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117화 (117/315)

117화

수주전의 시작

수요일에 공모작 채택이 확정된 이후부터, 우진은 하루종일 수주전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확실히 큰 산을 하나 넘은 것은 맞지만, 수주전에서 천웅을 승리시키는 건 이보다도 훨씬 더 큰 산이었으니 말이다.

‘천웅이 제일 유리할 수 있을 방향. 그걸 찾아야 해.’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수주전에 힘쓰는 것은 우진과 WJ 스튜디오의 일이 아니다.

합동설명회전까지 설계사무소의 역할은, 건설사와 협업하여 충실히 설계를 발전시키고 보완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직원들이 다시 출근하는 월요일부터 시작해도 될 일이었고.

그래서 우진은 진태와 함께 사무실에서 데이터를 분석하는 중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금요일인 오늘까지 진태는 휴가였지만, 우진의 부름에 기꺼이 나와 주었다.

“어때, 진태 형. 이제 좀 과정이 이해가 돼?”

“대충. 큰 그림 정도는 그려지네.”

“알고 보니 별거 아니지?”

“별거 아니긴 인마. 대체 넌 건설사에서 일한 것도 아니면서 이런 걸 어떻게 다 아는 거냐?”

‘건설사에서 일한 것도 아니면서’라는 진태의 말에, 우진은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진실을 말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내가 수주전만 몇 번을 치렀는데…….’

진태는 우진과 함께, 이전에 진행된 수주전에 대한 데이터를 분석 중이었다.

정확히는 천웅건설에서 공유해 준, 아현동 재개발 사업의 수주전 과정에 대한 데이터 분석.

진태는 목공 일을 오래 했지만, 재건축 사업은 완전히 별개의 분야였고.

그래서 이에 대한 지식은 많지 않았다.

때문에 전반적으로 우진이 가르쳐주는 형태였다.

“관심이 많으니까 잘 알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무튼.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

“그렇지.”

“오늘 여기서 우리는, 핵심을 찾아야 해.”

“핵심?”

“천웅건설이 다른 건설사들에 비해 조금이라도 유리하려면, 어떤 판이 짜여야 하는지 말이지.”

사실 수주전에 대해 분석하고 전략을 짜는 데까지는, 진태의 도움이 크게 필요하지 않다.

차라리 박경완 부장과 한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전략 수립에 훨씬 더 큰 진전이 있을 테니까.

하지만 우진은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진태가 이번에 함께 움직이며 경험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진태는 앞으로 우진을 대신해서 더 많은 일을 해줘야 할 인재였으니까.

“일단 지금까지 들은 얘기를 토대로 생각해 보면, 중요한 건 결국 변수를 줄이는 거네.”

“그렇지. 일단 돈으로 바르기 시작하면……. 천웅이 제운급을 이기는 건 더욱 어려워지니까.”

“그럼 결국 다른 건설사에서 조합에 로비하는 것 위주로, 찾아서 막으면 되는 거 아닌가?”

“어떻게?”

“신고하는 거지 뭐. 도정법 위반으로 신고하면 자격 박탈이라도 되지 않을까?”

꽤 순진한 진태의 물음에, 우진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였다면, 지금 이렇게 고민하고 있지도 않을 테니까.

“아니, 그건 아니야.”

“왜?”

“물론 가능하다면 가장 원론적인 방법이 되겠지만. 현행법이 좀 지랄 맞거든.”

“흠……? 어떻게?”

“사실상 꽤 명백한 증거를 잡아서 가져가도, 벌금 좀 물면 끝이야.”

“미친.”

“관리부서까지 싹 다 그 나물에 그 밥이니까. 어쩔 수 없어. 예전에는 건설사가 로비에 쓴 돈을 아예 비용처리까지 해줬던 시절도 있었을걸?”

“와 씨, 구멍가게나 대기업이나. 공사판은 다 똑같고만.”

“그렇지 뭐.”

업계에는 관행이라는 게 있다.

그것이 부정한 일인 줄 알면서도, 별다른 죄책감조차 없이 너무 당연시 행해지는 관행들.

조합원에 대한 건설사의 로비는 거의 70년대부터 이어져 오던 관행이었고, 이렇게 오래 이어져 왔다는 것은 공무원들의 묵인도 함께 있었다는 뜻이다.

신입으로 들어온 공무원들도 이 정도는 당연한 거다.

