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도약의 밑거름
원래 SPDC에선, 공모전 결과가 발표된 순간부터 출품자의 역할은 더 이상 없다.
학부생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공모전이다 보니, 그들에게 실제 시공과 관련된 어떤 롤(Role)을 주는 것은 비현실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시공조율 과정에서 설계가 변형되는 일도 비일비재했지만, 그것이 법적으로나 도의적으로나 어떤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설계야 당선자의 것이나, 건축을 시행하는 건축주는 서울시였고.
건축을 어떻게 진행하든, 그것은 서울시의 권한이었으니까.
그래서 우진은 발로 뛰고 있었다.
소연이나 제이든에게는 따로 말하지 않았지만, 디자인재단 관계자들과 미팅까지 잡아가며 어떻게든 관여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그리고 다행인 것은.
서울시 디자인재단의 이사장이자 SPDC와 관련된 모든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안정묵이, 그런 우진에게 호의적이라는 사실이었다.
“하하, 이거.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조금 당황했습니다, 서우진 학생.”
“제 요청에 응해주셔서,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사장님.”
“뭐, 저희야 어차피 누군가 해야 할 일을 설계자에게 직접 맡길 수 있게 된 것이니, 나쁠 것이 전혀 없지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한결 편해집니다.”
우진이 시공과정에서 맡게 된 것은, 현장의 시공감리였다.
건축물이 디자인과 설계대로 잘 지어지는지.
쉽게 말해 그것을 감시하는 일.
물론 감리라는 게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감리가 쉬워서 학생 신분인 우진에게 맡기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다만 이번 설계 심사과정에서 우진이 WJ 스튜디오의 대표라는 사실을 서울시에서 알게 되었고.
내부적으로도 우진이 충분히 감리를 할 수 있는 역량이 된다고 판단하였기에.
이렇게 우진의 요청이 먹혀들어 간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거기에 한 가지 더.
우진이 최종심사 날 보여준 프레젠테이션이 이사장 안정묵의 심금(?)을 울린 것 또한, 상황이 잘 풀리게 된 가장 큰 요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지난 10년간 학부생 수준에서 그런 프레젠테이션은 본 적이 없었지.’
안정묵은 이번 SPDC 당선작의 시공에, 정말 총력을 다 할 생각이었다.
공모전 당선작의 설계와 최대한 싱크로율이 높은 건축물을 완성해 내고, 그 건축물의 디자인이 수준급이라면.
SPDC의 입지는 더욱 공고해질 테니 말이다.
‘이번 당선작 아웃풋이 정말 제대로 나온다면……. 예산을 더 배정받아서 SPDC의 규모를 확 키울 수 있을지도 몰라.’
여하튼 그런 이유 때문에, 우진은 서울시로부터 생각 이상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계획대로 일들을 착착 진행 시킬 수 있었다.
심지어는 너무 일사천리로 일들이 진행되어 우진조차 불안할 수준.
‘이거 일이 너무 잘 풀리니까, 왠지 모르게 불안한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불안이 현실이 되지는 않았다.
이 모든 과정의 마침표나 다름없는 시공사 선정까지도, 결국 우진이 바라던 대로 깔끔하게 끝났으니 말이다.
[서우진 학생. 통화 가능하십니까?]
“예, 우 팀장님.”
[오늘 있던 시공사 입찰이, 방금 유찰되었습니다.]
전화 너머로 흘러나온 SPDC 관계자의 말에, 우진은 순간 덜컥 가슴이 내려앉을 수밖에 없었다.
최소 건설사 서너 곳 정도에서는 입찰을 들어올 줄 알았는데, ‘유찰’이라는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를 들었으니 말이다.
‘뭐야, 설마 천웅에서도……. 입찰을 들어오지 않은 건 아니겠지?’
시공사 선정이 유찰되는 경우는, 두 가지 경우뿐이다.
아무도 입찰에 들어오지 않았거나, 혹은 경쟁 입찰이 불가능하도록 한 곳에서만 입찰이 들어왔거나.
전자의 경우라면 우진이 지금까지 발로 뛴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갈 테고, 후자의 경우라면 우진에게는 최상의 상황이 될 것이다.
입찰을 들어온 그 한 곳이, 천웅건설이라면 말이다.
‘제발……!’
