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수주전의 시작
<우리 집에 왜 왔니> 촬영팀은, 오늘도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촬영을 마쳤다.
시청률이 아직 20%를 뚫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19~20% 언저리에서 순항 중이었고.
조만간 주말 예능 원탑 자리까지도 노려볼 수 있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게다가 더욱 고무적인 것은, 예능 흥행 지표 중 하나인 ‘다시보기’ 의 조회수가 또 한 번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것.
덕분에 오늘도 기분 좋게 촬영을 마친 윤재엽은, 짐을 정리하며 옆에 있던 리아에게 말했다.
“리아, 오늘 오랜만에 다 같이 한잔하는 건 어때?”
“오, 지금?”
“그래, 롸잇 나우!”
“그런데 다 같이……면, 누구누구? 수하 언니랑 우진이는 당연히 포함이겠고. 두영 선배나 민하 언니까지?”
“야 너 동우는 무시하냐.”
“아, 맞다. 동우 씨도 있었지.”
“어쨌든 그렇게까지 크게 벌일 판은 아니고, 그냥 우리 넷이 한잔할까 해서.”
“뭐, 난 좋은데. 수하 언니랑 우진이 어디 갔어?”
오늘 촬영은, 본격적으로 재엽의 집 인테리어가 시작되기 바로 전.
간단한 몇 가지 미션과 함께, 최종점검을 하는 촬영이었다.
때문에 재엽팀에서도 재엽, 리아와 수하, 우진이 각각 다른 미션을 수행하여 따로 촬영되었고.
촬영이 끝날 무렵 마지막 촬영장에 모인 것.
그런데 방금 도착한 줄 알았던 두 사람이 갑자기 안 보이니, 재엽과 리아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된 것이다.
“엇, 그러게. 얘들 어디 갔지?”
“피디님이 부르셨나?”
하지만 두 사람이 두리번거리던 그때.
반대편에서 나타난 수하가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우진이는 먼저 갔어, 오빠.”
“엇, 수하 언니!”
“응? 우진이가 갔다고?”
“피디님께 양해 구하고, 나랑 여기 도착하자마자 바로 갔어. 뭐 엄청 바쁜 일이 있나 보던데? 둘한테도 먼저 가서 미안하다고 전해달래.”
수하의 말에, 재엽과 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우진이 촬영이 끝난 뒤에 이렇게까지 빨리 사라지는 것은 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걔야 항상 바쁘잖아. 특별히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리아의 말에, 수하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뭐, 특별히 바쁘긴 하겠지.”
재엽도 한마디 했다.
“흐음. 이러면 나가린데.”
재엽의 말을 들은 리아가 그를 살짝 째려보았다.
“와, 재엽 오빠. 나가리라니! 이제 대놓고 우진이만 챙기겠다, 이건가?”
수하도 옆에서 거들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우진이 편애하는 것 봐. 대박…….”
두 동생들의 말을 들은 재엽은, 오히려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와, 너네 뭐냐. 평소에 이 늙은 오빠 버리고 우진이만 챙기던 게 누군데!”
“흠, 내가 그랬나?”
“그런 기억 없는데.”
“서럽다, 서러워. 동생들이 나이 많은 오빠 갈구네.”
재엽의 과장된 제스쳐에, 수하와 리아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럼, 오늘 술자리는 없던 걸로?”
“아냐. 셋이 한 잔 간단하게 하지 뭐. 맛집 하나 새로 찾아놨어.”
“나가리라며?”
“아 진짜 뒤끝 쩌네, 유리아.”
장난스레 인상을 팍 써 보인 재엽이 다시 말을 이었다.
“다른 게 아니고, 오늘 원래 우진이한테 물어보고 싶던 게 있어서 나가리라고 했던 거야.”
리아 대신 수하가 먼저 물었다.
“우진이한테, 물어볼 거?”
“그래.”
이번에는 리아가 물었다.
“부동산 관련이야?”
재엽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지 뭐. 어머니 일 때문에 뭐 좀 물어보려 했었는데……. 당장 급한 건 아니니까 괜찮아.”
재엽의 대답에, 수하와 리아는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동산과 관련된 분야에서 물어볼 게 있었다면, 우진이 먼저 가버린 것이 확실히 아쉬울 만했으니 말이다.
“여튼, 그럼 셋이 한 잔?”
“콜!”
“나도 뒤에 딱히 스케줄 없어.”
“좋아. 딱 두 시간만 가볍게 마시고 귀가하자고.”
