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프리미엄이란?
5월이 전부 지나갔다.
그리고 이것은, 대학교의 몇 가지 굵직굵직한 행사들이 마무리되었음을 의미했다.
5월 초, 중간고사 마무리를 시작으로, 5월 중순부터 이어진 대학 축제까지.
5월은 신입생들에게 있어 대학 생활의 새로운 경험들을 하게 해주는, 다사다난한 한 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개중에는 이 행사들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은, 특이한 신입생도 한 명 있었지만 말이다.
“우리 이번 축제 때 주점 열어서 번 돈으로, 인당 오십만 원씩 남겨서 가져갔다?! 부럽지?”
“글쎄. 별로?”
“그……럼, 이건 어때.”
“또 뭔데.”
“지난주 축제 무대에, 걸 그룹 세 팀이나 왔다 갔거든? 이번에는 진짜 부럽지? 후회되지?”
“흐음. 그거 못 본 건, 좀 아쉽긴 하네. 그렇다고 치지 뭐.”
“아잇……!”
오랜만에 수업이 끝나고도 과실에 우진이 남아있자, 소연은 쪼르르 다가와 재잘재잘 떠들었다.
뭔가 기회만 되면 하고 싶었던 말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는지, 우진의 옆자리에 착 달라붙어 앉은 소연은 쉼 없이 말을 이었다.
“아니, 어떻게 신입생이 축제를 즐기지 않을 수가 있어?”
“그리고, 어! 조별과제 같이하려면 학교에도 좀 남아있고 해야지 어!”
우진은 눈치가 아주 나쁘지는 않은 편이었다.
때문에 소연의 어투에 약간의 서운함 같은 것이 묻어남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하긴. 내가 너무 팀플에 소홀하긴 했지. 팀플 날짜 잡자는 걸, 세 번이나 거절했으니 말이야.’
당연히 우진은 팀플을 하기 싫어서 거절한 게 아니었다.
전공 수업에 대한 욕심은 우진도 다른 학생들 못지않게 많았고.
때문에 소연과의 팀플 또한, A+를 목표로 삼고 있었으니 말이다.
다만 5월은 그에게, 정말 조금의 여유도 없을 만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한 달이었을 뿐이다.
소연의 눈치를 잠시 살피던 우진이, 슬쩍 입을 열었다.
“자, 우리 팀원님.”
“왜. 뭐!”
“그런 의미에서 오늘, 지난번에 못 했던 팀플을 하는 건 어때.”
우진의 말에 소연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뭐? 미리 얘기도 안 하고 갑자기? 오늘?”
“응.”
“안 해. 못해. 갑자기 바쁜 일이 생겼어. 나 간다! 빠이!”
우진을 향해 코웃음을 친 소연은, 고개를 휙 돌리며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우진은 어쩐지 소연이 집에 가려는 시늉만 하는 것 같다고 느꼈기에,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팀원님. 팀플, 진짜 안 하고 가시렵니까?”
“나, 간다니까?”
“팀플 예정 장소가 ‘한우마을’인데도?”
노트북을 정리하던 소연의 두 손이, 잠깐 멈칫하였다.
“한우……마을? 티, 팀플을 왜 거기서 해?”
소연의 목소리가 살짝 떨린다.
그녀가 고기. 특히 소고기 마니아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우진의, 강력한 한 수라고 할 수 있었다.
“팀플이 꼭 노트북을 켜고 스케치를 하고 도면을 그려야만 팀플인 것은 아닌 법.”
“뭐……?”
“투플 꽃등심을 음미하면서 팀원 간의 돈독한 우애를 다지는 것도, 일종의 팀플이 아니겠는가.”
평소 같았다면 아재같이 말하지 말라며 등 짝을 때렸을 소연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한우.
그것도 투플러스 등급의 꽃등심이라니.
소연은 자신도 모르는 마음속 어딘가에 콕 박혀있던 우진에 대한 서운함이, 저도 모르게 사르르 녹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조, 조금 괜찮은 생각인 것 같긴 한데…….”
