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새로운 조력자
우진은 일전에, 천웅건설의 대표를 먼발치서 본 일이 있었다.
전생에서 한 번.
그리고 반년 전쯤, 마포 클리오 현장에서 한번.
그렇게 고작 두 번 봤음에도 불구하고, 천웅건설 대표 천종걸의 외모는 아직도 뇌리에 선명했다.
물론 그 이유에는 작은 거인처럼 느껴지는 천종걸의 존재감과 천웅건설 대표라는 그의 특별한 직위도 포함되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강렬한 헤어스타일.
마치 하얀 눈을 연상시킬 정도로 새하얀 백발이 자로 잰 듯 잘 정돈되어 있는 헤어스타일은, 결코 쉽게 잊을 수 없는 외모였으니까.
천종걸에게서 느껴지는 묵직한 존재감과 잘 어울리기도 했고 말이다.
‘마치 전장을 지휘하는 백전노장 같은 느낌이었지.’
그때 우진은 이렇게 생각했었다.
천종걸이라는 이름을 가진 저 사람처럼, 한눈에 뇌리에 틀어박히는 인상의 소유자는 또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우진은 오늘, 그 생각을 조금 바꿔야 했다.
이번 생은 물론, 전생에서도 결코 본 적 없는 또 다른 백발의 장년(長年).
이 사람 또한, 천종걸 못지않은 개성을 가진 사람이었으니까.
“아, 어르신. 어린 친구 앞에서까지 너무하십니다.”
“너도 애잖아, 시댕아.”
천종걸과 마찬가지로 새하얀 백발이지만, 그와는 완전히 반대로 전혀 정돈되지 않은.
마치 사나운 사자의 갈기 같은 느낌을 가진 헤어스타일.
“저 내년이면 이제 별도 달고 하는데, 이제 애 취급은 그만해 주실 때 되지 않았습니까?”
“별? 웬 별? 니가 무슨 장군이라도 되냐?”
“모르셨습니까? 저 이제 상무 답니다.”
그에 더해 깊게 패인 눈두덩이와 송충이 같은 하얀 눈썹. 두드러진 광대와 주름진 콧날까지.
“광혁아.”
“예, 형님.”
“이 시댕이가, 상무라고?”
“그렇게 됐습니다. 허허.”
‘황종호’라는 이름을 가진 이 장년의 인상은,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천종걸보다도 더 강렬했던 것이다.
“흐흐, 저 좀 많이 컸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싫어 시댕아.”
“네……. 알겠습니다.”
‘시댕아’라는 아주 구수하면서도 찰진 욕을 하는 남자를 응시하던 우진은, 저도 모르게 흘러나오려던 헛웃음을 가까스로 집어삼켰다.
‘박 부장님이 저렇게 쩔쩔매는 사람은, 정말 처음 보는 것 같네.’
경완이 쭈그려 있는 모습은 웃음이 새어 나올 정도로 신선하고 재밌었지만, 지금 이 자리 자체가 그리 가벼운 자리는 아니었으니까.
경완을 윽박지르는 장년의 정체 또한,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았고 말이다.
하여 잠시 눈치를 보던 우진은, 잠시 조용해진 틈에 안으로 들어가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WJ 스튜디오 대표, 서우진이라고 합니다.”
우진은 입을 뗀 직후, 황종호와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먼저 손을 내민 것은, 황종호였다.
“반갑습니다. 여기 박경완이한테 얘기는 가끔 들었습니다. 황종호라 합니다.”
경완을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정갈한 말투에 우진은 순간 흠칫 놀랐다.
생각해보면 초면인 우진에게 똑같이 대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얘기였지만, 그래도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든 것이다.
그런 우진의 기색을 느낀 것인지, 황종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 그리 예의 없는 사람 아니오.”
“하, 하핫. 그리 생각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그리고 편히 대하셔도 됩니다.”
황종호와 잠깐 인사를 나눈 우진은, 곧바로 옆에 있던 오광혁과도 통성명을 하였다.
그 또한 천웅건설의 중진으로 결코 존재감 없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황종호의 캐릭터가 너무 쎈 탓에 조금 편하게 느껴졌다.
“천웅건설 전무 오광혁입니다.”
“서우진이라고 합니다.”
“후후, 저야 서 대표를 모를 수가 없지요. 작년 천웅 매출의 일등공신 아니십니까.”
“그렇게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전무님께서 칭찬해주시니, 기분은 좋네요.”
