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다시 봄
우진이 회귀한 뒤, 두 번째 겨울도 전부 지나갔다.
회귀 이후에는 언제나 그랬지만, 이번 겨울에도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민주영 대표의 국제 리빙페어 프로젝트 제안부터 시작된 KSJ엔터 강소정 대표와의 협업계획을 무사히 성사시켰으며.
EAC에서 우수 발표자로 선정되어 다시 언론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덕분에 해외 인터뷰까지 여러 번 잡혀 국제적으로 건축업계에 이름을 알리기도 하였고 말이다.
[한국의 건축디자이너 서우진, 디지털 건축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다.]
[스페인의 거장 마테오, “사업가적 역량과 디자이너적인 재능 모두 뛰어난 사람.”이라며 극찬.]
[영국 최고의 건축 명문 AA스쿨에서, 한국건축의 가능성을 알리다!]
아직 우진의 이름을 달고 완성된 포트폴리오가 없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인지도를 얻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적어도 글로벌 디자이너를 향한 발판만큼은 확실하게 다져 놓은 것이다.
이 와중에 왕십리 패러필드의 공사도 착착 진행되었다.
골조공사가 전부 끝나 어느 정도 건물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할 즈음, 우진의 파빌리온도 실제 모형 제작을 시작했다.
모듈화한 파빌리온의 부분 부분을 싹 다 미리 제작해둔 뒤, 패러필드의 모든 공사가 끝날 즈음 그것을 설치하는 방식으로 시공이 진행될 예정이었으니까.
이것의 관리 감독은 석현이 도맡았다.
파빌리온의 패브리캐이션 과정이 까다롭고 복잡했기 때문에, 석현이 직접 붙어서 설치 과정을 관리 감독 한 것이다.
패러필드는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고, 12년 연말에는 준공이 가능할 듯했다.
석현이 제작한 모듈의 파츠 하나를 실물로 확인한 브루노는, 감탄과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말이다.
“제 건축과 WJ 스튜디오의 작품이 만들어낼 멋진 공간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리는군요.”
서울시장 구윤권과의 만남에서부터 비롯된 성수동 개발계획에도 계획했던 대로 단단히 한 발짝 올리게 되었다.
곽홍식 조합장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직후, 우진부터 가장 먼저 1지구에 묵직한 물건 하나를 매수한 것이다.
우진에 이어 곽홍식도 거의 비슷한 크기의 물건을 매수하였고, 갑자기 성수동 사무실을 급습(?)했던 유리아도 얼떨결에 우진을 따라가 물건 하나를 계약하였다.
재밌는 것은, 유리아의 이야기를 들은 윤재엽이 그녀보다 더 큰 돈을 투자했다는 점이었다.
청담 선영 투자 때 본인만 추가로 돈을 벌지 못한 것이, 배가 꽤나 아팠던 모양.
“설마, 이번에도 니들끼리 해 먹으려는 건 아니지?”
“해먹긴 뭘 해먹어. 이 오빠가 벌써 잊었나 보네.”
“뭘?”
“우진이가 그때 세 번이나 전화해서 물어봤었잖아. 정말 안 살 거냐고.”
“몰라 기억 안 나. 중요한 건 지금이지.”
“뻔뻔하기는…….”
재엽에 이어 수하도 작은 지분 하나를 매수하였고, 석중과 소정까지도 우진이 추천해 준 물건을 그대로 사버렸다.
[보내준 물건 중 하나로 하면 돼지?]
“네, 형님. 그렇기는 한데…….”
[브리핑된 물건 중에 제일 위에 있는 거로 할게.]
“형님, 읽어보긴 하신 거죠?”
[맞다. 동생도 하나 하고 싶다고 해서, 그 바로 밑에 물건도 하기로 했어.]
“소, 소정 대표님도요?”
[그렇다니까.]
“자, 잠깐. 그럼 이게 그러니까…….”
[형 바빠서 다시 전화할게. 서류 다 준비해 두고, 내일 대리인 보낸다!]
“형님!”
뚜- 뚜-
다들 너무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서, 우진이 당황할 정도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
그렇게 우진의 지인을 통해서.
그리고 조합장 곽홍식을 통해서.
순식간에 거의 30여명 정도의 조합원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러다 보니 당연히, 계획은 순풍에 돛을 단 배처럼 물 흐르듯 진행되었고 말이다.
