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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프린트-63화 (63/315)

63화

칼을 뽑아 들 때에는

우진의 계획은 치밀했다.

그의 목적은, 단순히 김기태를 짓밟는 것에서 끝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기하는 것조차, 처음부터 할 이유가 없었을 테고 말이다.

우진은 자신이 짜 놓은 이 판의 마지막에서, 오로지 억울한 누명을 쓴 신입생으로 남기를 원했다.

박준민은 물론 김기태조차도.

기태의 치팅에 관련된 투서를 SPDC에 보낸 사람이 우진이라는 사실을, 모르도록 만들 작정이었다.

김기태를 대놓고 적대시하여 시원하게 밟아주는 것도 재밌기는 하겠지만, 그러면 결국 흙탕물 싸움이 될 것이다.

우진이 투서를 보낸 것을 알게 된다면, 기태는 명성건설의 힘을 등에 업고 어떻게든 우진을 방해하기 위해 혈안이 될 테니까.

물론 그 흙탕물 싸움이 무서운 것은 아니었지만, 똥은 본래 더러워서 피하는 법.

우진이 보고 싶은 것은, 자신을 공격하는 존재가 누군지도 모른 채, 허공에 분풀이를 하며 몰락해가는 김기태의 모습이었다.

때문에 우진은 정말 억울한 표정으로, 김기태와 박준민을 번갈아 가며 보았다.

“그럴 리가요. 뭔가 오해가 있나 봅니다, 선배.”

김기태가 웃었다.

“오해? 웃기고 있네.”

하지만 우진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오해가 아니라면 뭐란 말입니까. 저는 결백한데, 증거가 있다니요.”

김기태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와, 이놈. 진짜 엄청 뻔뻔하네. 야, 잠시 후면 드러날 거짓말을, 그렇게 뻔뻔하게 하는 이유가 뭐냐?”

“잠시 후요?”

“그래. 곧 서울 디자인재단에서 전화가 올 거다. 교수님께서 네가 오기 전, SPDC쪽에 문의를 넣어 놨거든.”

“무슨 문의 말입니까?”

“주말에 네 부정행위에 대한 증거자료가 디자인재단으로 넘어갔어. 교수님은 우리 학교 지도교수 차원에서, 그 결과를 공유 요청 드린거고 말이지.”

박준민은 아무 말 없이 둘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기태, 저 녀석은 왜 필요 이상으로 흥분한 것 같지?’

처음 후배의 부정사실을 준민에게 전할 때만 해도, 분명 기태는 이런 태도가 아니었다.

후배의 대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있었는데, 너무 안타깝다는 듯한 선배의 태도.

하지만 지금 기태의 모습은, 그때와는 전혀 달랐다.

그는 우진에게 화를 내는 것을 넘어서, 약이라도 오른 듯한 모습이었으니까.

그리고 한 가지 더.

우진의 당당한 태도가 계속해서 이어지자, 슬슬 이쪽도 뭔가 이상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럼 정말 잘됐네요.”

“뭐?”

“선배 말씀대로라면, 잠시 후에 제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게 밝혀질 테니 말입니다.”

우진의 부정을 확신하는 입장에서, 그의 태도는 위화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쯤 되면 단순한 배짱으로 치부하기에는, 우진이 너무 여유로워 보였으니 말이다.

기태가 말하는 ‘증거’라는 것을 두 눈으로 본 적 없는 준민은 그 위화감을 더 크게 느끼고 있었고.

증거를 직접 확인한 기태조차도 조금씩 당황하기 시작하였다.

‘삼촌이 주신 증거는 틀릴 리가 없어. 대체 이 미친놈은 뭘 믿고 있는 거지?’

그리고 기태의 그런 당혹감을 눈치챈 우진은, 그를 조금 더 놀려주고 싶어졌다.

“교수님.”

우진이 부르자, 준민은 살짝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응?”

“그 SPDC에서 올 전화 말입니다. 혹시 언제쯤 올까요?”

우진은 아예 의자까지 쭉 당겨 앉으며, 넉살 좋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선배도 그렇고 교수님도 그렇고, 뭔가 크게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오해를 풀고 여기서 나가야 제가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기태는 아예 입이 쩍 벌어져 버렸고, 준민은 묘한 표정이 되었다.

이제 준민은 둘 중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그, 그래. 뭐 전화는 금방 올 거다. 담당자가 늦어도 30분 내로는 전화를 준다고 했으니까.”

우진이 기다리던 수업 시간은 이미 5분 정도가 지난 상황이었지만, 그건 전혀 상관없었다.

지금 그와 함께 있는 박준민 교수가, 우진의 월요일 전공 수업인 ‘기초제도’를 강의하는 교수였으니까.

우진은 자신의 태도로 인해 아예 말을 잃어버린 기태를 향해, 능청스레 말하였다.

“선배. 시간 조금 있으시죠?”

“뭐?”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선배님 오해까지 말끔하게 풀어드려야, 제가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그래요.”

“……!”

