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시간이 곧 돈이다
청담 선영아파트의 조합장 곽홍식.
이 사람에 대한 우진의 첫인상은, 사실 그리 특별하지 않았었다.
곽홍식과의 첫 만남은 사업장에 ‘클린수주’라는 슬로건을 걸기 위한 사전 만남이었고.
그때 우진의 눈에 비쳤던 곽홍식의 이미지는, 다른 재개발 재건축 구역의 여느 조합장들과 다를 바 없이 평범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선영아파트의 악질 비대위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우진은 그와 긴밀하게 협업하게 되었고.
그때 곽홍식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나이가 예순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명석한 상황판단.
조합원들을 확실하게 휘어잡을 수 있는 추진력과 카리스마.
게다가 사업 진행이 빠르게 이어지기 위해 꼭 필요한, 결단력과 업무능력까지.
만약 당시에 곽홍식이 깔끔하게 일 처리를 해 주지 않았더라면, 우진은 아직까지 선영아파트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비대위의 비리를 드러내어 소송에서 승리하는 과정이 깔끔하지 못했더라면, 아직까지도 항소가 이어지며 지지부진 개발이 미뤄지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곽홍식은 우진의 계획대로 정확히 움직여 주었고, 어떤 면에서는 기대보다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덕분에 지금 청담 클리오 써밋이 공사를 시작할 수 있었고, 12년 초에 일반분양까지 잡힐 수 있었던 것이고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홍식의 능력을, 우진은 항상 탐내고 있었다.
곽홍식같은 조합장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해당 사업장의 개발속도가 몇 년 단위로 빨라질 수 있으니까.
재개발‧재건축 사업장에서, 그 개발시간은 천문학적인 수준의 돈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아저씨를 용병으로 쓴다는 게, 대체 무슨 말이야?”
“당연히 성수 전략정비구역에, 조합장으로 영입한다는 말입니다.”
“뭐?”
“청담 클리오 써밋이라는 최고의 포트폴리오를 가진 사람 아닙니까?”
“그, 그렇기는 한데……. 그게 말이 되는 개념인가?”
“상무님께서 자리만 한 번 만들어주시면, 조합장님 구워삶는 건 제가 할 테니 걱정 마시죠.”
성수 전략정비구역은 그 안에서도 총 세 개의 구역으로 나뉜다.
우진은 그 세 개 구역 중 하나의 조합장으로 곽홍식을 영입하려고 하는 것.
물론 성수 전략정비구역에 지분이 없다면 당연히 조합장이 될 수 없다.
일단 조합원이 되어야 그 조합 안에서 조합장이 될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곽홍식을 조합장으로 영입하기 위해서는, 먼저 홍식에게 해당 구역의 지분을 매수하라고 설득해야 한다.
전략정비구역 내의 세 개 구역들 중, 아직 조합설립이 되지 않은 초기 단계의 구역에 홍식이 지분을 매수하도록 만든 뒤.
조합설립 과정에서 그가 자연스레 조합장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우진의 머릿속에는 이미 구체적인 계획이 전부 다 서 있었다.
‘성수 전략정비구역은, 아마 지금 1지구가 제일 속도가 느릴 거야. 1지구는 아직 조합설립 동의율도 낮을거고……. 반면에 2, 3지구는 사업 시행 인가까지 받았을 테니까.’
우진의 전생에서 성수동 전략정비구역은, 2020년이 넘도록 삽조차 뜨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2012년이 된 지금부터 10년이 더 지나는, 그때까지도 개발이 완성되지 못한다는 거다.
그리고 그렇게 개발이 느려진 가장 큰 이유가 바로 1지구 때문이었다.
부패한 조합장과 의지 없는 조합 임원들로 인해 1지구의 사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상황에서, 서울시는 1, 2, 3지구를 하나의 설계안 안에서 동시에 개발하길 원했으니.
2, 3지구의 조합원들은 1지구를 기다리다가 10년에 가까운 세월을 날리게 됐던 것이다.
전략정비구역을 하나로 묶어 개발하는 것은 <한강 르네상스 사업>의 일환이었는데.
이 때문에 비현실적인 사업계획이었다고, 서울시가 조합원들로부터 욕을 많이 먹기도 했었다.
‘하지만 1지구의 조합장이 곽홍식 아저씨로 바뀐다면, 그런 역사가 반복될 일은 없겠지.’
성수 전략정비구역의 세 개 구역들 중, 사실 가장 위치가 좋은 곳도 1구역이다.
전략정비구역 안에서 서울숲과 가장 인접해 있으며, 대중교통 접근성도 가장 좋은 위치였으니까.
그래서 우진은 곽홍식을 꼬셔서 이 1구역에 함께 발을 담글 생각이었다.
그리고 몇몇 돈 많은(?) 지인들까지도 합세해서, 함께 1지구 내의 지분을 매수해 볼 계획이었다.
우진의 계획대로 된다면 이곳에 매수한 지인들은 어차피 어마어마한 차익을 보게 될 것이며.
