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The Winner
브루노와 헤어진 세 사람은, 곧바로 소고기 집으로 향했다.
이런 날은 무조건 소고기를 먹어야 한다는 소연의 강력한 주장도 한몫했지만, 우진이나 제이든도 오늘따라 맛있는 고기가 땡겼으니 말이다.
“우진, 당연히 결제는 법카겠지?”
“제이든. 법카라는 단어는 대체 또 어디서 주워들은 거야?”
“석현이 그랬어. 우진의 법카는, 요술 방망이 같은 거라고.”
“석구……. 젠장.”
낭패한 표정이 된 우진을 힐끔 응시한 소연이, 제이든에게 물었다.
“법카? 법인 카드?”
“맞아. 오늘 우리가 먹은 소고기값을 지불해 줄 카드야.”
“……!”
“쉽게 말해, 우진의 회삿돈이랄까.”
“WJ 스튜디오를 말하는 건가?”
“맞아. 마음껏 써도 된다는 뜻이지.”
우진이 한숨을 푹 쉬며 답했다.
“내 회산데, 왜 니가 마음대로 써 제이든.”
우진이 한숨을 쉬던말던, 제이든은 뻔뻔했지만 말이다.
“난 WJ 스튜디오의 넘버3이니까.”
“……?”
“우진, 석현. 그 다음이 바로 나라고.”
“너 언제 우리 회사 취직했냐?”
“난 취직하지 않았어.”
“그럼?”
“처음부터 WJ 스튜디오의 일원이었지.”
“뭐라는 거야? 젠장.”
돈은 또 깨졌지만, 우진은 기분 좋게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어차피 고생한 두 팀원에게 고기 한 끼 사주는 정도는, 그렇게 아깝지 않았으니 말이다.
사실 월 매출 5천만 원이 넘기 시작한 WJ 스튜디오의 법인통장에서, 소고기 한 끼 값 정도 빠져나가는 게 그렇게 티가 나는 것도 아니었다.
“자, 그럼 다음 주에 보자고, 친구들.”
“오빠 내일 학교 안 와?”
“설마 우리 중에, 금요일 공강이 아닌 바보가 있는 거야?”
“제이든. 한 대 맞고 싶지?”
하여 소고기를 배불리 먹고 기분 좋게 헤어진 세 사람은, 날이 어둑어둑해질 즈음 각자의 집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집에 도착한 우진은 정갈하게 샤워부터 한 뒤, 경건한 마음으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오늘의 마지막 일정.
SPDC의 심사 결과를, 홈페이지에서 확인하기 위해 말이다.
“자, 이제쯤 나왔겠지? 한번 볼까……?”
하지만 검색창에 SPDC를 치던 우진은, 엔터를 누르기 전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지이잉-!
성질 급한 제이든에게, 스포를 당해버렸으니 말이다.
[우진! 됐어! 됐다고! 우리가 대상이야! We are the Wiiiiiiiiiiiner!]
* * *
[서울시 디자인재단에서 주최하는 공공 디자인 공모전 ‘SPDC(Seoul Public Design Contest)’에서, 역대 최고의 이변이 발생했습니다.]
[이변의 주인공은 바로, K대학교 공간디자인과 1학년 학부생인 서 씨 외 2인으로…….]
[이제껏 SPDC에서 1학년 학생이 우수상 이상을 수상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번 10회 SPDC 공모전에서, 그들은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대상을 수상하였으며…….]
쾅-!
인터넷 기사를 읽고 있던 김진명이, 자신의 책상을 있는 힘껏 두 손으로 내리쳤다.
붉으락푸르락한 얼굴이 되어 씩씩거리며, 책상을 내려친 두 주먹을 꽉 말아 쥐는 김진명.
어찌나 책상을 세게 내리쳤는지, ‘명성건설 상무이사 김진명’ 이라 쓰여 있는 명판마저도 옆으로 삐뚤어졌지만.
김진명은 그것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책상 위에 놓여있던 전화기를 들어 올렸다.
이어서 그는, 수화기에 대고 벼락처럼 소리쳤다.
“윤 실장! 윤 실장 들어와!”
