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칼을 뽑아 들 때에는
선빈은 오늘, 조금 심란한 기분으로 학교에 왔다.
SPDC에서도 우수상이라는 훌륭한 성적을 거뒀으며, 그것은 평소에 칭찬에 인색한 아버지조차도 함박웃음을 지으실 정도의 훌륭한 성과였지만.
그럼에도 선빈이 심란한 데에는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다.
우선, SPDC가 끝난 뒤, 오늘 학교에 도착하기 전까지.
그러니까 주말 내내 심란했던 이유는, 같은 동기인 우진에게 비교조차 부끄러울 정도로 완벽히 밀려버렸다는 것이었다.
우수상을 받은 것은, 사실 선빈도 충분히 만족할 만한 성과다.
하지만 선빈은 우수상보다도, 우진을 이기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컸었다.
처음 O.T에서 우진과 함께 디자인의 밤을 치렀을 때부터.
그의 마음속 한쪽 구석에는, 열등감이라는 것이 조금씩 자리 잡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선빈은 우수상이 아니라 특선에서 성적이 그쳤더라도, 우진을 이겼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기뻤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 심란한 감정은, 학교에 와서 느낀 심란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었다.
바로 방금 전.
박준민 교수로부터,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를 들었으니 말이다.
“선빈아. 어쩌면 네가 받을 상, 우수상이 아니라 최우수상이 될 수도 있겠더라.”
“네? 교수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나도 바로 방금전에 기태에게 들은 이야긴데…….”
“3학년 학회장, 기태 선배요?”
“그래. 그 김기태.”
박준민은 씁쓸한 표정으로, 충격적인 말을 선빈에게 꺼내었다.
“네 동기 우진이 있잖냐. 이번에 대상을 받은.”
“예, 그런데 우진이 형이 왜요?”
“치팅을 했다는구나.”
“예에……?”
“모형부터 시작해서 설계까지, 싹 다 외부 설계사무소에 의뢰를 한 모양이야.”
“……!”
“기태 말에 의하면 이미 증거까지 충분히 있다는데…….”
“그, 그럴 리가요.”
“이미 주말에 서울시 디자인재단 측에, 투서가 들어갔을 거라고 하더구나.”
“기태 선배가요?”
“응. 건설업체 관계자 쪽에서 그 사실을 먼저 눈치채서, 투서를 보낸 모양이더라고.”
박준민 교수의 이야기처럼, 우진의 대상 자격이 박탈당한다면, 선빈이 받게 될 상은 달라진다.
이번 공모전에서 그의 순위는 정확히 5위.
최우수상을 받을 수 있는 순위에서, 한 계단 부족한 순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기쁨보다 훨씬 더 크게 다가오는 감정은, 혼란스러움일 수밖에 없었다.
선빈이 아는 우진은, 결코 그럴 형이 아니었으니까.
우진에게 열등감이 있다고 해서 그의 성품까지 의심할 정도로. 선빈의 그릇이 그렇게 좁지는 않았다.
‘물론 공모전에 가져왔던 작품은 내가 봐도 당황스러울 정도로 하이 퀄리티였지만…….’
정말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선빈 또한 우진이 출품한 작품의 수준을 믿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우진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넘어서, 지난 반년 동안 치열했던 그의 노력마저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 정도의 결과물이었으니 말이다.
우진이 최종심사에서 발표를 했을 땐, 그에게서 넘을 수 없는 어떤 벽까지 느꼈던 선빈이었다.
‘하지만 그런 수까지 안 쓰더라도, 충분히 입상할 실력이 있는 형인데……. 위험부담까지 감수해 가면서 치팅을 했을까?’
선빈은 우진이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가슴 한 켠에는 묘한 기대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받을 상이 최우수상으로 격상되는 것도 당연히 좋지만.
그것보다 이렇게 된다면, 우진을 이긴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선빈은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박준민 교수의 집무실 소파에 앉아있는 지금.
아무런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박준민 교수가 다시 그에게 말을 걸기 전까지는 말이다.
“선빈이 너, 우진이랑 친분이 좀 있지?”
“네. 그럭저럭 친한 편이죠.”
“아마 곧 기태가 우진이를 데리고 올 테니까, 오면 이야기 좀 잘 해봐.”
“무슨 얘기요 교수님?”
준민의 표정이 다시 씁쓸해졌다.
“일이 더 커지기 전에, SPDC 측에 먼저 자수하라고 말이야. 그렇게 한다면, 내가 학교 쪽은 잘 무마해 볼 생각이거든.”
