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자승자박
말은 수백 통 이상의 민원을 넣을 것처럼 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우진이 넣은 민원은 총 삼십 통이 조금 안 되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 삼십 통의 민원이 가진 파괴력은 상당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민원에 들어간 정성 때문이었다.
우진에게 알바비(?)를 받아간 경완의 와이프는, 정말 프로패셔널한 민원 전문가였던 것이다.
‘삼십 통 가까운 민원의 내용이 다 다르고, 그중에 성의 없는 내용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우진이 보낸 모든 민원의 목적은 결국, 왕십리 민자사업 설계 공모를 공시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목적이 같다고 해도 내용은 조금씩 다를 수 있다.
공시를 원하는 이유도 제각각 달랐으며, 어떤 민원에서는 간접적으로 그것을 유도하기도 했다.
게다가 한 가지 더.
민원을 넣은 창구도, 한 군데가 아니었다.
구청뿐 아니라 국민신문고, 국토교통부 등.
다양한 기관에 다양한 루트로 민원을 집어넣은 것이다.
최대한 진상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게. 진정성을 담아서.
그래서 어떻게든 기관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도록.
우진은 이런 식으로 민원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전생까지 통틀어 처음 알았다.
사실 이번 작업에서 그가 한 거라곤, 경완으로부터 받은 텍스트들을 여러 명에게 뿌려준 것뿐이었다.
그래서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전화한 경완과 통화하면서, 우진은 감탄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내가 보낸 문자 봤냐?]
“부장님. 스마트폰도 사셨으면서, 이제 문자 말고 어플 쓰면 안 됩니까?”
[말 돌리지 말고 짜샤. 이 박 상무님의 위대함을 봤냐고.]
“봤습니다. 민원 보낸 게 이렇게 빨리 답변 오는 거 처음 봤습니다.”
[그치? 클라스가 다르지?]
“그놈의 클라스는 진짜……. 하지만 인정합니다. 이번엔 진짜 놀랐으니까요.”
[흐흐. 보따리 몇 배로 돌려주기로 한 거, 까먹지 마라.]
“근데 솔직히, 형수님이 다 하신 거 아닙니까?”
[아이디어는 내 거잖아.]
“인정…….”
[음홧홧.]
전화통에 대고, 마치 3류 만화영화에나 나올 법한 악당 같은 웃음소리를 내는 경완.
결국 경완의 이야기는 생색으로 끝났지만, 이런 생색이라면 기꺼운 우진이었다.
‘덕분에 일이 몇 배는 수월해졌으니까.’
하지만 아이디어부터 솔루션까지 경완이 줬다고 해도, 이것을 최대한으로 써먹는 것은 우진의 몫이다.
같은 일을 해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더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법이니까.
그래서 우진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게 더 확실한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경완과 상의할 부분이 하나 있었으니까.
“여튼, 그럼 공문도 내려왔으니까, 이제 조만간 공시 뜨겠네요?”
[아마 일주일 안 걸릴걸?]
“그럼 그때까진, 일단 기다립니까?”
[글쎄. 일단은 기다려봐야 하지 않을까? 왜?]
“한 가지, 괜찮은 생각이 난 게 좀 있어서요.”
[괜찮은…… 생각? 그게 뭔데?]
잠시 뜸을 들인 우진이, 의아한 목소리로 되묻는 경완을 향해 말했다.
“이건 진짜 그냥 제 주관적인 추론인데요.”
[왜 이렇게 뜸을 들여.]
“부장님은 태호건설 놈들이, 시공권 어떻게 땄다고 생각하세요?”
우진의 물음에, 경완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걸 뭘 그렇게 조심스럽게 말하냐. 당연히 로비지.]
“그렇죠?”
[근데 왜?]
“그럼 그 로비에 들어간 돈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그야 당연히 회사에서…….]
“찾아보니까 태호건설, 재무상태 지옥이던데. 패러마운트에 현찰 바를 만큼 돈이 넉넉할까요?”
[흠.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우진의 목소리가 조금 더 낮게 깔리기 시작했다.
* * *
우진은 왕십리 사업장에서 터질 미래의 사고와 비리에 대해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들을 바탕으로, 한 가지 의심을 해볼 수 있었다.
‘이대로 태호건설이 물러설까? 그렇게 순순히?’