김진명은 회사에서 평판이 그리 나쁘지 않은 임원이었다.
조금 날카로운 인상과 달리 항상 웃는 얼굴로 회사에 출퇴근하였으며, 아랫사람들을 잘 챙기고 수완이 뛰어나다는 것이 그에 대한 평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한 번씩 그의 입에서 큰 소리가 날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회사에는 피바람이 불곤 했다.
그는 화를 잘 내지 않았지만, 한번 화가 나면 물불 가리지 않는 타입이었다.
‘이 머저리 같은 놈들은, 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그리고 그런 진명의 성향을 잘 알고 있는 탓에, 윤영운 실장은 쏜살같이 이사실로 뛰어왔다.
타다닷- 끼익-
“이사님, 부르셨습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도, 김진명으로부터 분노에 찬 욕설이 쏟아지는 것은 다를 바 없었지만 말이다.
“너 대체 뭐 하는 놈이야?”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어떻게 일 처리를 하면, 이런 개 쓰레기 같은 결과가 나올 수 있어?”
“……!”
“명성건설이 무슨 동네 구멍가게야? 엉? 어떻게 니들 손을 탄 설계안이, 학부 1학년 설계에 밀릴 수가 있냐고. 이게 말이 돼?”
영문도 모른 채 후다닥 이사실로 달려왔던 윤영운은, 김진명이 화난 이유를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은 사실, 이미 충분히 예견하고 있었던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벌써 이사님 귀에 들어갈 줄은 몰랐지만…….’
윤영운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던 것은, 바로 어제 저녁이었다.
[삼촌, 통화 가능하세요?]
[오, 그래. 기태야. 그렇지 않아도 연락해보려 했었는데……. 오늘 발표는 잘했냐?]
[그게, 삼촌…….]
윤영운은, 김진명의 아들인 김기태와도 사적으로 친분이 있었다.
사실 윤영운과 김진명의 관계는, 단순한 회사의 상하 관계 이상이었으니 말이다.
김진명은 윤영운이 대학생이던 시절부터 그를 이끌어준 선배이자 멘토였으며.
기태가 어렸던 시절부터 회사에서 보필해왔던, 단순한 상관 이상의 존재였다.
김진명에 대한 윤영운의 충성은, 회사의 영역을 한참 넘은 수준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김기태 또한,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영운이 조카처럼 아끼는 아이였다.
[그러니까, 확실히 냄새가 난다는 거지?]
[그렇다니까요, 삼촌. 제가 장담하는데, 그거 1학년짜리가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에요.]
[흐으음……. 하긴. 네 작품이 1학년짜리한테 밀렸다는 게, 좀 많이 이상하기는 하네.]
[저도 한번 학교 안에서, 여기저기 좀 파볼게요.]
[그래, 기태야. 뭐 하나 걸려 나오면, 대상 수상은 바로 취소될 거야. SPDC가 애들 장난은 아니니까.]
기태는 SPDC에서, 대상 수상에 실패했다고 했다.
하지만 기태는 그 원인을 자신의 부족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고 있었고, 영운 또한 그 이야기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기태가 SPDC에 출품한 작품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영운이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기태가 가끔 철이 없긴 해도, 머리는 똑똑한 녀석이니까.’
전화를 통해 들은 기태의 말대로라면, 이번에 대상을 받았다는 신입생에게 확실히 구린 구석이 있다고 하였다.
실력 있는 설계사무소에, 비밀리에 의뢰를 넣은 게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이 맞다면, 대상은 다음 순위인 기태에게로 돌아갈 것이었고.
기태와 영운은, 그때까지 SPDC의 결과에 대해 함구하기로 얘기했었다.
김진명이 공모전 결과에 대해 알게 된다면, 불벼락이 떨어질 것은 너무도 자명했으니까.
[그럼 네 아버지껜, 당분간 말씀드리지 않는 거로 하자.]
[당연하죠, 삼촌. 아버지 아시면……. 저 맞아 죽어요.]
[너만 죽냐? 삼촌도 같이 죽어 인마.]