그리고 상황은, 우진이 원하는 최고의 시나리오로 흘러갔다.
“유찰이라면…….”
[입찰에 들어온 건설사가 한 곳입니다.]
“천웅인가요?”
[헛……! 그건 어떻게…….]
“그, 그냥 찍었습니다. 하하.”
저도 모르게 천웅이라는 말이 튀어나온 우진은, 방정맞은 자신의 입을 손으로 때렸다.
입찰결과를 우진이 미리 안 것처럼 알려진다면, 서울시로부터 괜한 의심의 눈초리를 받을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행히 우팀장은, 우진의 말실수를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여하튼 말씀하신 대로 입찰 들어온 건설사는 천웅 한 곳뿐이니, 저희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군요.]
“수의계약(隨意契約)이 가능한 거죠?”
[원래대로라면 2회 유찰까지 기다려야 하지만, 공모전 특성상 곧바로 수의계약이 진행될 겁니다.]
수의계약이란.
경쟁계약의 방식을 따르지 않고, 임의로 적당한 상대자를 선정하여 계약을 체결하는 방식이다.
쉽게 말해 서울시에서 다른 건설사들에 더 이상 기회를 줄 필요 없이, 천웅건설을 임의로 선택해도 되는 상황이 되었다는 뜻.
우진은 기쁜 나머지 두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혹시 모를 의심을 피하기 위해 좋은 티를 내지 않고 입을 열었다.
“천웅에서 제시한 조건이 어떻던가요?”
[나쁘지 않았습니다. 시공단가도 그렇고……. 괜찮은 조건이었죠.]
“저희에겐 선택권이 없으니……. 그냥 진행해야겠죠?”
[뭐, 그렇습니다. 저도 사실 정보 공유차원에서 전화 드린 것뿐……. 다른 선택지가 딱히 존재하지는 않거든요.]
“전화 주셔서 감사합니다, 팀장님.”
[별말씀을.]
전화를 끊은 우진은, 곧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양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만세!’
건설사끼리 입찰이 붙기 시작하면, 어떤 방법으로 천웅에 유리하게 상황을 핸들링할지 고민이 많았는데.
이렇게 상황이 깔끔하게 떨어져 버리니,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던 것이다.
‘뭐, 입찰 과정에서 힘 좀 썼다면서 생색을 내긴 힘들게 됐지만……. 그거야 사소한 부분이니까.’
천웅건설이 시공사로 확실하게 선정되었으니, 이제 설계가 크게 엎어지거나 하는 일은 없을 터.
하지만 모든 일이 잘 풀려 기분이 좋은 우진조차도,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할 비하인드 스토리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시공사 선정이 이렇게 완벽하게 풀릴 수 있었던 것이, 다름 아닌 명성건설 덕분이라는 사실이었다.
* * *
“뭐라고? 이 팀장. 자네 방금 뭐라고 했나?”
명성건설의 본사가 있는, 용산의 한 고층건물.
그곳에서 업무 중이던 윤영운은, 부하직원의 보고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휙 하고 돌렸다.
“바, 방금 말씀드린 대로……. 이번 SPDC에, 천웅건설이 단독으로 입찰했다고 합니다.”
“천웅이 입찰을 들어갔다고? 천웅이?”
“네, 실장님.”
이 팀장의 대답에, 윤영운은 손바닥으로 머리를 탁하고 짚었다.
“하……. 아이고 두야…….”
영운은 의자에 몸을 푹 하고 기댄 뒤,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지난 한 달 동안, 풀리는 일이 하나도 없는 그였다.
‘천웅에는 분명히 여력이 없었을 텐데…….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윤영운의 머릿속에, 바로 지난주에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생각지도 못했던, 김기태의 수상 취소가 결정되고 난 뒤 있었던 일들 말이다.
[삼촌…….]
[소식은 들었다. 안타깝게 됐더구나.]
[하아……. 어떤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외통수에 걸려버린 것 같아요.]
[…….]
[어쩌면 휴학을 하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이번 기회에 아버지께 유학이라도 보내달라고 할까 봐요,]
[네 아버지께서 해주시겠냐?]
[어떻게든, 싹싹 빌기라도 해 봐야죠.]
영운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올랐던 건.