1지구 내에 우진과 관련된 지분이 많아질수록 개발속도는 더욱 빨라질 테니.
이것이야말로 모두에게 행복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길이었다.
‘딱 반년. 반년 내로 1지구에 조합 설립해서 교통정리 끝내고, 내년 하반기에는 서울시에서 제안하는 강변북로 지하화가 포함된 변경설계로 곧바로 통합 사업 시행 인가까지 따내야겠어.’
사실 이것은, 재개발‧재건축을 조금이라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불가능하다며 단번에 고개를 내저을 만한 목표이자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진은 이 계획을 성공시킬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곽홍식을 1지구의 조합장으로 영입하는 데 성공한다는 전제만 깔린다면 말이다.
‘여기에 박 상무님이 실세로 있는 천웅건설까지 시공사로 들어선다면…….’
머릿속에 어느 정도 그림이 그려진 우진이 기분 좋게 웃었다.
시공사와 설계자. 그리고 시행자인 재개발 조합까지.
이 세 요소가 삼위일체가 되어 움직인다면, 이 말도 안 되는 계획을 분명히 성공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 * *
새해가 밝은 뒤.
유리아는 꽤 한가해졌다.
한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시기가 지나가고, 오랜만에 꽤 길게 휴식을 시작한 것이다.
사실 아직까지도 여기저기서 콜은 많이 오는 상황이었지만, 어지간한 제안은 전부 다 거절했다.
조만간 <우리 집에 왜 왔니> 시즌 1이 끝나면, 완전한 백조(?)가 되어 일 년 정도는 쉬고 싶었던 것이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것이 당연하다지만, 이렇게 끝없이 노만 젓다가는 노가 부러져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좀 쉴 때도 있어야지.’
아쉬운 것은 유리아가 시간이 있다고 해도, 그녀의 지인들이 죄다 시간이 없다는 점이었다.
유리아의 지인들은 거의 연예인들이었는데, 그들 대부분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으니까.
하지만 다행히 오늘은 놀아줄(?) 사람을 구하는 데 성공했고.
그래서 대낮부터 가로수길에 나와 있었다.
정확히는 가로수길에 있는 자신의 건물.
카페 프레스코의 루프탑에 말이다.
오늘 유리아가 만난 두 사람은, 바로 같은 소속사 배우인 서윤진과 민우였다.
서윤진은 바쁜 와중에 오랜만에 시간을 낸 것이었고, 민우는 촬영에 본격적으로 들어가는 내년 3월까지 유리아와 비슷한 신세였다.
세 사람은 대낮부터 만나서 신나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으으, 부럽다 유리아. 난 언제쯤 너처럼 푹 쉬어볼까.”
윤진의 말에, 리아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이번 드라마 끝나고 쉬시던가.”
“안 돼. 다음 작품까지 이미 정해져 있어.”
“그거 끝나고 나서 쉬어 그럼.”
“흑……. 그 전에 매니저 오빠가 대본 수십 개 들고 와서 얼굴에 들이밀겠지.”
“웃기시네. 왜 매니저 오빠 탓을 하고 그러실까. 네 일 욕심이 문젠 것 같은데.”
“맞아. 사실 내 욕심이 문제야. 난 틀렸어…….”
“히히히.”
쉬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좋은 작품이 들어오면 결코 거절하지 못하는 윤진의 마음을, 유리아는 아주 잘 이해한다.
리아는 배우가 아닌 가수였지만, 그것과 별개로 일 욕심은 윤진 못지않았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이번에 휴식기를 갖기까지도, 꽤 오랜 시간 갈등을 했던 유리아였다.
‘어쩌면 나도 카페 프레스코가 잘 되고 투자성과가 좋아지니까 여유가 생겼는지도 모르지.’
유리아는 음료수를 쪽쪽 빨며, 루프탑 난간 바깥으로 펼쳐진 가로수길의 전경을 감상하였다.
이 건물을 매수한 것이 아주 훌륭한 선택이었다면, 여기에 카페 프레스코를 입점한 것은 신의 한 수였던 것 같았다.
카페 프레스코의 매출도 매출이지만, 그 덕에 상승한 건물 가치가 1년 만에 10억도 훨씬 넘었다.
리아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가만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민우가 한숨을 푹 쉬며 입을 열었다.
“누나들, 불쌍한 동생 앞에 두고 너무 배부른 소리 하는 것 아니에요?”
민우의 볼멘소리에, 리아가 곧바로 반문하였다.
“뭐가?”
“저는 일하고 싶은데 일이 없어서 강제 백수잖아요.”
이번에는 윤진이 물었다.
“3월부턴 촬영 들어가잖아?”
“흐……. 그것도 걱정이예요. 지난번처럼 빠그라지는 건 아닌지…….”
쓴웃음을 짓는 민우를 보며, 리아와 윤진은 살짝 안타까운 표정이 되었다.
같은 소속사 배우들 중에서도 실력 있는 동생인 민우였건만.