“거참, 너무 생각대로 술술 풀려서 당황스러울 정도긴 한데…….”
지분확보가 너무 순조롭다 보니, 반대로 최악의 상황도 문득 떠올랐다.
서울시에서 우진과 이야기한 것과 다르게, 개발계획을 취소한다는 최악의 상황.
물론 그렇게 되면 처음에 생각했던 다이나믹한 차익을 뽑아내기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큰 문제는 없었다.
<성수 전략정비구역>은, 강변북로 지하화 사업과 연계되지 않아도 충분히 가치 있고 좋은 투자처였으니까.
곽홍식과 합심해서 계획한 속도로 개발을 진행 시키기만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익을 볼 것이었다.
그래서 우진은 마음 편히, 서울시의 발표를 기다렸다.
‘뭐,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니까. 시장님께서 어련히 잘 해주시겠지.’
그렇게 우진의 두 번째 겨울이 지나고 세 번째 봄이 다가왔다.
2012년 3월.
우진은 어느새 연 매출 백억에 영업이익률 10퍼센트가 넘는 내실 있는 기업의 오너가 되어 있었고.
그와 동시에 3학년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3학년이 된 우진이 개강 첫날 학교에서 한 것은, 다름 아닌 강연이었다.
* * *
“야 연희, 너 설마 이제 학교 오는 거야?”
“응. 오전수업 없어서 방금 왔는데, 왜 무슨 일 있어?”
“헐. 대박. 오전에 우진 선배 강연 있었는데, 그걸 안 들었단 말이야?”
“미친……! 정말이야?”
“그렇다니까! 완전 대박이었어. WJ 스튜디오 창업 날부터 시작해서 스토리 쫙 풀어주시는데, 듣는 내내 소름이 돋았다니까?”
“하……. 이럴 수가……. 과사에서 연락도 따로 없었는데…….”
“당연하지. 갑자기 윤치형 교수님이 즉흥적으로 선배 불러다가 강연시킨 거니까.”
“EAC 얘기도 들려주셨어?”
“당빠! 와, 진짜 AA스쿨 컨퍼런스 홀에서……. 그 세계적인 건축가들 앞에서 발표라니.”
“…….”
“대리만족 오졌다 진짜.”
“선배 지금 과실에 계셔?”
“아니. 당연 안 계실걸? 그 바쁘신 선배님이 과실에서 노닥거리실 시간이 있겠어?”
방금까지 3학년 과실에 있다가 자판기 커피를 뽑아 나온 우진은, 우연찮게 들려온 후배들의 이야기에 입안에 있던 커피를 뿜을 뻔했다.
“켁, 케엑.”
그러자 그 옆에서 같이 걸어 나오던 선빈이, 피식 웃으며 우진에게 물어보았다.
“형, 좋아?”
“뭐가 인마.”
“아까 보니까 뭐 거의 우리 과 우상이던데.”
“우상은 무슨…….”
“후배들 눈빛 봤어?”
우진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 봤어. 좀 부담스럽긴 하더라.”
2학년이 끝난 지금, 우진의 남자 동기들은 대부분 군대에 가 있었다.
휴학 없이 스트레이트로 3학년까지 온 남자 동기는, 우진과 선빈, 그리고 제이든까지 셋뿐.
그중에서도 선빈은 이번에 3학년 학회장이 되었는데, 이것은 꽤나 감회가 새로운 일이었다.
1학년 때 학회장이었던 김기태를 보며 이를 갈았던 게 엊그제 같았는데, 이제는 가장 친한 동기 중 한 명이 학회장이 된 셈이었으니까.
우진은 총알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이 시간들이, 너무 아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어쨌든 지금 이 한 순간순간이, 전생에서 우진이 그렇게 원했던 대학 생활이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작년엔 진짜, 학교에 거의 있지도 않았었네.’
물론 그런 아쉬움과 별개로, 오늘도 교수님께 양해를 구한 뒤 다시 성수동으로 넘어가야 하는 일정이었지만 말이다.
“크크. 특히 신입생들 장난 아니던데? 아이돌 콘서트라도 온 줄 알았어.”
“오바는 무슨.”
“오바라니. 형 강연 끝나고 3초만 더 단상 위에 있었으면, 한 시간 동안 싸인만 해줘야 했을걸?”
“시끄럽고. 가던 길이나 빨리 가십시다, 동기님.”
