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두 번째 방송
을지로 목공방에서 시작된 오늘의 촬영은, 오전 열한 시쯤부터 시작됐었다.
그리고 지금 공방의 벽걸이 시계가 가리키고 있는 시간은, 그로부터 정확히 열 시간 뒤인 저녁 아홉 시.
그 열 시간 사이.
출연진들과 제작진은 전부 녹초가 되어 버렸다.
오늘 촬영은 단순히 열 시간 촬영이 아닌, 저녁 식사 한 시간을 제외하면 쉴 틈이 없던 강행군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진은 원래 계획했던 분량의 절반도 채 끝내지 못한 상황이었다.
‘아니, 절반은커녕……. 이제 하나 완성인가?’
오늘 완성된 그 하나의 가구는, 재엽의 서재에 들어가게 될 책장이었다.
따로 장식이 들어가지 않는 깔끔한 격자 구조의, 모던하고 심플한 디자인으로 설계된 나무책장.
만약 우진이 혼자 빠르게 제작했다면.
아마 서너 시간이면 충분히 만들었을 가구였다.
하지만 출연진들에게 모든 과정을 가르치며 작업하다 보니, 하루 종일 이 책장 하나만 만들게 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도 뭐. 결과적으론 나쁘지 않네.’
처음 예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전개였지만, 우진은 진심으로 만족했다.
시간이 오래 걸린 대신, 말 그대로 모두의 정성이 들어갔으니 말이다.
촬영을 위한 보여주기식 작업이 아닌, 진짜 팀원들의 피땀으로 만들어진 가구가 탄생한 것.
때문에 마지막 피스까지 끼워 넣은 순간, 출연진들은 전부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항상 촐싹거리던 재엽이 기름기 싹 빠진 담백한 어조로 탄성을 터뜨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이야……. 이걸 정말 우리가 만들었다고?”
재엽의 감탄사에 이어, 그렁그렁한 눈망울의 수하와 리아가 연달아 입을 열기 시작했다.
“와, 진짜 예쁘다.”
“우리 집에도 하나 가져다 놓고 싶어.”
제 손으로 완성해 낸 가구의 모습이 적잖이 마음에 들었는지, 책장의 자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두 사람.
“언니. 우리 시간 날 때 같이, 사이즈 작은 책장이라도 만들어서 하나씩 소장할까?”
“진짜. 그럴까? 솔직히 사는 것보다 더 예쁜 것 같아.”
황홀한 표정으로 연신 감탄하는 두 사람을 보며, 우진은 속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 보면, 진짜 순수한 누나들이라니까.’
저렇게 진심 어린 표정으로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닳고 닳은 목수 입장에선 귀엽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게다가 말이 누나지, 회귀 이전의 기억들을 고스란히 갖고있는 우진에겐 그냥 귀여운 동생들처럼 보일 때도 많은 수하와 리아였다.
‘하긴. 뭐, 하드 우드로 깔끔하게 만든 이 정도 크기의 책장이면……. 시중에서 구하려 해도 일이백만 원 정도는 족히 줘야 할 수준이지.’
시선을 다시 책장으로 돌린 우진은, 잠시 흐뭇한 표정이 되었다.
목공 입문자들의 손때가 여기저기 묻긴 했지만, 그래도 마감 작업은 거의 숙련공인 우진의 손을 탔다.
객관적으로 봐도 충분히 고급스럽고 훌륭한 가구가 맞았다.
‘여기 들어간 멀바우 집성목 가격이, 다 합해봐야 이십만 원도 안 되는 수준이니까…….’
우진의 인건비를 생각하면 별로 남는 장사는 아니었지만, <우리 집에 왜 왔니>의 인테리어 예산 세이브 차원에서는 아주 훌륭한 성과.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친 우진은 씨익 웃었고.
제작진이 책장 구석구석을 카메라에 영상으로 담는 동안, 출연진들은 잠시 뒤로 빠져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촬영이 어느 정도 일단락되자, 재엽이 먼저 일어서며 입을 열었다.
“자, PD님. 그럼 오늘 촬영은 여기서 마무리합니까?”
재엽의 물음에, 공PD가 짓궂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오늘 가구 다섯 개 다 만드는 거 아니었어요?”
이번에는 수하와 리아가 동시에 소리쳤다.
“네?”
“뭐라고요?”
