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205화 (205/315)

205화

시간이 곧 돈이다

사실 우진이 회귀하기 전인 2030년 즈음에는, 조합장을 외부에서 영입한다는 개념 자체가 이미 적립된 상황이었다.

2010년대 후반의 급격한 부동산 상승장을 겪은 뒤, 몇몇 사업장에서는 청담 선영 조합의 곽홍식 조합장과 같은 능력 있는 조합장들이 탄생하였고.

입지와 사업성이 훌륭한데도 불구하고 조합역량 부족으로 개발이 지지부진한 돈 많은 조합에서, 아예 고액의 연봉을 제시하며 그런 조합장들을 영입했던 사례가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이번에 우진이 생각한 것처럼, 조합장이 해당 구역의 지분을 매수하거나 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고 말 그대로 ‘용병’으로 영입한 케이스도 많았다.

많게는 10억 단위가 넘는 연봉을 약속하면서까지도, 실력 있는 조합장을 고용하여 사업을 추진하던 사례가 있는 것이다.

땅값이 조 단위에 가까운 강남 핵심입지의 경우, 조합 능력이 조금만 향상돼도 수백억 이상의 돈을 아낄 수 있으니.

어쩌면 너무 당연한 수순이라고 할 수 있었다.

‘특히나 조합역량 부족으로 사업이 지지부진한 성수 1지구라면…….’

그래서 우진은 십 년 뒤에나 강남권에 보편화 될 개념인 조합장의 영입을, 이번 성수 전략정비구역에 추진할 생각이었다.

구윤권 시장의 행동력으로 봐서 늦어도 3월 전에는 강변북로 지하화 사업과 연계된 성수 전략정비구역의 통합 개발계획이 공시될 것 같았으니.

그 전에 최대한 빠르게 세팅을 다 해놔야만 했다.

‘버스 출발하기 전에, 태울 사람 다 태워야지. 그중에서도 일단 운전수부터…….’

그래서 우진은 박경완을 재촉하였고, 덕분에 며칠 내로 곽홍식 조합장과 대면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랜만에 청담 써밋의 공사현장을 한 번 둘러본다는 명분으로, 경완과 홍식을 한자리에서 만난 것이다.

“조합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허허, 이게 누구십니까. 서 대표님 아니십니까.”

“조합에는 별일 없으셨지요?”

“물론입니다. 이제 장애물은 다 거뒀고 앞으로 달릴 일만 남았으니, 지난 몇 년의 고생을 전부 다 보상받는 느낌입니다. 하하.”

오랜만에 도착한 <청담 클리오 써밋>의 공사현장은, 무척이나 분주하였다.

이미 철거는 전부 끝난 상태에 기초공사를 진행 중이었는데, 이렇게 터를 닦아놓은 것만 봐도 우진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 지어지면 진짜 멋지겠어.’

워낙 입지 자체가 좋기도 하고, 우진이 직접 설계한 첫 아파트 단지였으니.

펜스 쳐 놓은 모양새만 봐도 완공됐을 때의 그림이 절로 그려진 것이다.

“자, 그럼 두 분. 이것부터 머리에 쓰시고……. 이쪽으로 오시지요.”

박경완이 건네는 안전모를 받아 쓴 홍식과 우진은, 그의 안내를 따라 현장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비록 뼈대도 제대로 올리지 않은 기초공사 단계였지만, 동간거리나 대지의 단차 등.

수치로만 계산해서 설계했던 부분이 실질적으로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지, 한번 쭉 살피는 우진이었다.

“조합장님 우리 준공목표를 언제로 잡았었죠?”

“공기를 2년 정도로 잡았으니까……. 이제 1년 10개월 정도 남았군요.”

“그럼 내년 연말에는 입주가 가능하겠네요.”

“하하, 서 대표님도 써밋으로 입주하십니까?”

“글쎄요. 그건 그때, 가 봐야 알 것 같습니다.”

우진은 써밋에 가지고 있던 대부분의 지분을 매도했지만, 아직 어머니 명의로 매수했던 30평대 한 채는 가지고 있었다.