“어휴. 아재 냄새. 이럴 때 보면 진짜, 우리 아빠 친구 같다니까.”
“맞을래?”
“그래도 다행이야.”
“뭐가?”
“형한테 아재미라도 있어서.”
“…….”
“그것마저 없었으면 너무 비현실적이잖아?”
“닥쳐.”
투닥거리던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윤치형 교수의 교수실이었다.
선빈은 학회장으로서 면담(?)을 위해 불려가는 것이었고, 우진은 산학협력 때문에 논의할 게 있어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교수실에 도착한 두 사람은, 그곳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을 만나게 되었다.
‘그’를 발견한 선빈의 두 눈은 휘둥그레졌으며.
“엇……?”
우진은 반가운 표정으로 인사하였다.
“엇, 브루노! 학교에는 어쩐 일이세요.”
“하하, 우진. 저희 스튜디오 또한 K대의 협력사 아닙니까.”
“아하.”
“윤 교수님과 이야기 나눌 부분이 있어 오늘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우진이 브루노와 인사하는 동안, 선빈은 벙 찐 표정으로 쭈뼛거리고 있었다.
발음은 별로일지언정 우진이 아주 자연스럽게 브루노와 영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그보다 ‘브루노’라는 거물급 건축가이자 우상을 이렇게 직접 만난 것은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눈 사이, 우진을 뒤늦게 발견한 윤치형도 다가왔다.
“요놈아, 브루노 와 계시다고, 이 교수님은 보이지도 않는 거냐?”
“하하, 그럴 리가요.”
“방학 동안 별일 없었지? 아. 아니, 별일 많았겠군.”
“하, 하하…….”
“일단 선빈이는 잠깐 저쪽에서 기다리고, 우진이는 이쪽으로 와 봐.”
“네, 교수님.”
오늘 브루노가 K대에 온 이유는, 산학협력 관련해서 윤치형 교수와 이야기를 나눌 겸, 조운찬 교수와의 약속도 있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리고 브루노가 윤치형 교수의 교수실에 도착한 것도, 우진이 들어서기 직전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서론부터 천천히 시작되었다.
“브루노 덕에, 올해 저희 학과의 위상도 정말 높아졌습니다.”
“별말씀을요, 교수님.”
“빈말이 아닙니다. 브루노의 스튜디오와 산학협력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저희 과에 지원하는 학생들도 더러 있더군요.”
“하하, 저보다는 서 대표님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여기 잘난 제자 놈도 한몫하기는 했지만……. 여튼 정말 감사드립니다. 솔직히 저는, 브루노께서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이 사업을 도와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던 우진은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겼다.
사실 브루노의 스튜디오가 WJ 스튜디오와 마찬가지로 산학협력을 활발히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렇게 K대까지 직접 와서 윤치형 교수를 만날 일은 딱히 없다고 생각되었으니 말이다.
‘스튜디오에 담당자가 따로 배정되어 있을 텐데……. 두 분께서 굳이 만나시는 이유가 뭐지?’
우진이 직접 온 이유는 그가 K대의 학생이라서기도 했지만, 사실상 WJ 스튜디오의 산학협력은 올해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기 때문이었다.
작년 1년 동안 WJ 스튜디오의 산학협력 학생은, 우진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반면에 브루노는 작년에도 제이든과 소연을 산학협력으로 채용했었고, 그랬기에 서류 몇 장이면 12년도 산학협력 계획도 충분히 진행 가능했을 터였다.
‘그냥 조운찬 교수님 만나실 겸, 찾아오신 건가?’
탁자 위에 놓여있던 커피를 홀짝이며, 브루노와 윤치형 교수의 대화를 흥미롭게 듣는 우진.
그런데 잠시 후, 우진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스페인 본사와의 협약까지 이렇게 빨리 진행될 줄은 몰랐습니다, 브루노.”
“하하. 그것은 제 역량이라기보다, 아마 여기 서 대표의 역할이 더 컸을 겁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표는 브루노신데…….”
두 사람의 대화 내용 안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를 듣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번에 서 대표가 EAC에서 크게 활약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요.”
“그게 스페인 건축가협회 쪽에도 알려졌고, 덕분에 각 대학에서도 한국의 건축대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모양입니다.”
“오……!”
그것은 바로 우진이 일 년 전쯤 뿌려 둔 씨앗.
K대의 국제적인 산학협력이, 본격적으로 체결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었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