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138화 (138/315)

138화

새로운 조력자

왕십리 민자 사업의 공모 마감일.

공모에 참가한 회사는 총 여덟 곳이었다.

패러마운트 기획팀 메일에, 여덟 군데의 설계사무소에서 도면이 날아왔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날로부터 며칠이 지난 금요일.

패러마운트의 기획실장인 윤수엽은, 직접 메일을 열어 도면 파일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수십 장 이상의 도면과 함께 투시도와 디자인 제안서까지 포함되어있는, 각 회사의 설계제안 PPT들을 말이다.

‘후우. 순서대로 하나씩 열어 보는게 편하겠지?’

도면이 수십 장이 넘는다고 해서, 검토에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세부 도면까지 다 검토하는 것은 디자인팀에서 해야 할 일이고, 기획실장인 윤수엽은 투시도와 기획서 위주로 러프하게 검토하면 되니 말이다.

사실 수엽은 원래 설계검토 같은 것을 할 생각도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어떤 설계가 메일로 와 있든, 어차피 A&C팩토리의 것이 채택될 예정이었으니까.

그래서 공모 메일이 도착한 지 며칠이 지난 지금에서야, 파일들을 열어본 것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민원이라는 변수가 생겼고, 그래서 국가기관이 개입하게 되었다.

아주 곤란한 상황이 된 것이다.

‘하. 꼬여도 이렇게 꼬일 줄이야.’

결정적으로 수엽이 이렇게 직접 메일까지 열어보게 된 계기는…….

바로 오늘 오전.

구청에서 들어온 압박 때문이었다.

설계공시에 대한 공문을 보냈음에도 패러마운트에서 아직 답을 주지 않았다며, 독촉 전화까지 온 것이다.

윤수엽이 답변을 보류하고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이런 경우 기관에서 들어온 공문을 못 본 척 며칠 개기다 보면, 유야무야 넘어가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독촉 전화까지 온 이상, 이제 더 비빌 수는 없었다.

여기서 시간을 더 끈다면, 아마 더욱 귀찮은 일들이 생기리라.

‘후. A&C에서 괜찮은 설계를 보내왔으면 좋겠는데…….’

설계들을 검토하는 윤수엽은, 앞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머리를 굴렸다.

기관에서 이렇게까지 나온 이상, 공시를 안 할 방법은 사실상 없어져 버렸다.

그래서 경우의 수는 두 가지.

우선 베스트는 당연히, A&C의 설계가 충분히 훌륭할 경우이다.

그럼 쿨하게 구청에서 요구한 대로, 공시해 올리면 그만이니까.

문제는 역시 A&C의 설계가 나쁠 때인데, 그때는 우선 태호건설에 먼저 얘기하는 게 순서일 것 같았다.

어쨌든 지금 이 시점, 윤수엽과 같은 배를 탄 것은 태호건설이었으니까.

‘손절을 할 땐 하더라도, 아직은 아니야. 조금 더 상황을 봐야지.’

수엽은 이번 사업장에서, 어지간하면 원래 약속했던 대로 태호건설에 설계권까지 깔끔하게 넘기고 싶었다.

꽤 많은 돈을 받은 이런 상황에서 돈값을 정확히 못 한 경우, 뒤탈이 날 확률이 아주 높았으니까.

물론 윗선의 의견을 거스르면서까지, 태호건설의 편을 들어줄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딸깍 딸깍-

그래서 복잡한 심경으로 메일의 첨부파일들을 다운받은 수엽은,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모든 설계 기획안들을 검토하였다.

그리고 대략 한 시간 반 정도가 지났을까?

수엽은,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휴우우…….”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누가 봐도 압도적인 디자인과 설계를 보여준 공모작은 브루노 산체스의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한숨을 쉬고 난 뒤에는,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제기랄. 이딴 쓰레기를 보내고 당선을 시키라고? 이건 좀 너무하잖아?”

심지어 A&C의 설계는, 브루노의 설계를 제외하고 보더라도 최하위 권에 속했으니 말이다.

A&C에서 보내온 기획서는, 전공자가 아닌 수엽이 보기에도 다른 설계사무소의 작품들과 비교하기 민망할 수준으로 허접했다.