“…….”
“너희는 이제 1학년 신입생이고, 얼마든지 이런 실수를 저지를 수 있는 나이니까.”
준민은 거의 확신하는 표정이었고, 그런 그의 생각을 선빈도 이해하였다.
만약 선빈도 우진의 진면목을 경험해본 적이 없었더라면, 준민과 똑같이 생각했을 테니 말이다.
그만큼 우진이 출품한 작품의 퀄리티는, 신입생의 것이라기에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그래서 선빈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딱히 다른 할 말이 있지도 않았으니까.
“예.”
선빈의 대답을 들은 준민은, 소파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교수실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어서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라이터를 집어 든 그는, 창가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고 깊게 빨아들였다.
“휴우.”
박준민 또한, 선빈 못지않게 무척이나 심란한 표정이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1학년 신입생의 대상 소식을 진심으로 기뻐하던 교수 중 한 명이었으니까.
‘학과장님껜 어떻게 보고를 올려야 할지…….’
그리고 그렇게 10여 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준민과 선빈. 두 사람만이 어색하게 남아있던 공간에.
드르륵-
그들이 기다리고 있던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 * *
박준민 교수의 집무실로 향하기 시작했을 때, 김기태와 우진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흐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먼저 입을 연 것은, 우진보다 조금 앞서 걷고 있던 김기태였다.
이동하는 동안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기엔, 그는 지금 입이 너무 근질거리던 상태였으니까.
“서우진. 지금 박 교수님 집무실에 왜 불려가는지, 혹시 알아?”
우진은 앞서가는 김기태의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한 가지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지금 그의 표정이, 제법 상기되었다는 사실 말이다.
‘눈엣가시 같던 후배를 치워버릴 생각에, 아주 신바람이 나셨겠지.’
굳이 김기태의 속에 들어가 보지 않아도, 우진은 지금 그의 기분을 알 수 있었다.
감히 치팅까지 해가며 선배의 대상 입상을 방해한, 재수 없는 후배를 밟아주는 것은.
김기태의 성품에, 적잖은 쾌감을 줄 만한 일이었으니까.
물론 우진은 김기태가 기대하고 있을 그 쾌감을, 굴욕과 수치스러움으로 바꿔 줄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기태의 장단에 좀 맞춰 줄 생각이었다.
사실 우진 또한 지금의 상황을, 조금은 즐기고 있었으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정말 몰라?”
“으음……. 제도 수업은 과제도 다 제출했고. 기말도 잘 본 것 같은데, 정말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 모르겠네요.”
해맑기 그지없는 우진의 목소리에, 기태의 걸음이 살짝 느려졌다.
어차피 잠시 후면 불쾌하게 능글거리는 이 낯짝까지도 완전히 구겨버릴 수 있을 테지만.
그래도 너무 태연한 모습을 보이니, 조금 약이 오른 것이다.
“잘 생각해 봐, 서우진. 힌트를 하나 주자면, 좋은 일로 가는 건 아니야.”
기태의 목소리를 들은 우진은 장단을 맞춰주려던 조금 전의 계획도 잊은 채,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타이르기라도 하듯 말하며 우진을 압박하려는 모양새가, 꽤 유치하고 안타까워 보였으니까.
하지만 학생들이 지나다니는 학과 복도에서 기태와 주먹다짐을 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우진은 겨우 그 웃음을 참아낸 뒤, 다시 연기하기 시작하였다.
“그, 글쎄요. 선배. 제가 딱히 잘못한 건 없는 것 같은데…….”
우진의 말을 들은 기태는 더욱 복장이 터질 것 같은 표정이 되었지만, 아랫입술을 깨문 채 계속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참으면 이 낯두꺼운 녀석을, 제대로 혼내줄 수 있을 터였다.
저벅- 저벅-
하여 박준민 교수의 집무실 앞에 도착한 기태는, 가볍게 문을 두들긴 뒤 입을 열었다.
“교수님, 기탭니다.”
“그래, 들어와.”
드르륵-
이어서 우진과 기태는, 나란히 박준민 교수의 앞에 앉게 되었다.
* * *
가장 먼저 운을 뗀 것은, 박준민 교수였다.
그리고 그 첫 마디는, 김기태가 했던 말과 거의 같은 이야기였다.
“우진이 너, 내가 왜 불렀는지 알고 있니?”
하지만 우진은 느낄 수 있었다.
그 안에 담겨있는 감정 자체는, 기태의 그것과 완전히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김기태의 목소리에는 멸시와 분노. 그리고 우월감 등의 복잡하고 부정적인 감정이 담겨있었다면.
