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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프린트-57화 (57/315)

57화

The Winner

거대한 성취감과 희열이 벅차오르는 가운데, 우진은 천천히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참관석으로 돌아 들어오는 우진을 가장 먼저 반겨준 것은, 그의 팀원인 소연과 제이든이었다.

“우진! Amazing! 미쳤어! 진짜로 미쳤다고!”

“오빠……!!”

제이든은 마치 광분한 들소마냥 뛰어와서 우진의 목을 양팔로 휘감았고, 한발 늦은 소연은 제이든을 억지로 떼어낸 뒤 우진을 다시 끌어안았다.

생각보다 더 흥분한 두 사람의 모습에 우진은 조금 당황했지만, 그래도 그 기분이 싫지만은 않았다.

성취감이라는 것은 원래, 함께 공유하고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때 더욱 크기가 커지는 법이었으니까.

“난 우진이 이렇게 말을 잘하는 줄 몰랐어. 물론 제이든이었으면 조금 더 잘…….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아. 오늘은 우진이 좀 더 나았던 것 같기도 해.”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인지하고 있기는 한 것인지, 혼미한 표정으로 횡설수설하는 제이든과.

“흐어엉. 우리 대상 받으면 어떡하지? 나 울 것 같아.”

“소연은 이미 울고 있어.”

“아냐. 아직은 울지 않았어. 나 안 울었다고!”

아직도 우진의 옆구리에 매미처럼 매달린 채, 꺽꺽대며 자신의 감정 상태를 부정하고 있는 소연.

우진은 양팔을 들어 올린 채 어색한 표정으로 얘기했고.

“이제……. 조금은 떨어져서 대화를 나누는 게 어떨까, 팀원님.”

“아……!”

그제야 자신의 행태를 자각한 소연이, 어색한 표정으로 슬쩍 두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색한 침묵이 흐르기엔, 세 사람의 텐션이 너무 최고조였다.

“우진, 내가 볼 땐 말이야, 우리 팀이 무조건 대상이야.”

“아직 결과 안 나왔어 제이든.”

“하지만 확실해.”

“맞아. 확실해.”

“제발, 주변 눈치도 좀 보고 그래라 화상들아.”

우진의 발표가 아무리 압도적이었다 해도, 이미 대상이라고 설레발을 치는 것이 다른 경쟁자들의 눈에 좋게 보일 리는 없다.

사실 참관석은 엄청나게 넓었고.

제이든과 소연의 이 얘기들이 들릴 정도로 가까이에 다른 팀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우진이 조심스러운 것은 너무 당연했다.

‘물론 우리가 대상일 수밖에 없다는 부분은, 나도 동의하지만…….’

소연, 제이든과 함께 참관석의 가장 뒤에 다시 자리 잡고 앉은 우진은, 최종심사의 마지막 남은 순서를 차분히 지켜보았다.

시간이 지나자 두 팀원들의 흥분도 어느 정도 가라앉았고.

발표 자체는 우진의 팀이 마지막이었지만, 이 행사를 마무리하기 위한 식순이 남아있던 탓이다.

우진이 발표한 그 자리에 서서 마이크를 잡은 사회자는, 무척이나 기분 좋은 목소리였다.

“2010 SPDC를 찾아주신 모든 참가자분들과 귀빈 여러분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여러분의 관심과 열정이 있어 올해도 이렇게 훌륭한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었으며, 서울시 건축디자인의 밝은 미래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또렷이 울려 퍼지는 사회자의 목소리에, 참관객들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우진의 작품을 차치하고라도, 올해 SPDC의 수준은 역대 최고였으니까.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최종심사에 출품되었던 작품들을 소개하며…….”

사회자의 진행에 따라, 최종심사에 올라왔던 네 팀의 작품들이 간결하게 스크린을 타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 순서를 끝으로…….

“심사 결과는 금일 내로 SPDC 공식 홈페이지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그럼 이것으로, 행사의 모든 일정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SPDC의 모든 일정이 마무리되었다.

* * *

브루노 산체스는, 심사위원석을 빠르게 빠져나왔다.

모든 식순이 끝나고 SPDC의 폐막이 선언되자마자,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쏜살같이 걸어 나온 것이다.

브루노의 옆에 앉아있던 통역가는 덩달아 당황하여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를 향해 물을 수밖에 없었다.

“브루노,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십니까? 이제 곧 있으면 심사위원 인터뷰가…….”

“지금 인터뷰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미스 림. 꼭 만나봐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예?”

다시 걸음을 옮기려던 브루노는, 순간 깨달음을 얻은 것인지 다시 멈춰 섰다.

