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마음을 움직이려면
경완과의 대화는 꽤 늦게까지 이어졌다.
우진이야 명확한 정답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경완에게 에둘러 설명하기 위해서는 좀 많은 변명이 필요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거의 밤 열한 시가 될 때까지 이어진 이야기 끝에, 우진은 이렇게 솔루션을 제시하였다.
정말 고심에 고심 끝에 도출된 결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일단 베스트는, 당연히 미분양이 안 나도록 마케팅 총력전을 펼치는 겁니다.”
“그야, 정공법이고.”
“그래서 결국 미분양이 났다? 그건 천웅이 안고 가는 방향으로 조합과 합의를 보는 겁니다.”
“천웅이……. 안고 간다고?”
“조합원들이야 어차피 미분양이 됐든 뭐가 됐든. 분담금만 적게 나오면 장땡 아닙니까?”
“그렇지.”
한 차례 심호흡을 한 우진이,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정리했다.
“그러니까 수주전에서 조건을 내걸 때, 분양가 얼마 이상으로 분양해서 건축비를 충당하겠다고 하면서…….”
우진이 검지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들겼다.
“최대한 노력해서 미분양이 나지 않게 하되 만약 어쩔 수 없이 물량이 남는다면. 어떻게든 천웅이 전부 소화해 내겠다고 계약서에 명시하는 겁니다.”
“그걸 계약서에 명시한다고?”
“계약서에 안 쓰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나중에 건설사가 분명히 말 바꿀 거라고 생각할 텐데요.”
“그렇긴 하지.”
“그런 양아치 건설사도 실제로 많고요.”
“흐음…….”
경완의 미간에 깊게 골이 패였다.
우진의 말대로 한다면 확실히 수주전에서의 불리를 메워낼 수 있다.
설계는 최대한으로 고급화하고 그로 인한 공사비 리스크는 건설사에서 대부분 떠안는다는데, 마다할 재건축 조합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심지어 불리의 극복을 넘어서 천웅을 선택하게 만들 매리트로까지 전환 시킬 수 있는 방안인 것.
하지만 이렇게 되면 문제는 역시, 천웅에서 그 리스크를 감당할 수 있느냐는 점이었다.
경완이 다시 말했다.
“우리 회사 재무상태가 괜찮긴 한데……. 그랬다가 수십 채 남으면 나 바로 옷 벗어야 돼 인마.”
“그럴 일은 없게 만들어야죠.”
“남 일이라고 쉽게 말하냐?”
“걱정 마세요. 미분양 나면 제가 제일 먼저 한 다섯 채 주워갈 테니까요.”
우진의 대답에, 경완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이 되었다.
평범한 아파트도 아니고 강남 최고 입지의 프리미엄 아파트다.
그걸 다섯 채 가져간다고 하니,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뭐? 다섯 채?”
그런데 우진은 거기서 한술 더 떴다.
“WJ 스튜디오 법인 명의로 한 열 채. 제 개인 명의로 한 다섯 채 가져갑니다. 어때요?”
농담인지 진담인지조차 구분하기 힘든, 우진의 기가 막힌 이야기.
“분양가 얼만지는 아는 거지?”
“어차피 계약금 10퍼센트만 있으면 주워갈 수 있지 않습니까. 중도금이야 무이자 대출될 거고.”
하지만 우진은 진심이었다.
‘34평 기준 분양가 한 13억 나올 거고. 그럼 계약금이 한 채당 1.3억일 테니까 열 채 해 봐야 13억……. 결국 한 채 가격. 일반분양은 빨라야 내년 여름일 테니, 그때까지 13억 정도 만드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우진이 생각하기에 이건, 어떤 의미에서 신의 한 수였다.
2015년만 되도 청담동의 한강뷰 프리미엄 아파트는 최소 17억 시세까지는 올라올 테고.
그럼 한 채당 4억씩 남기는 셈이니, 열 채면 40억을 버는 거다.
13억 묶어두고 40억을 챙길 수 있는, 기가 막힌 투자처라는 이야기다.
완공될 때 지불해야 할 중도금과 잔금은, 세입자를 들여 전세로 대부분 해결하면 된다.
지금이야 분양가가 13억이지만 완공 시점인 2013~2014년 즈음에는, 전세가만 해도 최소 10억이 훌쩍 넘을 테니까.
게다가 한 가지 더.