경완이 생각해 낸 민원이라는 해결책은, 아주 신통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창의적인 방법이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외통수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기가 막힌 방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외통수에 가까운 묘수에 당했다고 하더라도, 태호건설의 입장에서는 설계권을 쉽게 포기할 수 없다.
설계와 시공의 합이 맞지 않는다면, 해먹을 수 있는 돈은 기하급수적으로 감소하니까.
특히나 브루노같이 해외 유명 디자이너의 설계가 발탁되기라도 한다면, 정말 조금의 여지도 남지 않는다.
정말 FM대로, 깐깐하게 시공감리를 진행할 테니 말이다.
현장에서 구르고 구른 우진은, 이러한 사실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부실공사로 골조가 무너져서 인명사고가 날 정도로 해 먹었던 놈들이야. 그 많은 돈을 포기하고 이대로 물러날까?’
그래서 우진은, 그들의 입장에서 고민을 좀 더 해봤다.
그리고 그 결과.
답은 하나였다.
결국 로비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했던 인간들이 또다시 생각할 수 있는 건, 똑같은 수준의 생각일 뿐인 것이다.
‘태호건설쯤 되는 회사면, 기관에도 분명 커넥션이 있을 거야. 공모 과정이 공시되는 걸 돈으로 막으려 하거나……. 아니면 공시가 되더라도 뻔뻔하게 밀고 나가려 할 수가 있어.’
후자보다는 전자의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다.
버젓이 비리가 보이는 공모결과가 공시되었음에도 그대로 공사를 강행하는 건.
태호건설이야 감수할 수 있겠지만, 패러마운트 입장에서는 피하고 싶을 게 분명했으니 말이다.
패러마운트는 태호건설과 달리 유통 공룡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거대한 기업이었고.
그런 기업에서 가장 많이 신경 쓰는 부분 중 하나가, 바로 기업 이미지였으니까.
돈을 이미 먹은 실무진들 또한, 시공권을 주는 선에서 마무리하려고 할 게 분명했다.
‘모르긴 몰라도, 9할 이상은 확실할 테지.’
하여 이런 추론들 속에서 우진이 경완과 의논하려는 것은, 바로 예상되는 태호건설의 행보를 역으로 이용하는 것이었다.
불붙은 섶을 지고 갈대밭을 건너려는 태호건설의 앞길에, 살포시 기름을 부어주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태호건설에서 분명히 공기관에 로비를 하려 할 거란 말이지?]
“그렇죠.”
[흠, 쉬운 얘긴 아니지만, 아주 불가능한 얘기도 아니네.]
“바보가 아니라면 무턱대고 로비를 시도하지 않겠지만, 커넥션이 있다면 얘기가 다르니까요.”
[그래서, 결론이 뭔데?]
“여기 함정을 파보는 건 어떨까 해서요.”
[함정?]
“사실 공시 올릴 실무자는 정해져 있고, 이걸 막는다면 결국 압력이 들어올 루트는 뻔하잖아요?”
[함정수사라도 의뢰하자는 거냐? 그건 불법이잖아?]
“에이, 이건 함정수사가 아니죠.”
[그런가?]
“범죄를 유도하고 그 자리에서 체포해야 함정수사지, 이건 범죄를 예상하고 거기서 기다리는 거잖아요.”
[음……. 듣고 보니 그러네.]
“그래서 말인데요, 부장님.”
[말해.]
“천웅건설 통해서, 인맥 좀 빌려주실 수 있어요?”
[프흐흐.]
우진의 이야기를 듣던 경완은, 갑자기 실소를 터뜨렸다.
그에 의아해진 우진이 다시 물었다.
“왜 웃어요?”
[아니, 재밌어서.]
“뭐가요?”
[지금 이 상황에서 도움 될 만한 인맥이, 확실히 있긴 있어.]
“오……! 그래요? 그런데 그게 왜 재밌어요?”
[그런데, 그 인맥이. 사실 내 인맥이 아니야.]
“네?”
[정확히는 한 다리 이상 건너야 된다고 할까?]
“음……?”
경완이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우리 회사 임원중에, 나랑 좀 친한 전무님이 한 분 계시거든?]
“전무님이라면……. 김진표 전무님이요?”
[아니, 그분은 지난번에 뵀잖아.]
“그랬죠.”
[나랑 친해 보이디?]
“음, 딱히 막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흐흐흐.]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음침하게 웃은 경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김 전무님 말고, 올해 퇴직하시는 오광혁 전무님이라고 계시는데. 아무래도 이분께 도움을 좀 받아야겠다.]