“미스 림. 죄송하지만 함께 가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 그야…….”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이어서 브루노는, 통역가 임지연까지 함께 끌고 나갔다.

그가 지금 만나려는 사람은 한국인이었고, 브루노는 한국말을 할 줄 몰랐으니까.

‘그’가 영어를 잘한다면 의사소통에 문제가 되진 않겠지만, 그래도 통역사를 데리고 가는 게 확실했다.

저벅- 저벅- 저벅-

브루노는 발표장 안에 있던 거의 모든 사람들 중 가장 빨리 밖으로 나왔고, 때문에 아직 메인 홀은 텅 비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곧 홀의 후문쪽으로, 참가자들을 비롯한 참관객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브루노는 한 남자의 얼굴을 발견하였다.

‘우진! 저 친구가 확실해.’

적당히 훤칠한 키에 말끔한 차림새.

짙은 눈썹에 단단한 눈매를 가진, SPDC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청년.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간 브루노는, 다짜고짜 입을 열었다.

“¡Espere!(잠깐만!)”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브루노와 우진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 * *

우진은 눈앞에 나타난 외국인의 얼굴을 기억했다.

심사위원 중 유일하게 내국인이 아니었던, 백발에 새하얀 수염까지 기르고 있던 남자.

그는 하얀 모발과 수염이 아니라면 40대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미남이었으며, 그 잘생긴 얼굴 탓에 하얀 백발이 더욱 돋보였던 인물이었다.

때문에 브루노는. 어지간히 눈썰미가 좋지 않은 사람이라 해도, 충분히 기억날 만한 인상이었다.

“반갑습니다, 우진. 아, 그 전에 제 소개부터 해야겠군요.”

브루노는 환하게 웃으며 자신의 명함을 품속에서 꺼내 들었다.

그는 스페인어로 계속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옆에 따라온 통역사가 즉석에서 한국말로 통역해줬다.

“감사합니다, 심사위원님. 제 이름을 기억해 주시는군요.”

“물론입니다. 아마 저뿐만 아니라, 당신의 마지막 발표를 들은 모든 심사위원들이 ‘우진’을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우진은 무척이나 호기심 어린 표정이었다.

지금의 상황과 별개로, 이 백인 심사위원이 자신을 왜 찾았는지 감이 잘 오지 않았으니 말이다.

‘음, 어느 나라 사람이지? 언어는 라틴쪽 계열인 것 같은데…….’

하지만 브루노의 명함을 받아 든 순간.

단순한 호기심에 가까웠던 우진의 표정은, 완전히 반전될 수밖에 없었다.

명함 위에 적혀 있는, 이 백발 외국인의 정체.

그것은 그야말로,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으니 말이다.

[Studio ‘De Pinos’]

[Guest designer]

[Bruno Sanzchez]

‘데피노스……? 브루노 산체스라면, 설마……?!’

우진은 데피노스를 잘 안다.

스페인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유명한 건설사이자 설계사무소의 이름이 바로 데피노스였으며.

전생에 우진과 처음 악연이 생겼던 김기태가 바로 이 데피노스의 디자인 팀장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진을 놀라게 한 가장 큰 이유는, 사실 ‘데피노스’ 때문이 아니었다.

명함의 정 중앙에 선명하게 박혀있는, ‘브루노 산체스’라는 이름.

그는 우진이 전생에서 가장 존경하던 건축가 중 한 명이었으니 말이다.

‘진짜 브루노 산체스인가? 그러고 보면, 이맘때쯤 브루노가 국내에 있을 법하기도 해.’

우진이 회귀하기 전.

서울 용산에 지어진 ‘글래셜 타워(Glacial Tower)’는, 유명한 랜드마크 중 하나였다.

용산에서 가장 높은 85층의 마천루임과 동시에, 서울시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호화스러운 호텔 건물.

그 건물의 디자이너가 바로 브루노 산체스였고, 준공년도가 올해인 2010년도였으니.

SPDC의 심사위원으로 그가 초빙된 것은, 충분히 개연성 있는 사실이었다.

‘브루노 산체스가, 이런 이미지였다니!’

그래서 우진은, 저도 모르게 조금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존경심을 갖고 있던 건축가를 마주함으로 인한, 순수하게 반가운 마음에서 말이다.

“브루노! AT타워를 설계하신 그 브루노 산체스죠?”

우진이 아는 체를 하자, 브루노 또한 기꺼울 수밖에 없었다.

우진이 자신에 대해 알고 있다면, 이야기하기가 조금 더 편할 테니 말이다.

“오, 저에 대해 알고 계시는군요.”