미분양된 아파트를 계약하면 주택 숫자에 포함되지 않고 양도세를 감면시켜주는 등, 각종 세금혜택까지도 볼 수 있다.
정부 입장에서는 골치 아픈 미분양을 해결해 주는, 착한 투자자가 되는 것이니까.
천웅은 리스크를 줄여서 좋고, 우진은 돈을 벌어서 좋고.
조합원들은 추가 분담금을 줄일 수 있어서 좋고.
그렇다고 누구에게 피해 줄 것도 없으니…….
모두가 웃을 수 있는 완벽한 제안인 것이다.
물론 당장이야 우진이 엄청난 손해를 보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모양새였지만 말이다.
“야, 그렇게까지 할 건 없다.”
“그렇게까지 한다니요?”
“네가 굳이 그렇게까지 리스크를 나눠갈 필요는 없단 말이야.”
우진이 피식 웃었다.
“리스크라뇨. 투잔데.”
“뭐?”
우진은 경완과 이야기를 나누며 미리 펼쳐놨던 지도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여기 이 자리.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청담동에서도 다시 나오기 힘든 최고의 자립니다. 한강뷰 제대로 나올 거고, 최상급 주변 인프라에 남쪽으로는 경기고 학군에……. 역에서 조금 멀다는 단점이 있지만, 청담동 특성상 그렇게 큰 흠도 아니죠, 이 정도는.”
“그래서?”
“전 딱 10년 뒤에 청담 선영. 아니, 청담 클리오. 최소 더블 이상 봅니다.”
“더블…… 이라고? 그럼 26억?!”
“솔직히 30억까지도 보니까, 저는 걱정 않으셔도 돼요.”
“미친…….”
우진은 예측처럼 얘기했지만, 원래 이곳에 지어졌던 청담 아르티아 리버뷰 30평대의 가격이 2020년에 30억이었던 건 사실이다.
그러니까 우진은, 단지 알고 있는 사실을 얘기한 것뿐이다.
‘천웅에서 내 설계로 클리오 브랜드 달고 시공하게 되면, 아르티아보다 더 고급화 설계로 들어가니까……. 30억보다도 더 치고 올라가도 전혀 이상하지 않지.’
미래에 우진과 WJ 스튜디오의 유동자금이 어떨지는 알 수 없지만, 어지간하면 10년도 충분히 들고 갈 만한 투자처.
하지만 우진과 달리 미래를 모르는 경완은 그의 호언장담에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고.
그런 그를 향해 우진이 몇 마디를 덧붙였다.
“물론 제가 드린 이 얘기는 그냥 부가적인 옵션 정도로만 생각해 주시면 됩니다.”
경완은 여전히 혼미한 표정이었지만, 우진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일단 천웅에서는 공사비 증가분을 부담해서라도 수주전을 따내고 청담동 한복판에 클리오 브랜드를 박는다는 생각으로……. 제가 제안 드린 안을 도급계약서에 넣으시면 되는 거죠.”
잠시 동안 이어진 침묵.
생각에 잠긴 경완은 우진의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곱씹고 있었고, 우진은 그의 고민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경완이 생각하기에 이것은, 너무도 파격적인 제안이면서, 그와 동시에 꽤나 솔깃한 제안이었다.
‘그래. 공사비를 그냥 우리가 부담해 버리는 것보단, 차라리 분양가를 올리고 미분양분을 책임지는 형태로 비용을 부담하는 게 훨씬 더 나은 선택지가 되겠지. 어쩌면 대표님까지 설득해볼 수 있을지도…….’
우진이 미분양분을 열 채 이상 가져간다고 했던 것은, 그냥 그만큼 확신이 있다고 강조하기 위한 빈말 정도로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을 진담으로 받아들이기엔, 너무 미친 소리 같았으니 말이다.
생각을 마친 경완의 입이 다시 천천히 열렸다.
“후우, 좋아. 오늘 서우진이 부른 건, 역시 잘한 선택이었군.”
“대충 계산 끝나셨나 봅니다?”
“어느 정도 가다가 보여.”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제가 그렇게 허황된 사람은 아니거든요. 하하.”
“허황된 지 어떤지는 모르겠고, 확실한 건 하나 있어.”
“그게 뭔데요?”
“네가 미친놈이라는 거.”
“하하하.”
우진은 그 뒤에도 윗선에 어필할 만한 조언들을 몇 가지 더 첨가해 주었고, 경완은 그것들을 꼼꼼히 정리하여 노트에 메모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귀가를 위해 바깥으로 나왔을 때.