시커멓게 죽은 표정으로 명성건설의 사무실을 찾아왔었던, 어깨 축 처진 김기태의 모습.
그날 사무실에 온 김기태는 이사 실에 불려 들어가 거의 한 시간 동안 욕을 먹었고.
이사 실에서 나온 기태의 두 눈은, 분에 차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삼촌.]
[그래, 기태야.]
[저, 한 번만 더 도와주세요.]
[이 삼촌이, 뭘 도와주면 되겠냐.]
[이번 SPDC 시공사 선정 건……. 유찰되게 부탁드려요.]
[……!]
SPDC의 당선작이 시공사 선정 단계에서 유찰되는 건,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번 요양원 건축 건은 역대 SPDC 사업장 중에 가장 사업성이 좋은 곳이었고.
하여 원래대로라면, 명성건설도 입찰에 들어가 볼 예정이었다.
기태가 이렇게 된 지금에야, 그럴 일이 절대로 없겠지만 말이다.
[기태야. 그건…….]
그래서 윤영운은 무척이나 난감하였다.
다른 시공사들이 입찰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다는 건, 생각보다 많은 로비와 사전작업이 필요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기태는 막무가내였고.
[어떻게든……! 무조건 해 주세요. 부탁이에요 삼촌.]
[…….]
[아버지께도 말씀드렸어요. 다른 건 제가 다 참아도, 서우진 그 새끼 설계가 시공되는 꼴은 절대 못 보겠어요. 제발요.]
영운은 그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기태가 이렇게까지 얘기하는 건, 이사님도 암묵적으로 허락하셨다는 얘긴데…….’
하여 영운은 그날부터, 빠르게 손을 쓰기 시작하였다.
입찰에 참가할 예정인 건설사들을 수소문해서 알아내고.
사업장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과, 타 건설사의 관계자들에 대한 로비를, 비밀리에 조용히 진행한 것이다.
다행인 건 그 과정에서, 딱히 불협화음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윤 실장님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입찰에 참가할 이유가 없겠지요.]
[흠. SPDC 사업장의 사업성이 좋아 봐야 얼마나 좋겠습니까? 안 좋은 소문이 도는 찝찝한 사업장에, 굳이 입찰 들어가진 않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실장님. 월요일에 출근하는 대로, 기안 올려보도록 하죠.]
회사 차원에서 약간의 출혈이 있긴 했지만, 김진명 이사의 묵인하에 로비는 깔끔히 진행되었다.
그리고 바로 오전까지만 해도, 윤영운은 확신하고 있었다.
어떤 건설사도 이번 SPDC의 시공사 입찰에는, 참여하지 않을 것임을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결국, 또 한 번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오고 말았다.
“기태가 부탁했던 대로, 유찰은 유찰이긴 한데…….”
영운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많은 건설사가 입찰에 들어간 가운데 경쟁적으로 시공사가 선정되는 것보다야 나은 상황이었다.
그림도 그림이지만, 경쟁이 붙는다면 우진의 설계가 더 좋은 조건으로 시공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씁쓸한 건 씁쓸한 거다.
그래도 결국 당선작의 시공을 막는 것은, 불가능해졌으니까.
‘천웅은 분명 SPDC에 관심이 없어 보였어.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스탠스를 바꾼 이유가 뭘까?’
천웅의 SPDC 입찰은, 실무자 선에서 이뤄진 결정이 아니다.
애초에 박경완이 임원진에게 다이렉트로 기안을 올려 통과시킨 결과물이었고.
때문에 외부에서 그 사실을 알 방법은 없었던 것이다.
영운은 답답한 상황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사실 그가 알지 못하는 것들 중에는, 이보다 훨씬 더 충격적인 진실도 있었다.
사실은 영운이 만들어준 이 상황이, 우진이 바라 마지않았던 최고의 상황이라는 것.
명성건설의 로비와 사전작업으로 인해 천웅건설의 경쟁 상대가 싹 제거되어 버렸으며.
우진을 향한 기태의 분노는, 졸지에 우진을 도와주는 결과를 만들어버린 것이다.
“후우……. 뭐,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수고했어 이 팀장. 그만 나가 봐.”
“알겠습니다, 실장님.”
하지만 때론, 진실을 모르는 게 정신건강에 이로운 상황도 있는 법이었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