생각지도 못했던 피디의 말에, 진심으로 기겁한 표정.
아무리 촬영이 즐거워도, 그것은 움직일 힘이 남아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책장을 완성하자마자 긴장이 탁 풀린 출연진들은, 손 하나 까딱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하, 농담이에요. 여기서 촬영 더 하자고 하면, 아마 촬영 감독님부터 보이콧 선언하실걸요.”
그렇지 않아도 따가운 촬영팀의 눈초리를 확인한 공PD가,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나머지 촬영을 어떻게 할지는, 내일 회의에서 영상 보면서 결정합니다.”
“와아앗……!”
“수고하셨습니다!”
그 어느 때 보다 열정적이었던 재엽팀의 촬영은, 오늘도 그렇게 순조로이 마무리되었고.
“시간이 늦었으니까, 회식은 올 사람만 오세요!”
그날 회식에는, 모든 출연진과 제작진이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참석하였다.
* * *
하루 종일 톱밥 날리는 공방에 박혀있던 수요일이 지나고.
목요일, 금요일이 지나는 것까지도,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학교 수업과 업체 미팅. 그리고 남는 시간에는 청담동 재건축 설계에 온 시간을 쏟다 보니.
정말 시간이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 가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일에 파묻힌 채 주간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할 일이 태산처럼 쌓여있는 우진은, 토요일 오전에도 사무실에 출석 도장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사업을 한다는 건, 본래 삶과 일의 경계가 사라짐을 의미하는 것.
오늘도 우진이 작업 중인 건, 청담동 재건축 디자인 제안을 위한 설계도였다.
“후우. 오늘은 초안 작업 무조건 끝내야지.”
우진은 손으로 그려 둔 도면들을 책상에 펼쳐 둔 채, 쉴 새 없이 마우스를 움직이고 키보드를 두들겼다.
무아지경 속에서 우진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캐드 안에는 새하얀 선들이 빼곡히 들어차고 있었다.
스케치에 가깝던 그림들을, 제도 프로그램인 캐드를 통해 구체적인 도면으로 만들어 내는 작업.
사실 도면을 그리는 것은, 어느 정도 숙련도만 생기면 단순 노가다 작업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우진은 있는 도면을 그냥 베끼는 게 아니었기에, 완전히 기계처럼 노가다를 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종이 위에 러프하게 따 놓은 공간구획들을, 실제 시공이 가능할 정도로 구체화해야 했으니까.
대략적으로 그려뒀을 땐 괜찮은 것 같다가도, 막상 구체적으로 풀어두면 어색할 때가 많은 것이 설계도면이었다.
‘분명 청담동 조합원들이라면, 특화설계에 매력을 느낄 거야. 마포 클리오에서 성공했던 스카이브릿지나 커튼월 룩을……. 클리오 브랜드의 시그니쳐 디자인으로 발전시켜야 해.’
아파트 단지 하나를 온전히 설계하기 위해서는, 백 장 단위가 훌쩍 넘는 막대한 양의 도면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 모든 도면을 우진이 전부 작업하는 것은 아니었다.
특화설계가 들어가는 부분과, 전반적인 단지 배치, 그리고 컨셉 디자인 등.
가장 핵심적인 부분 위주로 우진이 작업한 뒤, 설계팀이 달라붙어서 완성 시키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 프로젝트에 한해서는, 이 중간단계부터 천웅과 협업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원래대로라면 공모에 참가하는 WJ 스튜디오의 인력만으로 1차 설계까지는 전부 완성해서 제출하는 게 맞았지만.
아직 인프라가 부족한 WJ 스튜디오를 위해, 박경완이 조금 배려를 해 준 것이다.
물론 우진이 경완에게 보여줬던 컨셉 디자인 안이 아주 훌륭했기에 가능한 배려였지만 말이다.
‘으, 진짜……. 다음 달 내로는 설계전문팀을 한 팀 꾸려야겠어. 혼자 다 하려니까 죽겠네.’
우진은 지난 반년 동안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절실히 깨달은 게 몇 가지 있었다.
회사가 굴러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많다는 사실과.
그 모든 것을 혼자 다 하려 했다가는, 회사가 굴러가기 전에 과로사로 대표부터 사망할 수 있겠다는 사실이다.
‘사람 잘 쓰는 것도 능력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제 확실히 알겠어.’