죽이 척척 맞는 세 사람은 각자의 매니저에게 이야기한 뒤, 재엽의 차에 함께 올라탔다.
그렇게 재엽팀의 우정(?)은, 오늘도 돈독해지고 있었다.
* * *
건설업계에 오래 있다 보면, 수많은 더러운 일들을 겪게 된다.
워낙 다양한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보니, 별별 일들이 다 생기는 것이다.
물론 업계 전체가 그렇다는 건 아니다.
부정한 사람보다는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 더 많은 것이 당연한 이치였으니까.
어쨌든 그런 이면의 더러운 사건들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행사 중 하나가, 바로 건설사들이 총력을 다 해 뛰어드는 강남 재건축의 수주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업계에서도 ‘비리의 복마전’이라고까지 불리는 게 바로 건설사 수주전이었으니까.
그 비리들이란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일들이라 할 수 있었다.
[<단독> XXX아파트, 재건축 수주전, 난무하는 돈다발에 시장 ‘혼탁’]
- 지난여름, 시공사 합동 설명회와 함께 조합원 투표를 앞두고 있는 O씨는 황당한 경험을 했습니다.
- 수주전에 뛰어든 대형 건설사 A건설 관계자로부터, 천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 가방을 선물 받았다는 겁니다.
[XXX아파트 조합원 : 당연히 거절하고 돌려보냈죠. 그런 걸 어떻게 받겠어요?]
- O씨는 거절했지만, 더욱 황당한 일은 그 뒤에 벌어졌습니다.
- 이번에는 O씨의 자녀에게, B건설사에서 접촉한 겁니다.
- O씨의 딸이 하굣길에 받은 B건설의 홍보 전단물에, 수백만 원이 넘는 돈이 든 봉투가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B건설 관계자 : 용역 직원이 성의 표시를 한다는 게……. 따님이 편하니까 거기(홍보전단) 넣어 놨었나 봐요.]
딸이 가져온 봉투에서 돈을 발견한 O씨가 전화를 걸어 따지자, 그냥 넣어두라고 설득까지 합니다.
[B건설 관계자 : 저희 직원 입장에선 그냥 당연한 걸 한 겁니다. 저야 봉투 안 봐서 얼만지는 모르는데, 그게 뭐 10만 원이든 100만 원이든 얼마든 간에 그냥 간단하게 외식이라도 하시면……. 그러니까 그런 맥락으로 보시고, 이거(돈 봉투)는 그냥 받아 두시는 게…….]
- 이렇게 재건축 사업장의 시공권을 따내기 위한 건설사들의 로비는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 고가의 금품은 물론 상품권에 과일바구니 등…….
당연히 건축 수주를 위해 조합원들에게 별도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도정법(도시정비법)상 불법에 해당하는 일이다.
하지만 워낙 관례처럼 행해져 온 일이었기에 업계에서는 이러한 로비를 당연시 생각하고 있었고.
때문에 이런 로비 없이 수주전을 치른다는 것은, 2010년엔 너무 힘든 일이었다.
서울시의 개입과 함께 본격적으로 클린 수주전이라는 슬로건을 내걸며 수주전이 청결(?)해지는 데까지는, 앞으로도 십 년은 더 필요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수주전을 준비하는 천웅건설 TF팀에서, 가장 먼저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공공연하게 이뤄지는 어둠의 거래였다.
“휴, 이것 좀 그만할 방법 없나?”
경완의 말에, 옆에 앉아있던 오주형 영업부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걸 어떻게 그만둬? 그게 그렇게 쉬웠으면, 내가 지금까지 이러고 있겠냐?”
“그치?”
“솔직히 이거 하고 싶은 건설사 아무데도 없을 건데……. 대체 왜 이러고 있는 건지…….”
“아무데도 없는 거 맞냐? 명성이나 제운은 이거 없으면 영업 못 할걸?”
“하긴. 그런가? 크크.”
사실 수주전에서 진흙탕 싸움을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치킨게임일 뿐이었다.
서로 어떤 건설사에서 돈을 많이 뿌리느냐에 따라 수주의 승자가 결정된다고 생각하다 보니.
경쟁사들의 눈치를 봐 가며, 조금이라도 더 쓰려고 계속해서 눈먼 돈만 뿌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돈다발과 선물 공세를 받는 조합의 입장에서는 좋을 것이냐?
그 또한 아니었다.
허공으로 사라지는 그 돈은 결국 건설사가 산정한 건설비에 다 포함되는 금액이고.