원래 그런 거다.

라는 식으로 일을 배워 왔으니.

이 부분이 단순히 ‘신고’ 같은 것으로 해결될 리 없는 것이다.

애초에 증거 잡는 것도 어렵지만, 증거를 잡아서 민원을 넣어 봐도.

아마 겉으로만 듣는 척하면서, 뒤에서 무시해버릴 게 분명했다.

‘아마 세상 물정 모르는 얼간이 취급을 당할지도 모르지.’

그래서 우진은 고심하고 또 고심했다.

대체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이 더러운 수주전의 판때기를 뒤집을 수 있을까?

물론 설계에 최선을 다했고, 그것으로 조합원들의 마음이 움직이기만을 바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진의 스타일이 아니다.

할 수 있는 게 더 있다면, 뭐라도 더 해서 더 완벽한 판을 만들고 싶었다.

“그럼 사실상 방법이 없는 거 아냐?”

진태의 말에, 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방법은 있을 거야, 분명히.”

“음……? 그럴까?”

일견 뾰족한 수가 없어 보이긴 했지만, 우진이 방법이 있을 것이라 확신하는 데에는 당연히 그만한 이유가 있다.

‘분명히 2020년대에는, 이 악 폐습이 사라지고 클린 수주가 대세였으니까. 그때도 분명 어떤 계기가 있었을 거야.’

그것은 다름 아닌, 경험했던 미래에 대한 기억.

그런데 우진이 그렇게 고민에 빠져 있던 그때.

그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진태가 불쑥 꺼내 들었다.

“야, 우진아. 그럼 이건 어때?”

“음? 뭔데?”

“결국 이거 로비라는 게……. 받는 사람이 조합원인 거잖아?”

“그야, 그렇지.”

“그럼 조합 쪽에 얘기해서 원천 봉쇄를 해 보는 건?”

“뭐?”

우진이 살짝 놀라는 표정을 짓자, 진태는 더욱 신나서 말을 이었다.

“네 말에 의하면 결국 로비에 쓰인 돈도 조합원들 추가 분담금으로 전가된다며.”

“맞아.”

“그러면 어차피 조합원들도 손해 보는 거니까……. 조합에 잘 말해서 처음부터 거부하게 만들어 버리면 다른 건설사에서도 방법 없잖아?”

“……!”

진태의 말을 듣고 뭔가를 깨달았는지, 우진은 말을 잃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잠시동안 정적이 흘렀지만, 진태는 곧 고개를 저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말하다 보니 자신이 간과하고 있었던 문제를 스스로 인지한 것이다.

“아니다. 역시 말도 안 되는 얘기 같네. 애초에 조합원들이 그 이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면, 로비에 흔들려서 표를 주고 그러지 않겠지.”

하지만 우진은, 진태와 생각이 다른 듯 보였다.

“잠깐만 형.”

“그냥 한번 생각나는 대로 떠들어 본 거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됐어. 됐다고.”

“응?”

“방법이 생긴 것 같아.”

“뭐?”

놀라서 반문하는 진태를 보며, 우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잠깐. 문자 한 통만 보내고 올게.”

“……?”

“잘하면 괜찮은 길이 보이는 것도 같아서.”

우진은 뭔가 생각났는지 갑자기 휴대폰을 들고 어디론가 나갔다.

그리고 무슨 상황인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진태만이, 회의실에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었다.

“뭐야.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데?”

대표실을 향해 뛰어가는 우진의 뒷모습을 보며, 진태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 * *

사실 진태가 제시한 이야기는, 해결책과는 거리가 좀 멀었다.

진태가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아닌 것 같다고 말꼬리를 흐린 것처럼.

조합원들을 컨트롤한다는 건, 다른 건설사들을 컨트롤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으니 말이다.

청담 선영아파트의 재건축 조합원들이 그렇게 합리적인 사람들이었다면, 애초에 외부에서 어떤 제안을 하기 전에 ‘클린수주’라는 슬로건을 들고 나왔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고.

때문에 천웅건설이 조합에다 아무리 어필을 해봐야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오히려 영업하는 데 쓰는 돈이 그렇게 아깝냐.

그럼 기권하고 나가라.

이런 얘기나 돌아올 게 뻔했으니까.

하지만 진태의 말을 들었을 때 우진은, 완전히 잊고 있던 정보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조합을. 정확히는 조합장을 컨트롤할 수 있을 만큼, 확실하고 강력한 무기가 생각난 것이다.

