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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프린트-64화 (64/315)

64화

칼을 뽑아 들 때에는

기태는 아주 미칠 노릇이었다.

상황이 꼬여도 이렇게까지 꼬일 수는 없는 것이다.

정확히 한 시간 전만 해도, 기태는 서우진을 끌어내리고 대상을 탈환해 올 생각에 기분이 아주 좋았었다.

하지만 SPDC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 때문에, 순식간에 상황이 지옥으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얄미운 1학년 서우진은, 지금 자신을 벌레 보듯 쳐다보고 있었다.

기태는 그를 향해 당장이라도 욕설을 퍼붓고 싶었지만, 지금은 서우진이 중요한 상황이 아니다.

일단 최우수상이 박탈당할 위기부터,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으니까.

“오해야, 우진아. 네가 그랬던 것처럼, 여기도 뭔가 오해가 있었던 거야.”

김기태는 극도의 인내심을 발휘하며 심호흡을 하였고.

그런 그와 눈이 마주친 우진은, 어떤 의미에선 조금 감탄하였다.

‘와, 이 상황에서 욕을 안 하고 버티네?’

우진은 기태가 이성을 잃어버릴 줄 알았다.

그래서 미친 듯이 욕을 한 뒤, 자신의 멱살이라도 잡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기태는 어떻게든 감정을 억누르며,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이건 우진이 원한 그림이 아니다.

해서, 기태를 조금 더 긁어보기로 하였다.

“뭐, 선배가 그러셨던 것처럼, 저도 별로 믿겨지진 않네요.”

“……!”

마치 말장난이라도 하듯 똑같이 되돌려주는 우진을 보며, 기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혹시 선배가 SPDC에 제 작품 투서 넣으신 거 아니에요? 대충 돌아가는 거 보니까, 저 끌어 내리고 대상 받고 싶으셨던 모양인데…….”

“야.”

“학회장이, 쪽팔리지도 않으세요? 신입생한테.”

“야, 서우진!”

결국 화를 참지 못한 김기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김기태의 입에서는, 드디어 서우진이 원했던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너야말로 양심은 있냐?”

“양심이요?”

“그래, 새끼야. 너 어디 빽이라도 있어? 너 치팅한 증거자료 내가 다 봤는데, 어떻게 이렇게 억울한 척을 할 수가 있냐.”

부들부들 떠는 김기태를 보며, 우진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박준민 교수는 옆방에 있지만, 문이 살짝 열려있었고. 때문에 대화 내용은 전부 다 듣고 있을 것이었다.

우진의 입이 다시 열렸다.

“제가 치팅한 증거자료를 봤다고요? 그게 뭔데요?”

일부러 살짝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며, 원하는 대답을 끌어내는 우진.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김기태는, 우진의 의도를 피해갈 수 없었다.

기태는 이를 악문 채, 씹어뱉듯 입을 열었다.

“WJ 스튜디오.”

“……?”

“이 뻔뻔한 새끼……. 설마 업체 이름까지 듣고도, 모른다고 발뺌할 셈이냐?”

우진은 웃었다.

진심으로 통쾌하게 웃었다.

“하하, 하하하!”

여기선 연기할 필요조차 없었다.

이제 우진이 그렸던 모든 그림이, 깔끔하게 완성되었다.

“하하. 이제야 이해가 가네.”

“너 미쳤냐? 왜 웃어?”

“어이없어서 웃습니다, 어이없어서.”

“뭐?”

부들부들 떠는 김기태를 한 번 더 비웃어 준 우진은, 품속에 가지고 다니던 자신의 명함 한 장을 슬쩍 꺼내어 탁자 위에 던졌다.

툭-

이어서 김기태를 향해, 우진의 입이 다시 열렸다.

“WJ 스튜디오. 그 회사를 제가 모를 리가 없죠.”

“……?”

“제 건데.”

김기태의 시선이, 자연스레 우진의 명함을 향해 꽂혔다.

[WJ Studio. CEO 서우진]

이 비현실적인 상황에 순간 사고가 정지한 김기태는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고.

우진은 한 번 더 그를 비웃어주었다.

“WJ 스튜디오에 WJ가 뭐겠습니까, 선배. 하……. 모형에 아예 대문짝만하게 박아놓을걸 그랬나.”

김기태는 아직도 정신 못 차린 표정으로 우진의 명함을 응시하고 있었고, 우진은 그런 기태를 더 비웃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더 이어질 수 없었다.

통화를 끝낸 박준민이, 다시 교수실로 들어왔으니 말이다.