아마 A&C의 역량이 원래 이런 정도라기보단, 어차피 당선될 설계 공모전이라 생각해서 대충 작업해서 보낸 게 틀림없었다.

만약 이 작품을 채택하고 그대로 모든 설계를 공시해 올린다면, 패러마운트는 그대로 웃음거리가 될 게 분명했다.

이건 너무했다.

‘어떡하지? 답이 없는데……. 진짜 손절 해야 하나?’

수엽이 그렇게 고민에 빠져 있을 때.

그의 휴대폰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38기 윤정렬]

그리고 그 전화의 수신자를 확인한 수엽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이 선배도 양반은 못되는구만.”

방금 A&C의 설계를 확인한 수엽은 그 전화를 받기도 싫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쪽으로 한배를 탔을 땐, 쉽게 먼저 내릴 수 없는 법이었다.

[통화 가능하냐, 수엽아.]

“예, 선배님.”

[월요일에 공모작들 들어간 건 좀 봤고?]

정렬의 말에 수엽은 순간적으로 화를 낼 뻔하였다.

하지만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꾹 참고, 거짓말을 하였다.

“아, 아뇨. 이번 주에 업무가 밀려서……. 아직 못 봤습니다.”

설계를 봤다는 대답을 하면 분명 어땠냐는 반문이 돌아올 것이고.

수엽은 거기에 좋은 소리를 할 자신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수엽의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렬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그래, 잘했다. 사실 볼 필요도 없잖아? 흐흐.]

수엽은 또다시 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가까스로 참아내었다.

“후우. 그래서, 무슨 일로 전화하신 겁니까?”

[성질 급하기는.]

“……오늘, 일이 좀 많아서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좋은 소식 가져왔으니까, 기분 풀어라.]

“저 기분 안 나쁜데요?”

[지난번에 내가 실언해서 기분 나빴잖아. 다 알아, 짜샤.]

“아닙니다. 여튼……. 좋은 소식이라는 건 뭡니까?”

수엽은 정렬과의 대화가 짜증이 나면서도, 좋은 소식이라는 건 조금 궁금했다.

그가 수엽에게 좋은 소식이라고 할만한 건, 사실 이번 로비와 관련된 일뿐일 테니 말이다.

A&C의 성의 없는 설계도에 기분이 상했지만, 그래도 처음 계획대로 마무리되는 것이 속 편한 결말이었다.

그래서 수엽은 정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수화기 너머에서부터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선배, 오늘 성동구청 다녀오는 길이다.]

“성동……구청이요?”

[도시관리국에, 상자 한 박스 꽂아 넣고 왔어.]

“……!”

[그러니까, 걱정 말고 밀어붙여.]

정렬의 말이 떨어진 순간, 정적이 흘렀다.

이것은 수엽으로선, 생각지도 못했던 얘기였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선배. 구……청에도, 돈을 바르셨다는 말이죠?”

[그걸 꼭 그렇게 한 번 더 설명해야 아냐?]

사실 수엽은 지난 수십 년 회사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크게 로비를 받아본 것도 처음이었다.

자잘하게 몇백에서 일이천 정도는 챙긴 적이 있었지만, 억 단위가 넘어가는 로비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공기관에까지 정렬이 손을 뻗치자, 덜컥 겁이 날 수밖에 없었다.

욕심에 눈이 멀어 보이지 않던 천 길 낭떠러지가, 이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로비라는 건 결국 전부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공기관 쪽에서 꼬리가 잡힌다면, 줄줄이 굴비 마냥 수엽까지 엮여 나갈 게 분명했다.

그래서 수엽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위험한 건……. 아니겠죠, 선배?”

[공무원이라고 뭐 다르냐?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은 거야, 인마.]

“후우…….”

[확실히 먹였으니까, 걱정 마라. 허튼짓하면……. 그쪽도 같이 쇠고랑 차는 거다.]

정렬은 그 뒤에도 이런저런 얘기를 더 한 뒤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전화가 끊겼음에도 불구하고, 수엽은 수화기를 손에 쥔 채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다.

민자 사업의 수주권과 설계권만 넘기고 일이 억 챙기면 되는 거라고 가볍게 생각했던 일이.