이렇게 날아가는 비용만큼, 아파트에 들어가는 돈이 줄어드는 셈이니 말이다.
이야말로 그 어느 누구도 이득 볼 것 없는 최악의 치킨게임.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건설사에는 선택권이 없다.
모든 건설사가 클린하게 수주전을 한다는 보장이 없는 한 말이다.
‘건설사끼리 손을 잡고 페어플레이를 약속한다? 어림도 없지. 죄다 뒤로 호박씨를 깔 놈들뿐인걸.’
그래서 천웅도 결국, 이 불법 로비를 위한 예산을 따로 책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청담 선영 재건축사업>을 위해 꾸려진 TF팀의 본격적인 첫 업무가 뒷돈을 만들기 위한 예산책정이라는 사실이, 경완은 무척이나 씁쓸할 수밖에 없었다.
“휴. 일단 오늘은 퇴근하고, 다음 주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
경완의 말에 오주형이 마주 한숨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고.”
어차피 설계안이 정해진 이번 주는, 구체적인 방향성에 대한 큰 틀만 잡으면 되는 주간이다.
해서 금요일 저녁인 오늘.
7시쯤 되어 얼추 일이 정리되자, 경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돕기 위해 수주 영업에 대한 자료를 공유하던 오주형도 따라 일어섰다.
“가볍게 한잔하고 들어갈까?”
“안 피곤해?”
“다음 주부터는 바짝 달려야 하잖아. 오늘 아니면 언제 한잔하겠어.”
주형의 말에 경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사내에서 경완이 터놓고 지내는 몇 안 되는 친구였지만. 서로 바쁜 탓에 술 한 잔 나눈 지도 오래됐다.
경완도 한 잔 생각이 날만 한 것이다.
“그래, 뭐. 나쁘지 않지.”
그런데 주형과 함께 짐을 챙겨 사무실을 나서던 경완은, 엘리베이터에 타기 직전에 생각지도 못했던 문자를 받게 됐다.
[발신자 : 애늙은이]
별생각 없이 시간이나 확인하려고 휴대폰을 열었는데, 익숙한 번호가 떡 하니 찍혀있는 것이다.
‘음? 이놈이 갑자기 무슨 일이지?’
우진과는 낮에도 업무 관련해서 협업 때문에 계속해서 연락했지만, 오늘 해야 할 이야기는 전부 마무리된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래서 퇴근 시간이 지나서 온 문자가 의아했지만, 경완은 망설임 없이 메시지의 내용을 확인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
“음? 박 씨, 왜 그래?”
“아니, 잠깐만.”
경완은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서우진 이놈. 진짜 무슨 관심법이라도 쓰는 건가?’
우진이 보내온 문자 안에는, 방금까지 경완이 고민하던 내용과 관련된 부분이 담겨 있었으니 말이다.
[부장님. 퇴근 후에 시간 되세요? 조합원 영업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좀 있는데…….]
우진은 경완이 아는 어떤 실무자보다도, 이 업계의 생리에 대해서 잘 안다.
때문에 그런 우진이 말하는 ‘조합원 영업’이란, 분명 방금까지 경완과 주형이 고민하던 진흙탕 싸움에 관련된 것일 터.
그래서 경완은, 술 한잔 걸치려던 계획을 곧바로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야, 오주형이.”
“응?”
“술은 다음에 마시자.”
“왜, 갑자기. 무슨 일 생겼어?”
주형의 반문에 고개를 끄덕이려던 경완은, 문득 무슨 생각이 났는지 다시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 아니다. 생각해보니, 너도 같이 가는 게 좋겠어.”
“나? 밑도 끝도 없이 그게 무슨 말이야? 어딜 가는 건데?”
띵-!
경완은 마침 열린 엘리베이터의 문 안으로, 주형의 팔을 끌고 들어가며 얘기했다.
“네 말 대로, 술 한잔하자. 대신, 꼬마 놈 하나도 끼워서.”
“꼬마 놈?”
“어차피 너도 조만간 한 번 만나야 될 꼬마야. 그러니까 잔말 말고 따라와.”
경완이 이번 프로젝트의 총괄 실무자이긴 했지만, 사실 어둠의 영업을 빠삭하게 아는 것은 누구도 아닌 주형이다.
영업부장이라는 타이틀이 괜히 달린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경완은 주형을 끌고 갔고, 주형은 영문 모르는 표정으로 끌려가 경완의 차에 탔다.
그들이 향한 곳은 성수동.
WJ 스튜디오 인근의 포차였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