이어서 고민하는 소연을 향해, 우진이 결정타를 날렸다.
“내가 지난달에 노느라 팀플을 못한 게 아니거든.”
“……?”
“5월 한 달 동안 개미같이 일해서, 우리 팀원님께 소고기 대접할 돈을 벌어왔단 말씀.”
“진심?”
“오늘 하루만큼은……. 우리 팀원님이 설령 밥 한 숟갈 안 뜨고 업진살만으로 배를 터질 때까지 채운다고 해도, 기꺼이 내 지갑을 내어놓도록 할게.”
사실 투플 꽃등심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소연은 이번 달에 들어온 알바비를 머릿속으로 계산하고 있었다.
소고기를 설마 사준다고 이야기할 줄은 몰랐으니 말이다.
그런데 심지어 배가 터지도록 먹을 수 있게 사준다니.
이미 팀플 거부로 인한 서운함은, 저 멀리 날아간 소연이었다.
“좋아. 이번만 특별히 양보하도록 할게.”
“역시 한우는 위대해.”
“한우 때문인 줄 알아?”
“응.”
“그렇지 않아. 단지 미안해하는 오빠의 진심이, 내 마음을 움직였을 뿐이야.”
“그렇다면 역시, 한우는 훌륭한 매개체였어.”
“그건 동의해.”
한우 생각에 신이 난 것인지, 소연은 책상 위에 널브러진 우진의 짐을 대신 정리 해주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고기를 향한 그 정성에 감동받은 우진은, ‘한우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소연에게 메뉴판을 내밀었다.
메뉴 옆에 쓰여 있는 가격표는, 손으로 가린 채로 말이다.
“자, 골라.”
“이건 왜 가렸어?”
“가격은 신경 쓰지 말고 고르라는 의미야.”
“이 오빠 오늘 뭐지? 어디서 로또라도 맞은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설마 로또 맞고 한우 한 끼로 퉁 치려는 거면…….”
“오늘 팀플, 취소할까?”
“꽃등심 하나, 채끝 하나, 갈빗살 하나. 괜찮으면 육회도 한 그릇 추가.”
“콜.”
일사천리로 고기를 주문하자, 곧 지글거리는 불판과 함께 새하얀 마블링이 가득한 최상급 한우가 대령 되었다.
이어서 영롱한 고기의 자태에 두 눈이 반짝이기 시작한 소연이, 순식간에 고기와 함께 나온 집게와 가위를 낚아채었다.
“오늘 고기는, 이 소연 님이 집도한다.”
“너, 고기 잘 구워?”
“당연.”
“좋아. 좋은 자부심이다.”
“기다려 봐. 고기가 혀에 닿자마자 살살 녹는 기적을 보여줄 테니까.”
소연은 자신의 장담처럼 기대 이상으로 고기를 잘 구웠고, 우진은 그녀가 구워주는 고기를 맛있게 먹으며 소연의 고기 철학을 경청하였다.
“오빠. 소고기는 말야, 세 번 이상 뒤집으면 안 돼.”
“왜?”
“센 불로 앞뒤 바싹하게 한 방에 구워줘야, 육즙이 그대로 안에 갇혀서 야들야들해지거든.”
“흠…….”
“맛있지?”
“맛있어.”
우진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소연이 압박을 가했다.
“그게 끝이야?”
“아니. 지금 혀 위에서 고기가 녹고 있는 중이야. 맛을 음미하느라 대답을 길게 못 한 것뿐.”
“그렇다기엔 발음이 너무 좋은데?”
“대충 겁나 맛있다는 뜻이야. 넘어가자.”
열심히 변명하는 우진의 태도가 만족스러운 소연은, 배시시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역시 그렇지? 그럼 이번에는 이것도 한번 먹어봐. 사실 입에서 녹는 맛은 채끝이 일품인데, 갈빗살은 식감이 탱탱한 게 또 다른 매력이 있거든.”