“김기태, 넌 여기 좀 남고. 우진이는 강의실 가 있어.”

“예, 교수님.”

그것으로 우진은 바랬던 결과와 명분까지, 모두 손에 넣을 수 있었다.

* * *

그날 이후.

우진은 단 한 번도 김기태와 관련된 이야기를 주변에 꺼낸 적이 없었다.

물론 석현과 우진의 합작을 옆에서 지켜본 제이든은, 속 내용을 알고 있었고.

“우진은 쓸데없이 착해.”

“뭐?”

“왜 소문내지 못하게 막는 거야? 그런 Bitch는 모두에게 다 알려져야 한다고.”

같은 팀인 소연 또한 알게 될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와, 그 선배.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시원하게 말해도 돼, 소연.”

“쓰레기네. 진짜.”

“맙소사. 할 수 있는 최악의 욕이 고작 Trash였다니.”

“대충 백만 가지 정도 욕이 생각났는데, 그냥 삼킨 거야, 제이든.”

“왜?”

“이미 끝난 일에, 의미 없는 감정 소모는 하고 싶지 않거든.”

하지만 제이든의 생각과 다르게, 우진이 그의 입단속을 시킨 이유는 착해서가 아니었다.

어차피 소문이야 필연적으로 퍼질 수밖에 없을 것이고, 우진을 비롯한 팀원들이 가만히 있을수록 얻는 게 더 많기 때문이었으니까.

“우진 오빠. 선빈이한테 들었는데, 학회장 선배 진짜 개 쓰레기라며?”

“뭐, 신입생한테 대상 뺏긴 게 억울했나 보지.”

“와……. 오빠 진짜 대인배다.”

우진 개인적으로는, 학과 내의 인지도와 민심을 얻었으며.

“진짜, 기태 선배 이정도면 학회장 그만해야 하는 거 아냐?”

“걔, 명성건설 상무이사 아들이었다고? 알만하다 진짜. 알만해.”

김기태가 까이면 까일수록, 우진의 실력은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그 1학년은 그럼, 김기태가 명성건설에 외주 맡긴 것도 누르고 대상 받은 거야?”

“그렇다니까?”

“와, 신입생이 어떻게 그러지?”

“1학년 애들한테 좀 들었는데, 학교 들어오기 전에 현장에서 일 좀 했나 보더라고.”

“아, 정말?”

“나이도 3학년이랑 동갑이잖아.”

“어쨌든 대단하다.”

“그러니까 말이야.”

김기태는 침묵했고,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하여 SPDC 공모전의 최종 결과가 확정됨과 함께, 소정의 상금도 지급되었으며.

[대상 – 서우진 외 2명]

[상금 – 30,000,000\]

드디어 SPDC 홈페이지에, 대상 수상작품에 대한 설계 입찰 공시가 개재되었다.

그리고 우진은, 다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 * *

“야, 축하한다, 서우진이.”

“뭘요?”

“뭐겠냐? 입찰 공시 뜬 거 봤지.”

“부장님이 SPDC도 알아요?”

“당근이지. 재작년인가? 아니 3년 전? 무튼 그때 대상 작품, 홍대 쪽에 지어진 복합문화공간 있잖아.”

“네, 뭔지 알 것 같아요.”

“그거 천웅에서 입찰받아서 시공했었어. 내가 직접 관리한 현장은 아니었지만 말이야.”

우진은 오랜만에 종각역에 왔다.

퇴근 시간 이후, 박경완과 한잔하기 위해서 말이다.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는 건 무척이나 오랜만이었고, 그래서 둘은 할 얘기가 많았다.

“아, 천웅에서도 SPDC 당선작을 입찰받은 적이 있구나.”

“후후.”

“그나저나 당근이 뭐에요 당근이. 아재같이…….”

“아재니까 아재 같지. 쓸데없는 태클 걸지 말고, 술이나 한잔 받아. 짜샤.”

우진과 잔을 부딪친 경완은 말없이 웃으며 술잔을 홀짝였고, 그런 그를 잠시 보던 우진은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그런데 부장님.”

“왜?”

“천웅같은 대형 건설사들이, 이런 작은 공모전 입찰에는 왜 참여하는 거예요?”

“으음?”

“사실 남는 것도 거의 없잖아요. 요즘 그 정도로 일거리가 없나……?”

우진의 물음에 경완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말처럼 공모전 당선작 시공은 남는 게 별로 없는 장사였지만, 그건 단순히 물질적인 부분에 한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우진은 알지 못하는, 약간의 이해관계가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돈이야 안 남지. 진짜 부스러기도 안 남아.”