시간은 이미 자정에 가까운 늦은 밤이었다.
“으, 벌써 열두 시네.”
우진의 중얼거림에, 경완도 한숨을 푹 쉬었다.
“마누라한테 잔소리 좀 듣겠군.”
“곧 임원 진급한다고 떡밥 좀 잘 뿌려 보세요. 그럼 형수님도 용서해 주실 겁니다.”
“크크, 스물두 살짜리가 내 와이프한테 형수님이라고 하니까 뭔가 웃긴 데?”
“그럼 사모님이라고 불러드립니까?”
사모님이라는 우진의 말에, 경완이 구토하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야, 징그럽다. 그냥 형수라고 해라.”
“흐흐, 거 보십쇼.”
“네가 진짜 스물둘이면 사모님 해도 괜찮은데, 그게 아니잖아.”
“아니긴 뭐가 아닙니까? 저 스물둘 맞잖아요!”
“아무튼 아니야.”
“민증 또 까야 됩니까?”
“민증 위조해서 들고 다니는 거. 그거 불법이라고 했냐, 안 했냐, 서우진.”
“하, 이 아저씨 모시고 동사무소라도 한 번 가야 하나…….”
우진과 경완은 마지막까지 유쾌하게 웃으며 헤어졌다.
경완을 먼저 보내고 차에 시동을 건 우진은, 한층 가벼워진 표정으로 액셀을 밟기 시작했다.
부르릉-
밤이 늦어서 그런지 도로에는 아무도 없었고, 덕분에 우진은 개포동 집까지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휴우, 오늘은 잠도 잘 안 올 것 같은데…….’
경완에게 들은 얘기대로라면, 내일이면 공모에 대한 결과가 거의 확정적으로 나올 것이다.
천웅건설의 대표이사 천종걸은 지지부진 시간을 끄는 성격이 아니라고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내일 결과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WJ 스튜디오의 2011년이 달라질 테니, 우진의 입장에서는 두근거리는 게 너무 당연한 일.
“다녀왔습니다.”
“우진이 왔냐.”
“네, 엄마.”
“오늘은 또 왜 이렇게 늦었어?”
“미팅이 좀 있어서요.”
“그래, 고생했다. 얼른 씻고 들어가 자거라.”
“엄마도 얼른 주무세요.”
“오냐.”
어머니께 인사한 뒤 자기 전 샤워를 하는 동안에도 우진의 머릿속은 청담 선영에 대한 생각으로 복잡했고.
‘공모 결과도 결과인데, 수주전도 진짜 박 터지겠네.’
쏴아아-
‘만약 공모에서 떨어지면 바로 다음 프로젝트를 준비해야겠지? 사업장 여기저기 제안서 돌릴 준비라도 해야 하나…….’
그렇게 오만 가지 생각에 빠져 있던 우진은, 결국 침대에 누워서도 새벽까지 잠들지 못했다.
“흐아아암…….”
하여 우진이 결국 잠든 시간은, 동이 트기 직전인 새벽 네 시.
그나마 다행인 건, 수요일 오전 일정이 딱히 잡혀있지 않다는 부분이었다.
짹- 째잭-!
그래서 아침 새가 지저귀고 해가 중천에 떠오르도록, 우진은 침대에 누워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알람도 싹 다 꺼놓고 워낙 곤히 잠들어 있다 보니, 어머니 주희도 그를 깨우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우진이 그렇게 늦잠에 빠져 있는 사이.
연달아 울리는 짧은 진동과 함께, 우진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하기 시작했다.
위잉-!
그 메시지의 발신인은 다음과 같았으며.
[발신자 : 박경완 부장님]
메시지에 담긴 내용은, 우진이 그렇게 간절히 바라던 바로 그 내용이었다.
[서우진, 준비해라. 11월 한 달, 나랑 한 번 제대로 갈려보자. (AM 10:09)]
[내가 이렇게까지 해줬는데, 수주전 못 따면 알지?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인마. (AM 10:12)]
[야, 서대표! 뭐야, 잠수 탄 건 아니지? (AM 11:41)]
[너 잠수타면, 학교로 찾아간다? (AM 11:45)]
하지만 경완의 메시지가 다섯 통이 넘게 쌓일 때까지, 우진은 세상모르는 표정으로 곤히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