‘내가 대체 왜 이 생각을 못 한 거지?’

우진에게는 과거지만 현시점에서는 조금 미래에 일어날 일.

건설사의 수주가 끝난 뒤, <청담 선영아파트 재건축 조합>에서 터지게 될 ‘커다란 사고’가 떠오른 것이다.

[부장님. 퇴근 후에 시간 되세요? 조합원 영업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좀 있는데…….]

그래서 박경완에게 문자를 보낸 우진은, 대표실로 뛰어가서 노트를 한 장 주욱 찢어 펼쳤다.

그리고 머릿속에 떠오른 이 정보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지기 전에, 그것들을 빠르게 나열하기 시작했다.

청담 선영의 재건축은 SH물산의 아르티아 브랜드로 확정되고 난 뒤, 비대위(비상대책위원회*[해당 재개발‧재건축 구역의 개발을 반대하는 반대파의 모임.])에 두 차례 소송을 당하게 된다.

첫 번째 소송은 조합 정관에 의거해 조합원의 자격을 잃은 현금청산자들의 소송으로, 별 무리 없이 조합이 승소하고 사업도 예정대로 진행된다.

하지만 선영아파트의 상가연합과 연계된 두 번째 소송에서는 조합이 고등법원에서 열린 2심에서까지 패소하게 되고, 그것으로 선영아파트 재건축 조합은 패닉 상태에 빠지게 된다.

상가연합에서 걸어온 소송은 조합설립인가 무효 소송이었고. 마지막으로 대법원에서 진행되는 3심마저 패소한다면 사업이 완전히 엎어지게 되는 것이니까.

그리고 이 상가연합의 소송에서 조합이 패소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일필휘지라도 된 양 순식간에 메모를 써 내려가던 우진이, 펜대를 퉁기며 속으로 생각했다.

‘조합장 곽홍식. 그 아재의 실수 때문이었지.’

원래는 생각도 못 했던 내용들이지만, 한 가지 사실이 기억나자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조합이 결국 비대위에 패소하게 됐던 이유.

하여 결국 백억이 넘는 합의금을 비대위에 지불한 뒤, 조합원 분양신청까지 싹 다시 하고 나서야 소송을 취하받을 수 있었던 이유.

그것까지도 기어이 기억해내고 만 것이다.

‘차라리 다른 조합장처럼 거하게 해먹은거면 또 몰라. 아재, 물러 터져가지고…….’

우진의 머릿속에는 지금, 과거에 봤던 몇 가지 기사의 제목이 떠올라 있었다.

[청담 선영아파트(청담 아르티아 리버뷰), 조합원 분양신청 불공정?]

[특정 평형에 대한 분양신청, 일부 조합원에게만 특혜 논란!]

선영아파트 재건축 조합의 조합장이었던 곽홍식은, 친분이 있는 조합원 일부에게 평형 신청 단계에서 특혜를 줬던 것이다.

심지어 이것은 선영상가 연합의 비대위에서 조합을 상대로 팠던, 일종의 함정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하긴. 비대위에서 그렇게까지 치밀하게 함정을 팠을 줄은 몰랐겠지.’

비대위에서 일부 조합원을 매수하여 평형 신청과정에서 일부러 양보하게 만든 뒤.

양보했다는 사실을 마치 없었던 일인 양, 조합에서 임의로 특혜를 줬다며 소송을 걸었던 사건인 것이다.

우진이 과거의 일을 이렇게까지 빠삭하게 기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회귀 전 우진이 일했던 사업장에서도 이런 비슷한 일이 일어난 적이 있었고.

그때 법원의 판례를 찾아보느라, 청담 선영아파트의 사례를 조사해봤었으니까.

우연이라면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십 년 정도 현장에서 일하다 보면 비일비재한 것이 이런 소송싸움.

덕분에 모든 것을 떠올려 낸 우진이 기억의 조각들을 정리하는 사이.

박경완으로부터 답장이 날아왔다.

[어디로 가면 되는데?]

하여 우진은 곧바로 답장을 한 뒤, 경완을 만나기 위해 사무실을 나섰다.

[서울숲 근처에 성수 포차라는 데가 있거든요? 거기로 오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우진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사이, 경완에게서 곧바로 답장이 날아왔다.

[좋아. 지금 바로 가마.]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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