“물론입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우진과 브루노가 반갑게 대화를 나누는 탓에 제이든과 소연은 벙찐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은 곧 자리를 옮겨야 했다.

참관 인원들이 전부 다 몰려나오면서, 홀이 너무 시끄럽고 어수선해졌으니 말이다.

“잠시 커피 한잔하실 수 있겠습니까?”

브루노의 제안에 우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물론입니다.”

그의 뒤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던 소연과 제이든 또한,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 * *

브루노가 우진을 찾은 이유는, 그렇게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단지 오랜만에 그의 디자인 철학에 자극을 준 이 특별한 청년과, 얼굴을 마주하며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던 것뿐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 대화와 더불어, 몇 가지 하고 싶은 제안이 있기는 하였다.

그는 ‘데피노스’의 객원 디자이너임과 동시에, 바르셀로나 건축대학의 명예교수이기도 하였으니까.

“오늘 발표는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우진.”

“하하, 위원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 영광입니다.”

“대체 그런 생각은 어쩌다 하게 되신 겁니까?”

“무슨 생각 말씀이신지요?”

“디자인 자체를 건축의 제약 중 하나로 여겼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하, 그거요?”

“건축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디자인. 정말 멋진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 이 친구 덕분이죠.”

우진이 옆에 앉은 제이든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말하자, 그는 어울리지 않게 수줍은 표정이 되었다.

나중에 제이든에게 들어 알게 된 사실이지만, 브루노 산체스는 제이든 또한 존경하던 건축가였다고 했다.

“오, 이런! 내가 너무 발표자의 칭찬만 한 것 같군요. 그 멋진 작품은 여러분 세 사람의 공동작품이었는데 말입니다. 하핫.”

처음 브루노와의 대화는 우진 위주로 이어졌지만, 결국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네 사람이 함께 대화를 나누는 구도가 되었다.

특히나 영어가 유창한 제이든의 경우, 우진이 잠시 통화를 하러 나간 사이 신이 나서 브루노와 영어로 떠들기도 하였다.

“브루노, 나중에 바르셀로나에 놀러 가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여러분의 방문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지요.”

“음, 브루노가 초대해 준다면, 이비자(ibiza) 없는 바로셀로나도 충분히 매력적일 겁니다.”

“하하. 역시 젊은 친구라 그런지, 이비자의 멋짐을 잘 알고 있군요.”

제이든의 예상보다 영어 실력이 훨씬 좋았던 소연이, 그 대화를 전부 알아들어버렸지만 말이다.

“이비자? 거기는 어딘데?”

“Oh, shit. 소연, 영어 할 줄 알아?”

“당연하지. K대에 포커 쳐서 들어온 줄 알았어?”

“젠장. 못 들은 걸로 해줘.”

소연은 제법 괜찮은 영어 실력으로 브루노에게 물었고.

“브루노, 이비자는 어떤 곳인가요?”

브루노는 웃으며 대답하였다.

“밤과 음악. 그리고 정열의 섬이죠.”

“……?”

어차피 포털 사이트에 이비자라고 치는 순간, ‘바르셀로나 클럽’이라는 단어부터 검색될 테지만 말이다.

통화를 짧게 마친 우진은 금세 다시 방으로 들어왔고.

그 이후로도 30여 분 정도, 그들은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좋습니다. 여러분과 더 긴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다음 일정이 있어서 어쩔 수 없군요.”

“저희도 아쉽습니다.”

“다음에는, 용산에 있는 제 사무실에 한 번 초대하겠습니다. 말씀드렸듯, 올해 가을까지는 서울에 머물 예정이니까요.”

“그래 주신다면, 기쁘게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브루노의 초대 제안에, 제이든과 소연의 눈은 반짝일 수밖에 없었다.

브루노의 사무실은 용산의 글래셜 타워 현장사무실일 게 분명했고, 두 사람은 누구보다 열정 넘치는 건축학도들이었으니 말이다.

우진이야 현장 설계사무소에 대한 로망 같은 게 있을 리 없었지만, 소연과 제이든은 평범한 학부 1학년생일 뿐이었다.

“자, 그럼 일어날까?”

우진의 말에 소연과 제이든은 아쉬운 표정으로 엉덩이를 털었고, 브루노는 우진을 향해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였다.

“오늘 반가웠습니다, 우진.”

“저도요, 브루노.”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진은 품속에 가지고 있던 명함 한 장을, 브루노에게 건네었다.

“저도 한 장 받았으니, 제 것도 드려도 되겠지요?”

그것을 받아 든 브루노의 두 눈은, 휘둥그레 커질 수밖에 없었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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