꽤나 강렬했던 첫 만남과 사뭇 다른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우진은 두 사람 앞에 자연스럽게 마주 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
우진은 드디어 황종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음식이 세팅되기 전, 황종호가 오광혁과 함께 잠시 자리를 비웠고.
“잠깐 담배 한 대 태우고 올 테니까……. 고기 제대로 굽고 있어. 알겠냐?”
“여기, 구워주는 곳인데요?”
“토 달지 마, 시댕아.”
“옙.”
그 사이에 우진이 결국 참지 못하고, 황종호의 정체에 대해 경완에게 물어본 것이다.
“부장님.”
“응?”
“그런데 저분, 대체 뭐 하시는 분입니까?”
그리고 그의 정체는, 우진이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대단하였다.
“흐흐, 궁금해 미칠 것 같지?”
“예. 제발 이제 좀 알려주시죠.”
“전 금융위(금융위원회)사무처장이자……. 전임 기재부(기획재정부)차관.”
“네……?”
“지금은 그냥 백수신데, 무튼 대단하신 양반이야.”
“……!”
“정치 생각이 없으셔서 그렇지, 아마 정치권에서도 콜 많이 받으셨을걸?”
“그……렇겠네요.”
황종호의 정체는 바로, 사실상 국내 기관의 경제 관료로서 최고의 자리까지 올랐던 엘리트였던 것이다.
“내가 알기론 기재부나 재경부 장관까지도 충분히 하실 능력 있으셨던 양반인데, 내부적으로 좀 더러운 일을 당하신 모양이더라고.”
“더러운…… 일이요?”
“나도 자세히는 몰라. 그런 얘기 제대로 안 해주시거든.”
“으음…….”
“여튼, 오늘 얼굴도장 한번 잘 찍어봐. 은퇴하셨어도 파워는 현역 못지않은 분이시니까.”
우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냉수를 한 모금 홀짝였다.
‘처음 이미지만 봤을 땐, 회귀 전에 마지막으로 뵀던 김지훈 반장님 느낌이었는데…….’
전생에 목공현장의 스승과도 같은 인물이었던 김지훈을 잠시 떠올린 우진은, 엉뚱한 생각을 털어내기 위해 고개를 휘휘 저었다.
황종호의 이미지가 어찌 됐든, 한 가지 사실은 확실했다.
비록 은퇴한 전직 관료이긴 하지만, 이 정도 파워를 가졌던 인물이라면 우진에게 필요한 도움 정도는 충분히 줄 능력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물론 능력이 있는 것과 그 능력으로 도움을 주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지만.
황종호의 마음만 움직일 수 있다면 확실히 계획대로 태호건설을 일망타진할 수 있을 터.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던 우진은, 순간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그런데 부장님.”
“왜.”
“사실상 부장님 인맥도 맞는 것 같은데……. 왜 한 다리 건너야 되는 인맥이라고 하신 겁니까?”
“황종호 어르신?”
“네.”
경완은 분명 한 다리 건너야 아는 인맥인 것처럼 말했는데, 오늘 눈앞에서 본 바로는 그 또한 황종호의 오랜 지인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진의 그 의문에, 경완은 너무 당연하다는 듯 대꾸하였다.
“야. 넌, 연락처도 없는 사이를 지인이라고 하냐?”
“예……?”
“나 어르신 연락처도 몰라.”
“그런데 어떻게…….”
“그냥 오광혁 전무님이랑 한잔하실 때마다, 꼭 나를 부르시더라고.”
“왜요?”
“내가 고기를 잘 굽는대.”
“…….”
“그게 벌써 십 년은 됐어.”
생각지도 못했던 경완의 대답에, 우진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이어서 잠시 후, 피식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혹시……. 오늘은 고기 굽기 싫어서 오마카세로 예약하신 거 아니죠?”
“젠장, 들켰냐?”
* * *
황종호는 확실히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비범하다는 말의 문자 뜻 그대로, 종잡을 수 없을 만큼 특이한 인물.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우진은, 경완이 했던 이 말의 의미를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도움 될 만한 인맥이, 확실히 있긴 있어.]
이 황종호라는 인물이 왜 지금 우진의 상황에 확실히 도움이 되는지, 그 이유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단순히 관료사회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파워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도 물론 중요한 요소긴 하지만, 정확히는 황종호가 가진 성향이 지금 우진에게 아주 도움 될 만한 부분이었던 것이다.