고기를 구우며 신나서 떠드는 소연을 보며, 우진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면, 얘도 참 특이한 캐릭터란 말이지.’
얼굴은 예쁘장하게 생겨가지고서, 남고 다니던 시절의 친구들이 떠오를 만큼이나 털털하고 수더분한 성격.
게다가 학교에 잘 나타나지도 않는 노땅 오빠를 이렇게나 열심히 챙겨주는 착한 마음씨라니.
‘회귀 덕에 이렇게 좋은 친구도 생겨 보고……. 복 받은 인생이야. 복 받은 인생.’
우진은 새삼 소연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우진의 입에선, 자신도 모르게 불쑥 한 마디가 새어 나왔고…….
“야, 잘해보자.”
“……? 갑자기 분위기 뭔데? 왜 이래?”
“음, 방금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극혐!”
“아니, 물주한테 못 하는 말이 없네, 이 친구.”
그렇게 티격대던 두 사람은, 결국 즐겁게 웃으며 고깃집을 나올 수 있었다.
물론 20만 원이 넘게 찍힌 계산서를 몰래 확인한 우진은, 속으로 눈물을 머금어야 했지만 말이었다.
‘앞으로 소고기는……. 좀 조심할 필요가 있겠어.’
소고기값을 법인카드로 슬쩍 긁긴 했지만, 결국 그 돈도 우진의 돈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 * *
일주일 중 직장인에게 가장 설레는 시간.
금요일 오후 4시에 상사의 호출을 받은 박병재는, 무척이나 불안한 마음으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젠장. 월요일 업무보고서까지 싹 다 써놨는데……. 이 시간에 대체 왜 부르는 거지?’
그에게는 한 가지 징크스가 있었다.
금요일 오후를 잘 넘기지 못하면, 그 주 주말은 항상 불행해진다는 징크스.
그 불행이라는 것이 크게 거창한 것은 아니다.
야근 때문에 금요일 술 약속을 취소하게 되고……. 그렇게 좋아하는 술도 한 모금 못 한 채 열심히 일하고 퇴근했는데, 늦었다며 아내에게 바가지가 긁히게 되고.
억울한 나머지 버럭 화를 내면, 그것이 부부싸움이 되어 황금 같은 주말을 스트레스 속에 통째로 날리게 되는.
그런 사소한(?) 불행들 말이다.
사실 평소에 술자리를 좋아하여 이미 아내와의 신뢰가 깨진 것이 진짜 부부싸움의 이유였고.
그러니까 사실 징크스라기보단 아주 필연적으로 찾아온 불행들이었지만.
항상 업무 스트레스에 찌들어있는 병재에게 그런 이성적인 사고와 통찰력을 바라는 것은, 어쩌면 무리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병재의 징크스는, 어김없이 그를 찾아와 우울하게 만들고 있었다.
“박 과장, 왔어?”
“예, 부장님. 무슨 일이신지…….”
“자네 이번에, 천웅건설에서 프리미엄 브랜드 런칭한 거 알고 있지?”
“옙, 알고 있습니다.”
“거기 분양홍보관이, 청담동에 오픈했다고 하는데 말이야…….”
왔다.
올 것이 왔다.
“말씀…… 하십시오.”
이 비슷한 레퍼토리를 이미 수없이 경험한 병재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한숨을 꾹꾹 눌러 집어삼켜야 했다.
“내일 아침에 거기 좀 갔다 와봐. 애들 둘 정도 데려가서, 천웅 놈들이 무슨 꿍꿍이로 신규 브랜드를 런칭 한 건지, 분석 좀 해보라는 말이야.”
병재는 당장이라도 쌍욕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참아내며, 속으로 분을 삼켰다.
‘아니, 이 새끼는 내일이 토요일인 걸 모르는 건가? 이런 걸 시킬 거였으면, 업무시간에 보내면 되잖아, 업무시간에! 제기랄!’