“그런데요?”

“대신 무형적인 이득이 좀 남거든.”

“무형적이라면……?”

“이를테면 서울시와의 관계개선이라던가, 대외적인 건설사 인지도라던가.”

“아……!”

SPDC는 사설 공모전이 아니다.

서울시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는, 국가 차원에서 밀어주는 공모전이었고.

때문에 공공성과 공익성이라는 비시장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고작 학부생의 디자인과 설계임에도 불구하고, 대형 건설사들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흐음. 이러면 얘기를 꺼내기 더 쉽겠는데.’

우진이 오늘 경완을 만난 이유는, 그저 오랜만에 얼굴을 보기 위함도 있었지만. 당연히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SPDC는 우진의 디자이너로서 데뷔나 다름없는 첫 번째 설계나 다름없었고.

그런 만큼 우진은 제대로 된 건축을 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박경완의 도움이 조금 필요했다.

“그럼 혹시 올해는, 천웅에서 입찰 안 하나요?”

기름기 좔좔 흐르는 방어회를 한 점 집어 든 우진이 경완을 향해 조심스레 물었고.

경완은 껄껄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우진의 속내를 어느 정도 들여다봤기 때문이다.

“왜, 우리가 입찰했으면 좋겠어?”

“가능하다면요.”

경완은 젓가락에 들고 있던 단무지를 우걱우걱 씹어먹은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오늘 오전에, 입찰 관련 얘기 나왔었어.”

“……!”

“그런데 내가, 반대했었지.”

“아 왜요!”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우진의 탄성에, 박경완은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이 되었다.

“입찰 들어가는 것도 다 일이야 인마. 요즘 천웅 사업장도 넘쳐 흐르는데, SPDC 입찰까지 뛰어다니기엔 인력이 너무 부족했어.”

“하아…….”

한숨을 푹 쉬는 우진을 보며, 경완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SPDC 얘기 나왔던 오전 회의 땐, 내가 몰랐던 게 하나 있었더라고.”

“몰랐던 거요? 그게 뭔데요?”

“이번 SPDC 대상 수상작 설계자가 서우진이라는 사실. 정말 생각지도 못했지 뭐냐.”

사실 경완은 오늘 우진을 만나러 오기 전, 요양원 시공 입찰을 위해 상부에 올릴 기안을 이미 작성해 둔 상태였다.

다만 애늙은이 같은 우진을 놀려주기 위해, 이렇게 한 번 튕겨본 것이고 말이다.

‘흐흐, 귀여운 놈.’

오히려 경완은 오늘 이 자리에서, 우진에게 청탁(?) 비슷한 것을 할 생각이었다.

어쨌든 메인 설계자가 우진인 상황이니, 시공사 선정에 입김을 어느 정도 넣을 수 있을 테고.

편하게 SPDC 시공권을 따내고 싶었던 것이다.

“하, 부장님도 참. 오늘 조금 슬플 뻔했네.”

너스레를 떠는 우진을 향해, 박경완이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넌 알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이번 공사 규모가 역대 SPDC 설계 중엔 역대급으로 대규모야.”

“음, 조금 큰 줄은 알고 있었는데…….”

“공시 뜬 거 보니까, 지난해의 거의 다섯 배 규모더라고.”

“헐, 그 정도에요?……!”

“그래서 아마 이번 설계 입찰, 꽤나 치열할 거다. 설계나 디자인도 SPDC작품치고 꽤 고퀄로 알려졌고…….”

경완의 말에 우진은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보통 SPDC 대상 작품 설계는 입찰하는 건설사가 없어서 시공이 무산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적어도 그런 걱정은 할 일 없게 되었으니까.

그에 더해 자신의 설계가 높은 퀄리티로 알려졌다는 이야기까지 들었으니, 기분이 좋은 것은 당연하였다.

“어쨌든, 입찰해달란 소린, 우리 밀어주겠단 얘기지?”

씨익 웃으며 묻는 박경완을 보며, 우진은 한 방 먹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후우. 젠장. 이것저것 뜯어 먹었어야 하는데…….”

“천웅이 무슨 닭다리냐? 뜯어먹게.”

“뭐, 알겠어요. 도와주신 것도 많으니, 이번엔 특별히 천웅으로 밀어볼게요.”

“특별한 척하지 마, 짜샤. 어차피 우리랑 하는 게 너도 좋잖아.”

“네?”

“시공조율 과정에서 설계 바뀔까 봐 입찰해달라고 하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았냐.”

오늘만큼은 우진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있는 박경완이었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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