잘 나가던 아역 때와 달리 성인이 된 뒤로는 계속해서 작품 운이 없었던 탓이다.
뭔가 잘 풀린다 싶으면 불쑥 태클이 들어오면서, 벌써 6년째 공백기가 지속되고 있었으니까.
물론 그 6년 중에 4년 정도는 개인 사정 때문이지만, 최근 들어 민우가 침울한 것은 충분히 이해되는 두 사람이었다.
“이번에 민우 네가 캐스팅된 드라마가 <천년의 그대>라고 했었나?”
윤진의 물음에, 민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거 맞아요, 누나. 사실 대본이 좀 유치해 보여서 고민 많이 했었는데…….”
“그런데?”
“배역이 너무 좋고, 리아 누나가 워낙 추천을 해서 하기로 했어요.”
민우의 대답에, 윤진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리아가 추천했다고?”
“네. 리아 누나가요.”
민우의 대답이 이어지자, 윤진의 시선이 자연스레 리아에게로 향했다.
윤진이 의아해하는 것은 당연했다.
리아도 배우로서의 커리어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다른 배우에게 작품을 추천하는 것은 처음 봤으니 말이다.
윤진의 시선에 담긴 의미를 알고 있는 리아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입을 떼었다.
“그 작품. 무조건 잘 될 거라니까?”
“응……? 무조건?”
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그렇다니까. 내가 아는 지인 중에 돈 귀신이 붙은 사람이 한 명 있는데, 걔가 이번에 거기에 붙었더라고.”
“<천년의 그대> 말하는 거야?”
“응. 그러니까 안심해도 돼. 아마 대박 날 거야.”
쪽- 쪽-
이해하기 힘든 말을 대수롭지 않게 한 뒤, 태연한 표정으로 음료수를 쪽쪽 흡입하는 유리아.
그런 그녀를 본 윤진은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고, 맞은편에 앉아있던 민우가 어깨를 으쓱 하며 입을 열었다.
“이 누나가 이런다니까요?”
“돈 귀신은 또 뭐야? 못 본 사이에 이상한 토속신앙이라도 믿기로 했어?”
“그런가 봐요.”
“…….”
리아와 민우를 한 차례씩 응시한 윤진이, 다시 민우에게 물었다.
“리아는 그렇다 치고 어쨌든 민우 너도 그 말 듣고 선택한 거 아냐?”
민우가 멋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음……. 그건 그렇긴 해요.”
윤진이 어이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반문했고.
“너도 신도야?”
민우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대답했다.
“아직 신도는 아닌데……. 만약 이번 작품 터지면 저도 신도가 될지도 모르죠.”
“뭐……?”
“사실 리아 누나가 ‘돈 귀신’이 붙었다고 한 사람이, 저도 아는 분이거든요.”
“그게 누군데?”
이번에는 리아가 말했다.
“너도 알걸?”
“응?”
“작년 크리스마스 파티 때, 너도 인사했잖아.”
“아……?”
이제야 윤진은 그 사람이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연예인들 사이에서도 꽤 유명한 인물이자, 언제부턴가 리아를 만날 때면 꼭 한 번씩은 이름이 언급되는 사람.
최근에는 건축디자이너로서 꽤 크게 이슈화되기도 했던 한 사람의 얼굴이, 곧바로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다.
그런 그녀를 향해 리아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진이가 거기 투자했어.”
“뭐?”
“그냥 투자한 정도가 아니라, 세트장 디자인까지 직접 한다더라고.”
“……!”
리아의 말에, 윤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우진 덕에 리아와 수하가 얼마나 큰 돈을 벌었는지 알고 있었기에, 급격히 혹해진 것이다.
물론 부동산 투자를 잘한다고 해서 드라마 투자에 성공할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아주 비이성적인 논리의 흐름이었지만.
워낙 우진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것이 많다 보니, 이성과는 별개로 혹하는 마음이 생긴 것.
“으음……. 이거 갑자기 왜 후회가 되지……?”
윤진의 중얼거림을 들은 리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가?”
“사실 나도 <천년의 그대> 여주인공 배역 제안 받았었거든.”
“아하.”
“다른 작품 있어서 거절했는데……. 그때 받았어야 했나…….”
윤진의 말에 리아는 피식 웃었다.
반쯤 농담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저 심정이 이해되었으니 말이다.
‘우진이 투자했다는 말 듣고, 나도 강소정 대표님 찾아가 볼까 진지하게 고민했었으니까.’
사실 리아도 지난 1년 사이 통장에 제법 쌓인 돈으로, <천년의 그대> 드라마에 투자해볼까 진지하게 고민했었던 것.
그리고 통장에서 놀고 있는 돈이 떠오르자, 문득 우진이 생각나는 리아였다.
‘요즘 시간도 많은데……. 한번 우진이 사무실이나 놀러 가 볼까? 겸사겸사 투자처도 슬쩍 한 번 물어보고…….’
한가한 백조(?)가 된 리아는, 그렇게 즉흥적으로 성수동 방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