[하아……. 진짜, 쓰레기 같은 1학년 새끼들 때문에, 이게 무슨 짓인지…….]
영운과 기태는, 한동안 김진명의 귀에 SPDC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명성건설의 상무이사 자리는 한낱 공모전 결과나 찾아보고 있을 정도로 한가하지 않았고.
때문에 영운이 직접 보고하지 않는다면, 그가 알게 될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둘의 판단은 틀려버렸다.
우연히 포털 사이트의 한쪽에 뜬 기사의 제목이 김진명의 눈에 들어와 버렸으며.
그 제목에 SPDC라는 네 글자가 쓰여 있었으니까.
“자,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내가 납득할 수 있도록, 지금부터 아주 잘 설명해야 할 거야.”
“…….”
“설마 이 거지같은 기사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걸, 날 더러 믿으라는 소리는 아니겠지?”
잔뜩 흥분했던 김진명의 목소리가, 다시 차갑게 내려앉았다.
그의 분노를 마주한 윤영운의 표정은 당황한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고.
그렇다는 말은 윤영운도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였으니 말이다.
그가 아는 윤영운은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을 회피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사님.”
“흠.”
“말씀대로 공모전의 결과에 약간의 문제가 있어서, 그것을 알아보던 참이었습니다.”
“약간의 문제라…….”
윤영운은 침착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대상 수상으로 알려진 1학년 학생들의 작품에, 부정이 개입된 정황을 발견했거든요.”
“부정이라고?”
“완전히 확인 마친 후에, 다시 보고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그 부분만 명확히 밝혀진다면, 대상의 주인은 바로 바뀔 겁니다.”
다시 의자에 앉아 몸을 반쯤 기댄 김진명이, 턱을 만지작거리며 윤영운을 응시하였다.
“그 한 놈만 치우면, 기태가 대상인가?”
“그렇습니다, 이사님.”
“그렇다면 조금은 더 기다려 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일 여러 번 하게 만들지 말고, 이번엔 확실하게 처리해.”
“여부가 있겠습니까.”
김진명의 목소리가 가라앉은 것을 느낀 윤영운은, 속으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김진명의 화가 조금이나마 누그러진 이유는, 윤영운의 입에서 나온 ‘정황’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영운은 어떤 확신 없이 그렇게 쉽게 이야기하는 인물이 아니었고.
때문에 그의 입에서 정황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은, 어느 정도 실질적인 물증이 나왔다는 얘기였으니까.
그리고 김진명의 짐작대로, 영운은 이미 어느 정도 단서를 확보한 상태였다.
‘좀 더 빨리 움직여야겠군. 건설사에 입찰 공시가 뜨기 전엔, 대상 수상작품의 주인이 바뀌어 있어야 할 테니 말이야.’
SPDC에서 대상을 수상한 작품은, 해당 디자인과 설계 그대로 실제 건축물로 지어질 기회가 주어진다.
대상이 확정된 이후 서울시 산하의 설계사무소의 도움을 받아 실시설계 도면을 작업하고.
그 후 국내 건설사들을 대상으로, 입찰공고를 띄우는 것이다.
만약 공고가 뜨기 전에 김기태의 작품이 대상 수상작으로 무사히 바뀐다면, 이번 일은 별 탈 없이 넘어갈 것이다.
김진명의 성격이 불같다고 한들, 그 정도로 꽉 막힌 인물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때도 듣도 보도 못한 1학년 학생들의 설계가 입찰 공시에 올라와 있다면.
김진명은 제대로 폭발할 것이었다.
“사실 명성의 개입이 없었다면, 기태놈이 죽을 쑤든 똥을 쌌든 상관없어. 무슨 말인지 알지?”
“알고 있습니다.”
“그럼 나가봐.”
“예, 이사님.”
이사집무실을 나선 윤영운은, 곧바로 자리에 돌아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래, 병태야. 클리오 모델하우스 건은 확인해 봤지?”
“WJ스튜디오라……. 소재지도 K대 인근이고……. 오케이, 알겠다. 대충 그림이 나오네.”
이어서 전화를 끊고 외투를 걸친 그는, 잰걸음으로 빠르게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