 이천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 드라마의 총괄 디렉터이자 우진의 동업자인, KSJ엔터 강소정 대표의 차를 함께 타고 말이다.
“이제 거의 다 와 가네요.”
“지도상으로는 꽤 가까워 보였는데……. 거의 두 시간을 왔네요?”
“강 대표님 여기 와보신 것 아니었어요?”
“딱 한 번 와봤었죠. 그땐 제가 운전대를 잡은 게 아니라서 그런지, 이렇게 멀게 느껴지지 않았었거든요.”
“하하. 그러니까 제 차 타고 오시지.”
“어차피 저도 차 끌고 나왔는데, 번거롭게 뭐 하러 그래요?”
이제는 소정과 꽤 친해진 우진은, 편하게 조수석에 앉아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편한 것과 별개로, 세트장에 가까워질수록 우진은 점점 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으, 일단 내 눈에는 괜찮게 뽑혔는데…….’
건축적으로나 공간디자인 측면에서는 확실히 자신이 있었지만, ‘드라마 세트장’이라는 특수한 공간을 디자인하는 것이 처음이었으니.
실제 이곳에서 드라마를 촬영하게 될 촬영감독과 스탭들. 그리고 투자자들의 눈에, 여기가 어떻게 보일지 은근히 걱정된 것이다.
오늘 이천의 세트장에 오는 사람은, 이 차에 타고 있는 두 사람뿐이 아니었다.
“주연 여배우, 성하영 배우님으로 확정된 거 아시죠?”
“아, 알고 있습니다.”
“하영 씨도 오늘 아마 오실 거고……. 피디님이랑 촬영 감독님도 오실 거예요.”
“피디님, 촬영 감독님이야 당연하지만……. 배우님도 오신다고요?”
“네. 늦게 합류하셔서 아직 감독님 얼굴도 못 뵀다고, 스탭분들에게 인사도 하실 겸 오늘 오신다더라고요.”
성하영은 우진의 전생에서도 <천년의 그대>의 여자주인공이었다.
혹시나 여자주인공이 바뀔까 봐 걱정했던 우진으로서는, 막판에 성하영으로 결정 난 덕에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배우가 바뀐다고 대박 났던 드라마가 쫄딱 망하지는 않겠지만……. 아무래도 그대로 가는 게 베스트니까.’
어쨌든 여배우가 직접 세트장에 온다는 이야기에 더욱 긴장한 우진.
그런 우진의 상태를 알 리 없는 소정은 세트장에 가까워지자 디자인에 대한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고.
“오늘 세트장 보시면, 다들 깜짝 놀라시겠죠?”
“왜, 왜요……?”
“그야 서 대표님 작품이니까요. 유럽에서도 인정받으신 건축가님께서 직접 디자인하신 세트장인데, 당연한 것 아니겠어요?”
“…….”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소정의 차는 점점 목적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