우진이 박준민 교수의 목소리에서 느낀 감정은, 안타까움이었으니까.
그래서 우진은, 담백한 어조로 대답하였다.
“아뇨, 잘 모르겠습니다.”
우진의 대답에 김기태는 경멸의 시선을 보내왔고.
박준민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곧바로 다시 말을 이어갔다.
“SPDC에 출품해서 대상을 받은, 네 작품 말이다.”
“예, 교수님.”
“그거, 전부 네가 한 것 맞아?”
박준민의 질문에 잠시 장내에 정적이 흘렀다.
바로 건너편 소파에서 그 대화를 듣고 있던 선빈까지도, 우진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지 숨죽이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찰나의 정적을 깬 것은 여전히 담담한 우진의 대답이었다.
“전부 제가 했을 리가요.”
“음……?”
“제 팀원 한소연 제이든. 두 사람도 같이 작업했는걸요.”
우진의 답을 들은 박준민의 표정에, 처음으로 노기가 어렸다.
“너, 지금 나랑……. 말장난이나 하려는 거냐, 서우진.”
하지만 준민의 이런 반응까지도 이미 생각하고 있던 우진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전, 교수님께서 왜 이러시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습니다.”
“뭐?”
“방금 제 입장에선, 있는 그대로를 말씀드린 것뿐인데. 이렇게 화나신 이유를 모르겠다는 얘깁니다.”
우진의 대답에 준민은 벙찐 표정이 되어버렸고, 옆에 있던 기태가 참지 못하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서우진. 너 바보야?”
“그럴 리가요.”
“교수님께서 정말 아무런 이유 없이, 널 여기까지 부르셨을 거라고 생각해?”
우진 또한 짐짓 화난 표정을 지으며, 기태의 물음에 반발하였다.
“이유야 있겠죠.”
“뭐……?”
“그렇게 어이없는 표정 짓지 마시죠, 선배. 지금 가장 어이없는 건 저니까요.”
우진은 조금 더 딱딱해진 어조로, 다시 말을 이었다.
“갑자기 절 여기에 불러놓고 이유도 알려주시지 않은 채로 이렇게 얘기하시면, 전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우진은 박준민과 김기태를 번갈아 응시하였고, 둘은 그대로 말을 잃어버렸다.
우진이 이렇게까지 당당하게 나올 줄은, 둘 중 누구도 생각지 못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당당하다고 한들 기태는 이미 증거까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상태였고.
그래서 우진의 이 당당함을 허세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뭘 믿고 이렇게 당당한진 모르겠지만.”
기태가 우진을 노려보았다.
“이미 네가 치팅했다는 증거까지, 싹 다 SPDC 측으로 넘어갔어.”
기태는 이야기를 하며, 우진의 표정 변화를 살폈다.
증거에 대한 말까지 꺼낸다면, 아무리 배짱 좋은 우진이라도 움찔할 것이라 생각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진으로선 자신이 직접 짜 놓은 판 위에서 당황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고.
점점 더 이 상황이 즐거울 뿐이었다.
다만 조금 놀란 척은 해 줘야 계획대로 판을 굴릴 수 있기 때문에, 두 눈을 크게 뜨며 기태를 향해 반문하였다.
“치팅이라뇨?”
그리고 김기태는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우진을 물어뜯기 시작하였다.
“네 디자인, 설계. 그리고 모형까지. 싹 다 외주로 작업한 거, 증거까지 다 나왔어 인마.”
기태의 말을 들은 우진은, 이번에는 진심으로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다.
‘뭐? 디자인에 설계? 이 새끼는 대체 무슨 망상을 하는 거야?’
WJ 스튜디오의 작업실에서 확보해 간 사진을 통해, 모형 외주라는 프레임을 씌울 거라는 것은 당연히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증거 비슷한 것도 있을 리 없는 설계나 디자인까지도.
당연히 외주작업이라 생각하며 엮어 넣을 줄은, 우진조차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예상 범위를 벗어난 기태의 이야기와 별개로.
어떻게 된 건지는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김기태라는 캐릭터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놈에겐, 그게 너무 당연한 거겠지. 신입생이 자신보다 나은 설계를 할 수 있다는 전제 자체가, 뇌 구조에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우진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지는 것을 느꼈다.
오늘 이 자리의 끝에 남은 김기태의 표정이, 점점 더 궁금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어쩌면 우진은 지금의 이 상황을, 조금만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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