“생각해보니 선배가 이번 공모전 2등이셨잖아요? 제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오해하셨다면, 충분히 기분 나쁘셨을 수도 있겠더라고요.”

기태는 말을 잃은 것을 넘어서, 책상 밑에 숨긴 주먹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주먹을 휘두르고 싶은 수준으로 화가 치솟았지만, 교수님 앞에서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기태의 반응이 격하면 격할수록, 우진은 더욱 흥이 날 뿐이었다.

“뭐, 제 수상이 취소된다면 대상을 받으셨을 테니, 기대도 좀 하셨을지 모르겠지만……. 그건 좀 아쉽게 됐네요. 이건 제가 계속 말했듯, 약간의 오해였을 뿐일 테니까요.”

“야, 서우진……!”

우진의 연속된 비아냥(그것은 제3자가 보기에 전혀 그런 의도가 보이지 않는 담담한 어조였다.)에, 기태는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그는 본래 참을성이 그리 많은 타입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기태가 폭발하던 바로 그때.

위이잉-!

때마침 박준민 교수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하였고, 기태는 일어서려던 동작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래. 어차피 이 전화 한 통이면.

이 뻔뻔하고 쓰레기 같은 1학년을, 학교에서 완전히 매장시켜 버릴 수 있을 거다.

기태는 그렇게 생각하였다.

사실이 어떻든 말이다.

착-

우진과 기태를 한 번씩 응시한 박준민이, 휴대폰을 꺼내 통화버튼을 눌렀다.

준민은 이제 아예 이 상황에 흥미까지 느끼고 있었으며.

해서 통화가 연결된 휴대폰을 스피커 폰으로 바꾼 뒤, 그대로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우진과 기태의 시선은 모두 그 휴대폰을 향했고.

곧 스피커폰을 통해 흘러나온 SPDC 관계자의 목소리가 교수실에 울려 퍼지기 시작하였다.

[서울시 디자인재단 우인석입니다. 박준민 교수님 휴대폰 맞으시죠?]

“맞습니다.”

꿀꺽-

누군가의 침 삼키는 소리가 적막 속에 울려 퍼졌고, 우진은 그 소리가 기태의 것일 거라고 생각하였다.

[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사실 문의 주신 건은 이미 오전 일찍 결과가 나와 있던 부분이었는데요.]

“네, 담당자님.”

[비슷한 문제로 다른 건에 대한 조사가 시간이 조금 더 걸려서, 함께 말씀드리기 위해 전화가 조금 늦어졌습니다. 죄송합니다.]

스피커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에, 준민과 기태의 동공이 살짝 확대되었다.

지금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완벽히 이해한 것은, 여기에 우진 한 사람뿐이었다.

“비슷한 건이라면…….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이해가 잘…….”

준민의 물음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디자인재단 관계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교수님께서 저희 측에 문의 주신 것은, 이번에 대상을 수상한 ‘서우진’ 학생에 대한 건 맞죠?]

“그런데요?”

[일단 그 건에 대한 이야기부터 말씀드리면…….]

휴대폰을 응시하던 김기태는, 다시 한번 마른침을 집어삼켰다.

드디어 그가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저 두꺼운 낯짝이 완전히 구겨지는 것을 볼 수 있는, 바로 그 순간 말이다.

‘직접 담당자가 확인까지 해주면, 아무리 얼굴에 철판을 깔아도 더 이상 발뺌은 불가능하겠지.’

하지만 다음 순간.

김기태는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서우진 학생의 수상결과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겁니다.]

“오, 그게 정말입니까?”

[디자인이나 설계에는 당연히 아무 문제가 없었고, 증거자료가 제출된 건축모형에 대한 부분도, 본인의 작업이 맞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

SPDC의 관계자는, 기태가 생각지도 못했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말이야?’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상황으로 인해, 순간적으로 사고가 정지해버린 기태.

하지만 그의 충격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제부터 우진이 준비해 놓은, ‘진짜’가 남아있었으니까.

“확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담당자님.”

[아, 별말씀을요. 저는 심사관리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오전부터 계속 심란했었는데, 덕분에 한 시름 놓았습니다.”

기분 좋은 목소리로 얘기한 준민은, 우진을 슬쩍 응시하였다.

그의 눈빛에는, 의심에 대한 적지 않은 미안함과 그 이상의 기특함이 담겨있었다.

‘혼자의 힘으로 SPDC 대상을 가져온 신입생에게……. 칭찬이나 격려보다 의심을 먼저 줬다니.’

준민은 전화가 끝나는 대로, 우진과 좀 더 이야기를 나눠 볼 생각이었다.

사과도 사과지만, 대체 어떻게 그런 퀄리티의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는지가 몹시도 궁금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스피커폰에서 다시 담당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준민은 우진에 대한 생각을 더 이어갈 수 없었다.

[그런데 이거 어쩌죠, 교수님.]

“예?”

[우진 학생에 대한 심사 결과는 다행히 긍정적으로 해결됐지만, 다른 문제가 생겨서 말입니다.]

“무슨 문제 말입니까?”