워낙 강남에서도 최상급의 입지를 가진 청담 클리오 써밋이다 보니, 지분을 하나 정도는 남겨놓고 싶었던 것이다.

곽홍식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우진에게 입주 여부를 물어본 것이었다.

“오랜만에 와서 그런지, 단지가 엄청 넓어 보이는군요.”

“하하. 이제 마지막 한 동만 돌면 끝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어쨌든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현장 점검을 마친 세 사람은, 조금 이른 저녁을 먹기 위해 경완의 차를 타고 압구정으로 나왔다.

현장 점검도 분명히 의미 있는 일이었지만, 어쨌든 오늘의 본론은 지금부터였다.

조용하고 고급진 중식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고 앉은 세 사람은, 클리오 써밋과 관련된 이런저런 이슈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에피타이저를 한 입씩 집어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렇게 한 십 분 정도가 지났을 때.

타이밍을 잡은 우진이, 슬쩍 운을 떼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조합장님.”

“예, 대표님.”

“조합장님께서는 청담 선영 사업장 말고, 다른 데 투자하신 곳은 없습니까?”

우진의 이 한 마디로 대화의 흐름이 살짝 바뀌자, 홍식 또한 눈에 이채를 띠었다.

“재개발 재건축 말씀이시지요?”

“뭐, 꼭 그런 것이 아니라, 부동산이라면 뭐든 말입니다.”

쪼르륵-

우진이 이야기하는 사이 종업원 한 명이 찻잔에 찻물을 따르기 시작했고.

세 개의 찻잔이 전부 가득 차자, 홍식이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한남뉴타운에 오래전에 사둔 다가구 한 채가 있긴 합니다.”

“아, 한뉴 좋죠. 다가구면 지분도 크시겠네요.”

“10년 안에만 됐으면 좋겠는데…….”

우진은 한남뉴타운의 미래를 안다.

풍수지리학적으로 배산임수의 정석과도 같은 위치임과 동시에 남향으로 한강 뷰를 뽑아낼 수 있는, 서울 전역을 놓고 봐도 최고의 입지인 한남 뉴타운.

재개발 투자자들 사리에서 ‘왕의 자리’ 라고도 불리는 한남뉴타운은, 사실 2020년이 돼도 제대로 삽조차 뜨지 못한다.

남산에서부터 한강까지 이어 떨어지는 스카이라인과 관련된 법 조항 때문에 제약도 많았지만, 워낙 입지가 좋다 보니 조합원들 사이에서도 이해관계가 무척이나 복잡한 탓.

한뉴가 제대로 빛을 보려면 2025년은 지나야 하지만, 굳이 그런 이야기를 해 줄 필요는 없었다.

개발이 되지 않는 와중에도 기대감과 입지만으로 계속해서 땅값은 오를 곳이 한남뉴타운이었으니까.

“좋은 곳 가지고 계시네요.”

“하하. 한남이 좋긴 하죠.”

잠시 한남뉴타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곽홍식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그런데 제 투자물건은 왜 물어보신 겁니까?”

그 물음에 우진은 속으로 웃었지만…….

‘낚였다.’

별것 아니라는 듯 담담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아, 혹시 조합장님께서, 성수 쪽에 재개발 물건 가지셨나 해서요.”

“성수라면, 전략정비구역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무래도 그쪽 얘기죠. 전략정비구역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이 공업지니까요, 성수는.”

우진의 목소리는 덤덤했지만, 말이 이어질수록 홍식은 애간장이 타기 시작했다.

‘요놈. 지금 분명히 뭐가 있는데.’

부동산에 대한 우진의 지식과 정보력. 그리고 그의 투자능력에 대해 이미 경험해 본 홍식은, 성수동 쪽에 뭔가 묵직한 건수를 하나 우진이 들고 있을 것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한 것이다.

하지만 우진은 슬슬 겉도는 이야기만 할 뿐 핵심을 쉽게 꺼내 들지 않았고, 그것이 홍식의 애간장을 타게 만들었다.

우진은 그런 홍식의 속내를 이미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고 말이다.

‘흐흐, 이 아재, 그사이에 아직 추가매수를 한 게 없으면……. 현금은 빵빵하게 들고 있겠네.’