그의 직속 상관인 김 부장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꼭 주중에는 별말 없다가 금요일 오후만 되면 이런 귀찮은 일을 하나씩 툭 툭 던지는.
아주 악질적인 습관을 가지고 있는 최악의 상사.
하지만 사회생활 십 년이 넘은 배테랑 샐러리맨 병재는, 그렇게 쉽게 불만을 표출할 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인성과 별개로 김 부장은 회사 내에서 능력 있는 인물이었고.
결국 김 부장의 줄을 잘 붙잡고 있어야, 몇 년 안에 병재가 그의 자리를 꿰찰 수 있을 테니 말이었다.
병재는 불만스런 표정을 짓는 대신, 환한 자본주의 미소와 함께, 청산유수처럼 거짓말을 시작했다.
“아, 그렇지 않아도 기본적인 자료는 이미 수집 좀 해뒀습니다, 부장님.”
“오호, 그래?”
“천웅에서 겨우 인지도 쌓아 둔 CW브랜드를 버리고 프리미엄 브랜드를 런칭하는 데에는, 뭔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하. 그렇지. 역시 자네는 생각하는 게 빠르단 말이야. 이래서 내가 자넬 좋아한다니까. 하하핫.”
병재는 호쾌하게 웃는 김 부장의 얼굴에, 당장이라도 주먹을 꽂아 넣고 싶었다.
‘있긴 뭐가 있어, 제기랄. 멍청한 천웅건설 마케팅 부서에서, 허공에 돈 날리면서 바보짓 하고 있는 거지.’
건설사의 주거브랜드 인지도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집이라는 것이 일이십만 원 짜리 전자제품도 아니고, 보통의 가정에선 전 재산을 들여야 장만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아파트라면 믿고 분양받을 수 있어’라는 인식이 생기는 데까지, 오랜 세월과 갖은 노력이 필요한 것은 너무 당연한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천웅건설에서 겨우 이미지 만들어 놓은 CW를 버리고 새 브랜드를 런칭한다는 발상 자체를, 병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더 화나고 짜증 났다.
그의 기준에선 멍청이들의 멍청한 생각을 알아보는 데에, 그의 황금 같은 주말을 써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리고 명성이나 태진이면 모를까. 대체 회사에선 왜 자꾸 천웅을 신경 쓰는 거야?’
게다가 천웅건설은, 병재의 회사인 ‘제운건설’과 비교했을 때, 모든 면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회사였다.
업계 순위야 같은 한 자릿수라곤 하지만, 1위와 9위 사이에는 극복하기 힘든 격차가 존재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해서 병재는, 아주 썩어버린 기분으로 김 부장의 방에서 나와야 했다.
“월요일 보고서에 첨부하겠습니다, 부장님.”
“좋아. 기대하도록 하겠네, 박 과장.”
양심에 가책이라도 느끼라는 마음에 한 마디 던져봤지만…….
“그럼, 좋은 주말 보내십시오.”
“고맙네. 이제 나가 봐.”
김 부장이라는 인물은, 역시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는 눈치였다.
애초에 김 부장에겐 박병재가 주말에 일하는 것이, 별로 특별한 상황이 아니었다.
‘후우. 진짜 거지 같네. 홍보관 오픈이 10시였지? 애들 데리고 오픈 맞춰 가서, 대충 둘러보고 나와야겠어.’
병재는 어떻게 하면 최대한 적은 노력으로 이 귀찮은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그는 알 수 없었다.
별생각 없이 홍보관을 방문한 그가, 누구의 강압도 아닌 ‘자의’로 열심히 일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었다.
“……? 대체 이 미친놈들은, 여기에 얼마를 처바른 거지?”
이것이 팀원들과 청담 홍보관에 도착해 아무 말 없이 내부를 둘러본 그의 입에서, 가장 처음으로 튀어나온 첫 마디였다.
골든 프린트