[그 최우수상을 받은 학생 중에, K대 3학년 학생이 하나 있지 않습니까?]

“예, 있지요.”

[아무래도 그 학생의 최우수상 수상이, 취소되게 될 것 같습니다.]

“예에……?”

폭탄과도 같이 터져 나온 담당자의 발언에, 박준민 교수의 집무실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담당자가 말하는 그 3학년 학생은 바로 이 자리에 같이 있는 김기태였고.

이것은 우진과 관련된 통화내용보다도, 몇 배 이상 충격적인 것이었으니 말이다.

이미 몇 분 전부터 얼어있던 김기태는 아예 혼미해진 표정이었으며.

상황파악이 덜 된 박준민은 말까지 더듬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기태의 최우수상이 취소되다니요.”

하지만 담당자의 목소리가 기태의 충격 같은 것을 배려해줄 리 없었고.

스피커폰에서는 충격적인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사실 투서가 두 개가 왔습니다, 교수님.]

“예?”

[둘 다 익명의 제보자인 것으로 보아 동일인인 것 같은데……. 우진 학생과 마찬가지로 김기태 학생도 제보가 들어왔었거든요.]

“……!”

준민은 그저 듣고 있었고, 담당자의 말이 이어졌다.

[말씀드렸던 것처럼 우진 학생의 작품에 문제가 없다는 결과가 나온 것과 달리, 김기태 학생의 작품은 치팅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우선 건축모형은 전부 삼일A&C라는 업체에서 제작된 것이었고요, 실시설계도 명성건설의 도움을 받았더군요.]

[증거까지 너무 확실해서, 이건 빼도박도 할 수 없는 확실한 실격입니다, 교수님. 유감스럽군요.]

이 비현실적인 상황에, 박준민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분명히 처음 이 ‘투서’에 대한 제보를 자신에게 한 것이 바로 김기태이다.

그런데 그 김기태가 사실은 치팅의 장본인이었고, 완전히 실격처리가 될 정도로 치명적인 치팅을 했다니.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지도교수로서는 감조차 잡을 수 없던 것이다.

하지만 바로 옆에서 이 모든 내용을 들었던 김기태에 비하면, 박준민의 충격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방금 전, 심사위원의 목소리를 들은 기태는, 눈앞이 새카맣게 내려앉는 착각을 느꼈으니 말이다.

‘뭐? 내가 치팅이라고? 이게 무슨 개 같은 소리야?’

기태는 애초에, 자신의 부정에 대해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 명성건설의 도움을 받는 것은, 마치 숨 쉬듯 당연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명성건설 또한 그가 가진 인프라였고, 그 인프라 또한 기태 자신의 능력이었다.

한데 치팅이라니.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

‘어떤 새끼지? S대 쪽 짓인가? 아니면 W대? 대체 어떤 놈이……!’

분노에 가득 찬 기태가, 건너편에 앉아있는 서우진을 잠시 노려보았다.

혹시 익명의 제보자라는 사람이 이 일학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그건 너무 큰 비약이었다.

우진은 바로 오늘 아침까지도, 자신과 별달리 갈등했던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물론 투서를 누가 보냈던, 그것과 별개로 서우진은 너무 싫었지만 말이다.

으드득-!

기태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처음에는 분노였다.

하지만 조금씩 이성이 돌아올수록, 그 분노를 다시 잠식한 것은 저릿저릿한 공포였다.

지금까지 이 학교에서 쌓아 온, 모든 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공포.

‘뭔가 잘못됐어! 증거라니!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

만약 심사담당자의 말대로 자신의 최우수상이 실격 처리되면, 그 소문이 학과 내에 퍼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이 내용을 바로 앞에서 들은 우진이 입을 닫아줄 것 같지도 않았지만.

어차피 SPDC홈페이지에 최종고시되는 수상자 명단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학생들이 있을 테니까.

그렇게 되면 후배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학회장 김기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아마 이 사실을 아는 모두가, 기태를 손가락질하기 시작할 테니 말이다.

‘이, 일단 여기를 나가야겠어. 삼촌에게 전화부터 해 봐야…….’

혼비백산한 김기태는, 다리마저 휘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박준민 교수는 담당자와의 통화를 마무리하기 위해 스피커폰을 끄고 접견실로 넘어간 상태였고.

지금이 아니라면 박 교수의 추궁을 피해, 무사히 이 교수실을 나설 기회가 없을 테니 말이었다.

분노에 이어 공포.

그다음에 그에게 찾아온 것은, 현실도피.

하지만 그가 교수실에서 도망치도록, 우진이 그냥 놔둘 리는 없었다.

“선배. 그런 거였어요?”

“……?”

“본인이 그렇게 했으니, 저도 당연히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였군요?”

우진은 김기태를 비웃었다.

그가 연기하는 ‘억울한 신입생 서우진’의 입장에서도, 지금은 충분히 화가 날 만한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비웃음에 이은 경멸.

우진은 기태를 노골적으로 경멸하며, 그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을 꺼내 던졌다.

“선배, 실망이네요.”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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