홍식은 비대위를 걸러내는 과정에서, 우진만큼은 아니지만 막대한 차익을 실현하였다.

보아하니 그 돈을 그대로 쥐고 있는 것 같았고, 이러면 구워삶기는 더 쉬워진다.

투자를 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예금통장에서 놀고 있는 돈이 얼마나 불편(?)한지, 누구보다 잘 아는 우진이었다.

우진은 홍식의 앞에, 먹음직스런 떡밥을 조금씩 올려놓기 시작했다.

“사실 성수 전략정비도, 한남 못지않게 좋은 입지거든요.”

우진의 말에 홍식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죠. 강만 건너면 바로 압구정, 청담인 데다……. 서울에서 가장 넓은 녹지(綠地)중 한 곳이 바로 옆에 붙어있으니까요.”

“맞습니다. 강남권역 수요를 흡수할 수도 있고, 장기적으로는 산업개발진흥지구에 일자리가 지속적으로 생기겠죠.”

이번에는 우진의 눈치를 슬쩍 살핀 홍식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대표님도 아시다시피, 그런 장밋빛 미래가 예정되어있는 곳은 서울에 성수뿐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그리고 누구나 다 아는 호재는 더 이상 호재가 아니지요.”

누구나 다 아는 호재는 더 이상 호재가 아니다.

이것은 우진도 지극히 공감하는 이야기였다.

어디에 뭐 새로 역이 뚫린다는 계획이 발표됐다고 해서, 그 주변의 부동산 가격이 쭉쭉 상승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게 전부 현재 가격에 이미 반영됐다는 소리니까.’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개발계획에 기약이 없다는 점.

보통 정부에서 언제까지 개발하겠다고 공약을 하더라도, 그것이 수년에서 십 년 이상 늦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였으니.

그 말만 믿고 투자했다가는 돈이 묶이기 십상인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성수동이 좋아지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꽤 걸릴 것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었고.

그래서 성수동은 아직 저평가였다.

그리고 곽홍식의 이 이야기는 거의 맞는 말이었다.

단, 우진이라는 변수가 없을 때의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그렇죠. 사실 부동산이 움직이려면, 눈에 보이는 변화가 필요한 게 사실이니까요.”

여기까지 이야기가 나오자 결국 참지 못한 홍식은, 우진에게 직접적으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갑자기 성수동 얘기를 꺼내셨다는 건……. 이쪽이 금방이라도 꿈틀거릴 만한 확실한 근거가 있다는 이야긴 것 같은데…….”

우진도 이제는 참지 못하고 입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확실히 곽홍식 조합장은 우진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눈치가 빠르고 명석한 사람이었고.

덕분에 우진은 더 쉽게 그를 낚아 올릴 수 있게 되었으니까.

“역시 척하면 척이시군요.”

우진의 긍정에, 홍식이 반색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으며.

“허허. 역시 뭔가 있었던 겁니까?”

그런 그를 향해, 우진이 은근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물론입니다.”

그리고 우진의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홍식의 엉덩이는 점점 더 격하게 들썩이기 시작하였다.

* * *

우진은 홍식에게 모든 정보를 다 풀지 않았다.

이것은 서울시의 정책까지도 관련있는 문제였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무척이나 민감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성수 전략정비구역은 이미 우진과 구윤권 시장의 만남 이전에도 지구단위계획으로 지정되어 있었고.

때문에 우진이 여기에 지인들과 함께 투자하는 것은 당연히 범법행위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법적인 부분과 별개로 잘못 소문이 퍼져나가면 투자자들이 몰려들 수가 있었고.

그러다가 1지구에 지분확보를 충분히 하지 못하면, 계획에 차질이 생겨버리고 만다.

우진의 가장 큰 목표는 차익을 보는 것보다도 1지구의 사업 속도를 최대한 끌어올리는 것이었는데.

미리 소문이 퍼져서 우진의 지분이 작아지면, 사공이 많아 배가 산으로 가는 걸 지켜봐야 할지도 몰랐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진은, 일단 홍식을 운전대에 앉힌 뒤에 나머지 이야기를 풀 생각이었다.