어쨌든 속으로는 구시렁거리면서도, 우진의 손은 미친 듯이 키보드 위에서 춤추고 있었다.
어쨌든 인력이 부족한 건 지금 당장 어쩔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고, 우진의 노동력으로 때워야 했으니 말이다.
하여 그렇게 점심마저 거르면서 일한 끝에.
대략 오후 네 시 정도가 됐을 즈음, 우진은 목표했던 분량을 완성할 수 있었다.
“됐다! 이 정도면……!”
사실은 목요일이나 금요일 안에 다 하려고 했던 분량을 토요일 한나절까지 들여서 끝낸 것이지만.
아무럼 어떠랴.
일단 만족스럽게 마무리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다.
시계를 힐끔 본 우진이,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여유는 좀 있고…….’
도면 파일을 깔끔하게 정리해 저장해 둔 우진은, 코트를 입고 가방을 메었다.
그가 이렇게 서둘러 사무실을 나서는 이유는, 저녁 약속이 있기 때문이었다.
덜컹-!
대표실 문을 열고 나간 우진은, 홀로 사무실에 앉아있는 진태를 힐끔 보았다.
진태도 다음 주 초에 있는 미팅 건 때문인지, 토요일임에도 출근해 있었다.
“형, 퇴근 안 해?”
“제안서 다 써야 퇴근하지.”
“나 먼저 간다, 그럼.”
“그래, 고생했다.”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인 우진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다가 잠깐 멈췄다.
그리고 다시 진태를 돌아보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형, 일요일엔 나 찾지 마!”
“야. 그거 내가 할 소리야 인마.”
“무튼. 내일 하루는 푹 쉬고, 충전해서 월요일에 출근하자고.”
“제발, 그러자. 대표님.”
“그럼 이제 진짜 간다!”
후다닥 사무실을 나선 우진은, 곧바로 주차장으로 향했다.
오늘 저녁 약속은 중요한 사람과의 약속이었다.
어쩌면 우진에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인지도 모르는 사람.
‘지금 출발하면 시간 딱 맞겠지?’
오늘은 오랜만에, 어머니 이주희와의 저녁 외식약속이 잡혀있는 날이었던 것이다.
“영동대로가 좀 막힐 것 같긴 한데…….”
차에 탄 우진은, 코트 주머니에 넣어뒀던 종이봉투를 꺼내어 대시보드 위에 올려두었다.
그것은 얼마 전, 강석중으로부터 받은 고급 외식 쿠폰이었다.
[우진이 너, 여자친구는 있지?]
[왜 그렇게 당연하다는 듯 얘기하시는 건데요?]
[뭐야, 파릇파릇한 대학교 1학년이 여자친구도 안 사귀고 지금까지 뭐 했어?]
[그러게요…….]
[너희 과 미대니까, 여자도 엄청 많을 것 아냐.]
[여자는 많아도 그 중에 제 여친은 없습니다.]
[흠. 그럼 이 쿠폰은 아우에게 쓸모가 없겠군.]
[……! 뭔데요 형님?]
석중은 무려 대한민국 요식업계 탑클래스 대기업인 NA그룹의 재벌 3세다.
NA그룹에는 프리미엄 외식 브랜드도 많았고.
때문에 그가 우진에게 준 것은, 얼마 전 NA그룹에서 런칭한 고급 한식 레스토랑 브랜드의 할인쿠폰.
할인율이 무려 85%나 되는 특별쿠폰이었기 때문에, 우진은 그것을 냉큼 받아 가져왔었다.
[여친도 없다며, 누구랑 먹으려고.]
[어머니 모시고 갈 겁니다.]
[오……! 우리 아우님 효자였잖아?]
쿠폰을 다시 한번 확인한 우진은, 더욱 기분 좋은 표정이 되었다.
원래 같은 밥을 먹어도 싸게 먹으면, 맛도 더 좋고 기분도 더 좋은 법이다.
부르릉-
어머니와 맛있는 식사를 할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우진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액셀을 밟았다.
우진의 우려와 달리, 차는 그리 밀리지 않았다.
저녁 시간이라기엔 조금 애매한 시간대라 그런지, 강남으로 진입하는 구간도 나름 수월하게 통과한 것이다.
덕분에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우진은, 상가에 차를 대고 어머니의 수제비 칼국수 집으로 걸어 올라갔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