“오……!”
우진의 입에서 기대감에 찬 탄성이 새어나왔다.
천웅의 전무급 되는 인물의 인맥이라면, 분명 기관에서도 고위 관료일 확률이 높았으니 말이다.
[너, 시간 언제 되냐?]
“약속 잡아 주시게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거 아냐?]
“당연하죠. 저쪽에선 이미 움직이고 있을 텐데.”
[그래서 언제?]
“시간은 제가 맞춰야죠. 새벽 두 시라도 튀어 나갑니다.”
[좋아. 그럼 내가 다시 연락 주마. 크크.]
경완과의 전화를 끊은 우진이, 고개를 갸웃하였다.
얘기는 잘 된 것 같은데, 어쩐지 경완의 목소리가 조금 수상했다.
“뭐지? 왜 이렇게 또 신나신 거지?”
하지만 경완의 음침한(?) 목소리에 대한 의심도 잠시.
우진은 곧, 다시 머릿속의 계획들을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진짜 내 생각대로 꼬리를 잡을 수만 있으면…….’
처음에는 어떻게든 공모 비리만 막아보려 했던 것이, 어쩌다 보니 이렇게까지 흘러왔다.
어떻게든 공모에서 브루노의 설계를 당선시키고, 태호건설을 밀어내기 위한 계획은 그다음에 다시 짜려고 생각했는데.
잘하면 이 한 방으로,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경완과의 전화를 끊은 우진의 입에서,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좋았어……!”
가장 머리 아팠던 일이 잘 해결되고 나자, 다른 업무들도 더 손에 잘 잡히는 기분이었다.
하여 그렇게 기분 좋게 하루 일정을 마친 우진이 퇴근하려고 짐을 챙길 때 즈음.
경완으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내일 낮. 어때.]
“오……! 좋죠. 저야 새벽이라도 튀어 나간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식당 예약은 내가 할 테니까, 문자 찍어주는 데로 와라. 1시까지.]
* * *
경완이 우진에게 찍어 준 주소는, 한남동의 유명한 고급 한우 집이었다.
성인 두 사람이 배불리 먹으면 50만 원 이상도 거뜬히 나올 수 있는, 최고급 한우 오마카세*[맡긴다'는 뜻의 일본어로, 손님이 요리사에게 메뉴 선택을 온전히 맡기고 요리사는 가장 신선한 식재료로 제철 요리를 만들어내는 것을 뜻한다.] 전문점.
음식점을 검색해 본 우진은, 충격적인 가격 탓에 마른침을 꿀꺽 삼켜야 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이 사실, 돈 몇 십만 원 아낄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그래, 뭐.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이런 메뉴 먹어보겠냐.’
하여 우진은 기꺼운 마음으로 약속시간에 맞춰, 차를 끌고 한남동으로 향했다.
사실 오늘이 공모 마감일이었지만, 다행히 우진이 해야 할 일은 딱히 없었다.
부릉-!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조금 막히는 강변북로를 뚫고, 우진은 약속시간에 맞춰 음식점에 도착하였다.
널찍한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리자, 조금씩 긴장도 되기 시작하였다.
일단 천웅건설의 전무급 인사만 해도 충분히 거물이라 할 수 있는데.
그에 더해 신원을 알 수 없지만(?), 그 이상으로 거물급인 한 사람이 더 온다는 얘기를 들었으니 말이다.
아마도 우진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게 될, 그 인맥을 말하는 것 같았다.
‘대체 누가 오는데, 부장님은 얘기도 미리 안 해주시는 거지?’
그래서 조금은 경직된 표정으로, 우진은 조심스레 음식점을 향해 걸어갔다.
마침 경완도 도착했는지, 입구에서 만날 수 있었다.
“여, 왔냐?”
“오셨어요?”
“나도 방금 도착했지.”
앞장서 음식점으로 들어간 경완이 이름을 대자, 직원이 친절하게 두 사람을 룸으로 안내해 주었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손님.”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짝바짝 마르기 시작하는 침.
그런데 잠시 후, 룸의 문이 열렸을 때.
경완을 따라 안으로 걸어 들어가려던 우진은,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룸 안쪽에서 순간적으로, 두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소리가 들려왔으니 말이었다.
“야, 이 시댕아. 왜 이렇게 늦게 와?”
그것은 바로 하얀 백발 노인의, 칼칼한 목소리였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