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역공
우진은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지난 한 달 동안 쉼 없이 달린 탓에, 오늘은 일부러 하루를 통째로 비워놓은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일과 관련된 일정을 비워놓은 것이지, 사적인 약속까지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조금 슬픈 것은, 그 사적인 일정마저 매일 보는 얼굴들과 함께한다는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우진! 준비 다 했지?]
“그래, 양치만 하고 나간다.”
[뭐야, 우린 이미 도착했다고! 왜 이렇게 게을러 우진!]
“제이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아직 약속 시간까지는 20분이 더 남았어.”
[그건 중요하지 않아. 제이든 님이 벌써 도착했다는 게 중요…….]
뚝-
제이든의 전화를 매정하게 끊어버린 우진은, 최대한 이빨을 골고루, 세심하게 닦았다.
그리고 천천히 옷을 챙겨 입은 뒤, 집 앞으로 걸어 내려갔다.
그곳에는 이미, 제이든의 차가 와 있었고 말이다.
철컥-
뒷좌석의 문을 열고 차에 탄 우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열었다.
“석구. 대체 이 영국인은 왜 데려온 거야?”
“차까지 태워준다는데, 데리고 오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
“맞아, 우진. 오늘은 제이든이 꼭 필요한 날이라고.”
“…….”
이미 한통속이 되어버린 석현과 제이든을 향해, 우진은 한숨을 푹 하고 내쉬었다.
하지만 뭐가 그리 신났는지, 둘은 우진을 신경조차 쓰지 않았으며.
시끄럽게 떠들어대면서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하였다.
조금 길눈이 어두운 제이든은 약간 헤맨 끝에 개포동을 벗어나 영동대로를 탈 수 있었고.
대로를 따라 쭉 직진해 도착한 곳은, 삼성, 청담동이었다.
가만히 둘의 행태(?)를 지켜보던 우진이, 기가 막힌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근데, 니들. 적어도 목적지는 물어보고 가야 하는 것 아니냐?”
“목적지? 그건 이미 알고 있는데?”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는 석현을 보며, 우진은 반사적으로 되물었고.
“뭐?”
그 물음에는 제이든이 대신 대답하였다.
“일단 저쪽에 있는 아우디 매장부터 들어가 볼 거야. 이어서 BMW, 벤츠, 재규어까지. 어차피 포르쉐를 사게 될 테지만, 한 번씩 구경은 다 해봐야 하지 않겠어?”
“…….”
“그렇지, 석현?”
“물론이야, 제이든. 완벽한 일정인 것 같아.”
“하아…….”
오늘 우진이 석현과 약속을 잡았던 것은, WJ 스튜디오의 법인차량을 한 대 계약하기 위해서였다.
회사가 점점 커지고 일정이 많아질수록,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으니 말이다.
차에 크게 관심 없는 우진과 달리 석현은 광적인 차덕후였고, 그래서 그를 대동한 것뿐이었다.
‘적당히 괜찮은’ 차를 한 대 사기 위해서, 석현의 도움이 조금 필요했으니까.
다시 강조하지만, 제이든은 원래 계획에 없던 인물이었다.
“석구.”
“응?”
“분명히 말했지만, 나는 적당히 괜찮은 차를 사려고 한다니까?”
석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치. 독3사(독일의 3대 외제차 브랜드) 정도면, 확실히 적당하고 괜찮은 차야. 믿어도 돼.”
우진은 오늘따라, 한숨 쉴 일이 많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아……. 당연히 괜찮겠지. 문제는 적당하지 않다는 거야. 난 그런 비싼 외제 차를 살 만큼 자금이 넉넉하지 않다고.”
제이든이 끼어들었다.
“What? 우진! 너 한 달에 몇천만 원씩 번다며!”
“누가?”
“석현이 그랬어. WJ 스튜디오 매출 장난 아니라고.”
“후……. 그건 매출이지 순이익이 아니야, 제이든.”
“그래도! CEO라면 포르쉐 정돈 타줘야 한다고!”
“벤츠도 아니고, 포르쉐?”
“우리 벤츠 매장은 스킵하자 석현. 생각해보니 벤츠는, 아빠가 한국에 버리고 간 차였어.”
“너네, 다 집으로 돌아가면 안 되냐? 그냥 차는 나 혼자 살게. 적당히 가성비 좋은 국산 차 검색해서 사면 될 것 같아.”
“그럴 순 없지.”
“맞아. 석현은 오늘 수업도 째고 왔다고.”
우진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석현을 응시했다.
“야, 석구. 너 오늘 수업 없다며. 거짓말이었어?”
“거짓말은 아니야. 네가 전화한 순간, 수업이 거짓말처럼 없어졌으니까.”
“젠장. 거짓말 같은 놈들.”
우진은 어차피 외제 차는 살 생각 없다며 둘을 열심히 설득했지만, 이미 흥분한 둘에게 그건 씨알도 먹히지 않는 말이었다.