그 성향이란 바로, 불의에 아주 민감한 대쪽 같은 성품.
한창 고기를 먹으면서 대화하던 중, 청담 선영의 수주전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 반응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하, 진짜 개나리 같은 쉐리들. 속이 다 시원하네.”
“사실 그쪽 조합장이 그래도 어느 정도 합리적인 사람이라 가능했던 일이긴 하죠.”
“클린수주? 그래서 그건 누구 아이디어냐? 경완이, 네 거야?”
“아, 아뇨. 여기 이 친구가 설계한 판이죠. 저도 그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진짜. 하하.”
물론 황종호가 이런 성향을 갖고 있다 해서, 곧바로 우진이 지금 처한 상황을 얘기하고 도움을 청할 수는 없다.
하지만 조금 더 이야기를 꺼내기가 용이해진 것은 사실이라고 할 수 있었다.
‘대화 주제도 은근슬쩍 건축 쪽으로 넘어왔고 말이지.’
거의 종호와 경완 위주로 흘러가던 대화에, 우진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조금씩 생겼다는 얘기다.
사실 청담 선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우진을 대하는 황종호의 태도는 조금 심드렁했었다.
하지만 조합장과의 딜부터 시작해서 우진이 직접 설계한 클린수주라는 판.
거기에 디자인 고급화와 그로 인해 증가한 공사비를 해결하는 영리한 솔루션까지.
이 이야기를 듣고 난 황종호는, 우진에게 조금씩 더 흥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스물둘. 아니, 이제 스물셋이 된 어린 나이에 그런 생각들을 하고 판을 짤 수 있다는 것이, 종호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해서 한두 마디씩 은근슬쩍 대화에 끼던 우진은.
치이이익-
한참 고기가 맛있게 익어갈 즈음, 결정적인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그래. 이 얘기들이 전부 사실이라면……. 확실히 이 젊은 친구, 부동산 전문가라고 할만하네.”
황종호가 운을 떼자, 경완이 재빨리 우진을 띄워주었다.
“그렇다니까요, 어르신. 제가 건설쟁이들 중에서도, 이렇게 부동산에 빠삭한 친구는 처음 봤다니까요?”
경완의 그 호들갑에 피식 웃은 종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서 대표.”
“말씀하세요, 선생님.”
“내 하나, 서 대표의 의견을 물어도 되겠소?”
황종호의 말에, 우진의 두 눈이 반짝였다.
“물론입니다. 어떤 의견이 필요하십니까?”
그리고 이 대화에서 우진은, 황종호에게 제법 큰 점수를 따낼 수 있었다.
“내가 몇 년 전. 그러니까 기재부에 있을 때 이야긴데…….”
대화의 주제는, 황종호가 기재부 차관으로 있던 당시. 한창 부동산 가격이 미친 듯이 상승하던 2007년의 부동산 정책들과 관련된 이야기였는데.
“흠. 결국 그때 그 정책들에 문제가 좀 있었다는 얘기로군.”
“그, 그게. 문제까지는 아니고요.”
“돌려 말할 필요는 없네. 잘못된 건 잘못된 거지.”
어쩌다 보니 우진이 종호의 머리에서 나왔던 부동산 정책들에 대한 비판을 하게 되었고…….
“사실 이건, 결과론적인 얘기 아닙니까. 지금이야 그 정책들이 더 큰 폭등을 불러왔으니 실패라고 얘기할 수 있는 거지만…….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을 수도 있지요.”
그 얘기들이 황종호에게, 꽤나 인상 깊게 다가왔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지.”
“그건, 그렇습니다.”
물론 우진의 의견에 그가 전부 동의한 것은 아니다.
정책이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논리에 의해 굴러가는 내용은 아니었고, 우진이 종호보다 그에 대한 이해도가 더 높을 수는 없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어떤 부분에서 우진은 종호가 캐치하지 못했던 포인트를 확실히 짚어내었고.
그것은 황종호의 마음을 충분히 동하게 할만했다.
“박경완이.”
“예, 어르신.”
“오늘 덕분에, 재밌는 얘기 많이 듣고 간다.”
“별말씀을요.”
해서 모든 대화가 끝나고 음식점을 나설 때.
우진은 한 장의 명함을 건네받을 수 있었다.
[S대 경제학부 명예교수 황종호]
그 명함을 지갑에 곱게 집어넣은 우진은,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