그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커지고 있는 느낌이었으니 말이다.

‘후우……. 이거 어떡하지? 이러면 손절 치기도 쉽지 않은데.’

천천히 휴대폰을 책상 위에 올려놓은 수엽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너무 깊숙이 발을 들인 것 같았다.

* * *

성동구청의 도시관리국 국장 서영택은, 오늘 출근하여 자리에 앉자마자 이상한 전화를 받았다.

발신자가 이상한 사람은 아니었다.

전화 온 번호 자체가, 구청의 내선 번호였으니 말이다.

다만 같은 건물에 근무하면서도 얼굴 볼 일도 잘 없는 감사담당관의 감사청렴 팀장이 발신인이었고, 그가 이야기한 말들이 당황스러웠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팀장님. 조만간 누가 로비를 하러 올 건데……. 그 돈을 잘 받아서 잠깐 보관하고 있으라는 말씀이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국장님. 보관하시다가, 감사팀으로 가져오시면 됩니다.]

“아니, 로비 거절이 아니라, 받아서 가져오라고요?”

[윗선에서 내려온 지시입니다. 국장님께 피해 갈 일은 없으니……. 걱정은 않으셔도 좋습니다.]

서영택은 혼란스러웠지만, 일단 알겠노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어차피 내선전화로 통화한 내역은 전부 기록이 되니, 나중에 감사팀에서 다른 소리 할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 전에, 로비가 곧 올 거라고? 무슨 예언이라도 하는 건가?’

그래서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그는 곧 감사팀과 통화했던 일을 잊고 업무에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최근 도시관리국에 민원이 많이 늘어난 탓에, 할 일이 꽤 밀려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오전 업무를 끝내고 점심 식사를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던 도중.

이번에는 휴대폰으로 전화가 한 통 왔다.

“음? 이 시간에 누구지?”

발신인은 바로 영택의 전 상사이자 지금은 다른 기관으로 발령이 난, 그의 한 기수 선배였다.

[영택아, 요즘 어떻게 지내냐?]

“아, 선배. 저야 뭐, 그냥저냥 살고 있죠. 어쩐 일이세요?”

그리 친했던 사람은 아니라 전화 온 이유가 의아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이 전화가 감사팀의 전화와 연관되어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영택이었다.

[어쨌든 그래서 말인데, 오늘 점심이나 같이 한 끼 할 수 있겠냐?]

“뭐, 그야 어렵지 않죠. 마침 나가던 중이었습니다. 지금 왕십리역이시라고요?”

[그래. 다 왔어. 구청 주차장에 차 댈 거니까, 5분 뒤에 나와 줘라.]

“예, 선배.”

딱히 친분이 크진 않았어도 반대로 사이가 나쁘지도 않았던 선배였기에.

영택은 별생각 없이 그와 함께 점심을 먹으러 나섰다.

그런데 그 곳에서.

영택은 작은 귤박스 같은 걸 한 상자 받게 되었다.

“이거 내가 주는 건 아니고, 아는 분께서 부탁하셔서.”

“이게 뭔데요 선배?”

“나도 몰라 짜샤. 그 안에 명함 들어있을 테니까, 이따가 열면 연락이나 한번 넣어 봐라.”

선배는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며 상자를 전달한 뒤 사라졌지만.

사실 바보가 아니라면, 이 상자에 뭐가 들었을지 모를 수는 없었다.

점심 식사 중에 선배의 이야기들은, 누가 들어도 로비였으니 말이다.

‘후우. 진짜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영택은 받은 박스를 뜯지도 않은 채, 그대로 감사팀으로 가져갔다.

오전에 전화 왔던 감사팀장의 목소리를 생각하면, 이 불길한 물건을 잠시도 지니고 있고 싶지 않았다.

‘그나저나 소름 돋네. 대체 어떻게 안 거지?’

감사팀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비리 감사 능력에, 온몸에 닭살이 돋은 서영택.

“허, 빨리도 오셨군요.”

“여튼, 전 확실히 전달했습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그는 감사팀 사무실에 박스를 놓고, 후다닥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영택은 이제, 평생 로비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할 것 같았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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