그래서 결국 우진은, 구경이라도 하자는 석현의 손에 질질 이끌려 외제 차 매장을 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제이든이 벤츠를 끌고 온 탓인지, 딜러들은 꽤나 친절하게 세 사람을 상담해 주었다.
“그러니까 이번에 나온 신형 카브리올레가, 가격 대비 성능이 상당히 괜찮습니다.”
“카브리올레가 뭐야, 석현?”
“뚜껑 열리는 거.”
“오픈카?”
“맞아.”
“그럼 문짝 두 개?”
“그렇겠지?”
“안 사.”
“아 왜! 구경이라도 해!”
우진은 시종일관 퉁명스러웠지만, 그래도 석현과 제이든의 흥을 깨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럼, 이 모델은 어떻습니까? 작년에 나온 4도어 쿠페인데, 루프 라인이 아주 매끈하게 빠졌습니다. 디자인도 스포티하고, 이번에 할인이 꽤나 많이 들어가거든요.”
딜러는 우진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석현이 했다.
“와우, 할인 얼마나 되는데요?”
“딜러 할인까지 하면, 거의 천삼백 정도 가능합니다.”
천 삼백만 원이나 할인이 가능하다는 말에 우진은 잠깐 솔깃하였지만, 할인된 가격이 7천만 원이라는 얘길 듣는 순간 바로 관심이 식어버렸다.
‘무슨 차를 사는 데 7천만 원을 써? 그 돈으로 차라리 분양권을 하나 계약하겠다.’
지금의 우진에게 자동차란, 편리성을 위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으음. 그래서 연비는요?”
“터보 엔진이다 보니, 연비가 썩 좋지는…….”
“야, 이런 차 사는데 무슨 연비를 따져!”
“그래서 연비는요?”
“연비는……?”
그리고 결국 우진의 한결같은 태도에, 석현과 제이든도 폭발하고 말았다.
“Bloody Hell!”
“이런 미친 연비충!”
“연비충이 뭐야, 석현?”
“연비만 따지는 벌레라는 뜻이야.”
“완전히 우진 그 자체군.”
“후우…….”
“한국에도 파브르가 있다면, 지금 당장 우진을 잡아갔으면 좋겠어.”
“동의해.”
물론 둘이 뭐라고 하든, 우진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지만 말이다.
“시끄러. 그러니까 처음부터 국산 차나 보러 가자니까.”
“Holy…….”
그래서 결국 우진 일행이 마지막으로 간 곳은, 영동대로 끝자락에 있던 국산 차 전시장이었다.
그곳에서 우진은, 정말 아무런 고민 없이 국산 중형차 한 대를 계약했고 말이다.
“후회할 거야, 우진.”
“제이든, 나 마음이 너무 아파.”
“나도 그래.”
시무룩한 둘을 향해, 우진이 만족스런 얼굴로 얘기했다.
“모름지기 자동차란, 기름 냄새만 맡아도 굴러가야 하는 법.”
“제길! 우리 아빠보다 연비를 더 따지는 사람이 내 친구일 줄이야.”
“이건 자동차 엔진에 대한 모독이야.”
석현과 제이든이 뭐라고 하던 기분 좋게 자동차 계약을 마친 우진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전시장을 빠져나왔다.
‘흐흐, 드디어 뚜벅이를 벗어나다니!’
사실 우진도 외제 차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디자인 예쁜 몇몇 차종들은, 적잖이 마음이 끌리기도 했었고 말이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야. 투자할 돈 부족해서 어머니 집도 못 옮겨드리는 마당에……. 외제 차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돌아오는 길에 차 안에서 투덜대는 둘을 힐끔 응시한 우진이, 웃으며 입을 떼었다.
“야, 근데. 내 차 사는데, 왜 너희 둘이 그렇게 열을 내냐?”
우진의 말에, 석현이 반발하였다.
“네 차라니! 회사돈으로 사는 거잖아!”
제이든도 거들었다.
“맞아. 이건 WJ 스튜디오의 차라고. 우진의 차가 아니야.”
“이런 독재자 같으니라고.”
우진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설마 내가 차 사면, 너희 둘이 타고 다니려고 했던 건 아니지?”
“……!”
“그, 그런!”
정곡을 찔린 둘이 당황한 표정이 되자, 우진이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일 년만 딱 기다려 봐, 석현.”
“일……년?”
“일 년 뒤에 매출 열 배 정도 커지면, 그땐 진짜 좋은 차로 한 대 법인 리스 해 줄게.”
우진의 말에 잠시 설렜던 석현은, 지금 매출의 열 배라는 말에 한숨을 푹 쉬었다.
외제 차를 사기 싫은 우진이, 일부러 말도 안 되는 목표를 잡았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석현의 생각과 달리, 우진의 목표는 많이 보수적인 것이었다.