“조만간 성수 전략정비구역의 통합 재정비안이 나올 겁니다.”

“통합 재정비안이라시면…….”

“세 개의 지구의 설계를 전부 일원화하여 시에서 원하는 방향으로 개발공시가 올라올 거고, 그 조건을 받아들일 시 지구 전체의 용적률을 대폭 완화시켜주는 안건이지요.”

“그, 그게 정말입니까?”

강변북로 지하화 계획을 비롯하여 더 먹음직스런 떡밥들이 많이 남아있지만, 홍식을 설득하는 데에는 용적률 완화라는 카드만으로도 충분하였다.

용적률 완화는 개발 호재와 달리 법이 발효되는 순간 곧바로 땅의 가치 자체가 높아지는 것이었으니.

불확실성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호재였던 것이다.

“대체 그 통합 재정비안이라는 게 뭐길래, 그 깐깐한 서울시에서 용적률을 완화해준다는 겁니까?”

우진이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부분은 확정된 사안이 아니라서, 아직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홍식이 말했다.

“뭔가 있긴 있군요.”

“그렇습니다. 거의 9할 이상의 확률로 진행될 뭔가가 하나 있지요.”

이제 우진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에서, 얼추 머릿속에 그림은 전부 그려 낸 홍식.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 한 가지 의문점이 남아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우진이 자신의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였다.

분명히 뭔가 원하는 게 있어서 이런 정보를 흘리는 것 같았는데, 그게 뭔지 아직 감이 오질 않은 것이다.

“그러면 서 대표님.”

“예, 조합장님.”

“제게 이런 고급 정보를 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설마 정보공유 차원에서 알려주시는 건 아닐 테고…….”

이미 몸이 바짝 달아오른 홍식을 향해, 우진이 툭 하고 본론을 던졌다.

“왜긴 왜겠습니까. 이번에도 한번 파트너쉽을 발휘해보자는 거지요.”

“음……?”

“전략정비구역 상황을 얼마나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가 지금 2, 3지구만 사업 속도가 빠른 상황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거기는 작년부터 1지구가 문제였지요.”

이제는 우진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어느 정도 감을 잡은 홍식.

그런 그를 향해, 우진이 쐐기를 던졌다.

“혹시, 이번에 조합장 한 번 더 해보실 생각 없으십니까?”

“……!”

“통합 재정비 안이 나오는 시점에 1지구의 리스크만 해소되면……. 어떤 결과가 만들어질지는 조합장님도 머릿속에 그려지시지 않습니까?”

홍식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사실 청담 선영의 조합을 운영하며 비대위에게 너무 크게 데인 탓에, 다시는 조합장 같은 것은 하지 않아야겠다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조합장 몇 번만 더 했다가는, 최소 두 세배 이상 빨리 늙어버릴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런 다짐이 전부 무색했는지, 우진의 목소리가 너무도 달콤하게 들려왔다.

“청담 때는 거의 혼자셨지만, 이번에는 제가 있고 여기 박 상무님이 있습니다.”

멍하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박경완이, 화들짝 놀라며 반발했다.

“나? 난 왜!”

하지만 그런 그의 목소리에 아랑곳 않은 채 우진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조합장님 그 추진력 발휘하셔서 조합만 잘 이끌어 주시면, 제가 길은 고속도로처럼 닦아드리도록 하지요. 앞길에 조약돌 하나 남기지 않고 싹 다 깔끔하게 밀어드리겠습니다.”

곽홍식은 대답조차 잊은 채 마른침을 다시 삼켰고.

우진은 그 위에 쐐기를 박았다.

“조합설립부터 관리처분까지, 딱 1년 반.”

“……!”

“내년 연말에 일반분양 목표로, 한번 달려보시죠.”

조합을 이끌어본 홍식은, 우진의 이 계획이 얼마나 미친 소리인지 잘 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기한 것은, 전혀 허황되어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능구렁이 같은 청담 선영의 비대위들을 찜쪄먹는 우진의 실력이라면, 일 년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후우우.”

곽홍식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고.

그것을 본 우진은 확신하였다.

아직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이미 홍식의 마음은 정해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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