지금 매출의 열 배 정도는, 사실 올해 안으로 달성하는 것이 목표였으니까.
‘어휴, 이런 단순한 놈들.’
그런데 우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그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리기 시작하였다.
위이잉-!
이어서 발신자의 전화번호를 확인한 우진은,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
* * *
원래 오늘 우진은, 자동차 계약만 하고 집에 들어가 죽은 듯이 잠만 자려 했었다.
하룻밤 충분히 잤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피로가 남아있던 탓이다.
하지만 그는 집으로 향하던 길에 제이든의 차를 돌릴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결국 도착한 곳은 WJ 스튜디오의 작업실이었다.
근무 중이던 직원으로부터, 생각지 못했던 전화를 받았으니까.
작업실에 도착한 우진은, 기다리고 있던 직원에게 물어보았다.
“정훈씨, 자세히 좀 말해주세요. 누가 다녀갔다고요?”
임정훈은 지난달부터 WJ 스튜디오의 작업실에서 일하게 된, 석현이 데려온 직원이었다.
“그러니까 분명히 명성건설이라고 그랬거든요.”
“명성이요?”
“네.”
“거기서 왜……?”
뒷머리를 긁적거린 정훈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야, 저희에게 작업 의뢰하고 싶어 찾아왔다고…….”
“작업의뢰라.”
“작업의뢰는 대표님 통해서 직접 하셔야 한다고 했는데도, 막무가내로 들어오더라고요.”
“그래요?”
“작업실 한번 구경이라도 시켜달라고, 제법 큰 건으로 의뢰할지도 모른다면서 말이죠.”
정훈의 말을 듣던 우진은, 머리를 굴리기 시작하였다.
명성건설에서 작업실에 직접 찾아오는 것이, 아예 불가능한 시나리오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우리가 홈페이지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대외적으로 발주처를 만들어 놓은 것도 아니니……. 외부에서 의뢰를 넣으려면 찾아와야 하는 건 맞지.’
지금까지 WJ 스튜디오는, 항상 인맥을 통해서만 작업을 의뢰받았다.
그것만 해도 사실 일손이 작업량을 못 따라갈 지경이었으니, 굳이 대외적인 홍보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천웅에서는 전국에 수주한 거의 모든 사업장의 모델하우스 모형 외주를 WJ 스튜디오에만 의뢰하였으며.
천웅을 통해 소개받은 크고 작은 건설사들의 일들도 적잖이 많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운영하게 된 것은, 박경완의 부탁 때문이기도 하였다.
박경완은 WJ 스튜디오에서, 경쟁건설사들의 모형 외주를 최대한 받지 않길 원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WJ 스튜디오의 모형은 업계에서 슬슬 유명해지고 있었고.
그래서 다른 건설사들에서도 WJ 스튜디오를 찾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을, 우진도 알고 있었다.
‘명성이라……. 명성……. 정말 일을 의뢰하기 위해 찾아온 걸까? 왜 자꾸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드는 거지?’
우진은 다시 정훈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하였다.
어차피 당장 명성건설의 일을 받을 생각은 없었지만, 뭔가 개운하지 않았던 탓이다.
“정훈씨. 그 사람들, 들어와서 뭐 했어요?”
정훈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말 그대로 작업장을 둘러봤어요.”
“잠깐 둘러보고 나갔나요?”
“음……. 잠깐은 아니에요. 거의 20분 정도는 있었던 것 같거든요.”
“……?”
우진은 다시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모형업체의 작업설비나 시설 같은 것을 보기 위해 잠깐 들어올 수는 있겠지만, 그것들을 보는 것은 사실상 5분이면 충분한 일이었다.
그리고 작업 중인 사무실에 그렇게 오래 머무는 것은, 예의가 아니기도 하였다.
‘뭐 하는 놈들이지? 확실히 뭔가 있는데…….’
그런데 우진이 그렇게 고민하던 그 때.
정훈이 갑자기 뭔가 생각났는지, 다시 우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대표님.”
“말씀하세요.”
“오셨던 분 중 하나가, 대표님 작업하시던 방에 들어가서 사진을 좀 찍으시더라고요.”
“사진요?”
“네. 아까는 아무 생각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뭔가 이상하네요.”
“……!”
정훈의 말을 들은 우진은, 뭔가 깨달음을 얻은 표정이 되어 곧바로 자신의 작업실로 들어가 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우진의 입에서 낮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하.”
뭔가 꺼림칙하고 찝찝하던 기분이, 완전히 해소되는 것을 느꼈으니 말이다.
‘그래. 이거였구나.’
지금 우진의 작업실에는, 그가 SPDC에 출품하기 위해 했던 모형 작업들의 잔재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리고 이 어수선한 작업실을 굳이 사진으로 찍어갔다는 것은…….
‘김기태. 아무래도 그놈의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한번 알아봐야겠어.’
김기태를 떠올린 우진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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